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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325화 (325/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25화

    70. 추방의 역사를 들으며(4)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온다.

    ‘정체가 뭐야.’

    감히 내 능력을 재단하려 하고 건방지게 누굴 돕는다고 하여 처박아 두었거늘.

    생각없이 ‘신의 장난’이라 여겼던 애물단지가 정말 앞을 보여주었다.

    몇 번을 반복해 눈을 감았다 떠도.

    눈을 비비고 주변을 둘러봐도 선명하게 보인다.

    ‘너 뭐야.’

    부르지 않을 때는 잘도 나오더니 이번에는 답이 없다.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라는 말 과 기다리겠다는 말이 계속해서 머 릿속을 떠돌았다.

    몇 번을 더 불러봤지만 여전히 무반응.

    언젠가는 알 수 있을 테니 지금은 돌아가는 것부터 생각하자.

    지나온 길로 돌아가자 곧 칼과 스칼라가 보였다.

    칼은 예상대로 인자해 보이는 노인이었고 스칼라는 스무 살 정도로 보였다.

    두 사람 다 머리를 땋아 옆으로 내리고 있었는데 아마 테메스인들 의 풍습인 듯하다.

    푸른 눈과 옅은 갈색 머리.

    아시아인과는 확연히 다른 외관이 유럽인을 조상으로 두고 있다는 걸 말해주었다.

    “오래 걸렸군. 그래, 무엇을 느꼈는가.”

    천천히 일어나 돌아선 칼이 깜짝 놀랐다. 스칼라 역시 마찬가지.

    “누, 눈이.”

    “어찌된 건가.”

    답하고 싶어도 설명할 길이 없다.

    “모르겠어요.”

    숨김과 거짓 없는 말이었지만 두 사람은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다.

    나조차 이해할 수 없거늘, 이들이 아니라 누구라도 놀랄 것이다.

    큰 상처를 입고 실명해 눈조차 못 뜨던 사람이 잠깐 사이에 멀쩡하게 돌아다니니 말이다.

    계속 이야기해 봐야 이해시킬 수 도 없을 듯해 화제를 바꾸었다.

    “신기하더라고요. 동굴 틈새랑 떨 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음악처럼 들리는 게.”

    나를 유심히 살피던 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테메스 신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군.”

    또 종교적인 말이다.

    “바람과 물 소리를 통해 테메시 신과 닿은 것이오. 당신의 눈이 그 증거. 테메스 신의 사랑을 받는 사람일수록 그 소리를 온전히 받아들 일 수 있소.”

    듣는 사람마다 다르게 들린다는 뜻인가.

    “그대가 들은 소리를 들려줄 수 있소?”

    칼이 동굴 한쪽을 가리켰다.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낯선 바이올린이 놓여 있었다.

    손에 쥔 순간 칼이 그간 빌려주었던 바이올린이라는 걸 깨닫고는 미안한 마음에 슥슥 문질러주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시작과 끝이 없어 적당히 바람과 물의 소리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들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 완벽한 구성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신의 목소리라 하지만 그 도 그럴 것이 자연이 이러한 멜로 디를 가질 수 있다니.

    참으로 놀랍다.

    10분쯤 연주했을까.

    끝이 없을 듯해 활을 내리자 칼과 스칼라가 넋을 놓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고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칼이 내 손을 부여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내가 아는 한 이렇게까지 신의 목소리를 길게 들은 사람은 없었소. 당신은 실로 신께 사랑받는 사람이 오. 그 큰 상처가 나은 기적을 받을 만하오.”

    조금 당황스럽다.

    칼이 정말로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테메스 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고맙소. 정말 고맙소.”

    그렇게까지 놀랄 일인가 싶었는데.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야 그렇다 쳐도 바람 소리는 간간히 시력을 잃은 뒤 발달한 내 귀로도 제대로 듣기 힘들었다.

    아마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중간에 자연의 소리, 아니, 테메스의 목소 리가 끊겨 들리지 않았을 터다.

    이들은 이 동굴에서 나는 소리를 얼마나 깊이, 자세히 들을 수 있는 지를 ‘신에게 사랑받는’ 일로 여기는 듯하다.

    ‘ 전화위복인가.’

    어쨌든 우선은 믿어준다고 하니 다행.

    스칼라가 보따리를 챙겼다.

    하나가 더 있었는데 내게 넘기고는 어떻게 묶는 건지 시범을 보였다.

    “이렇게 하는 거야.”

    “잘 안 되는데?”

    “줘 봐.”

    녀석이 내 등 뒤로 손을 뻗어 천을 가져나왔고 가슴팍 부근에서 묶어주었다.

    “나쁘지 않네.”

    “그래.”

    지금까지의 틱틱 대던 모습과 다른 느낌이다.

    “왜 그렇게 봐? 자, 신발.”

    “이걸로도 괜찮은데.”

    “그런 걸로는 산 못 내려가.”

    방금의 연주 때문인 듯.

    순순해진 녀석과 함께 칼과 인사를 나누고 걷기 시작했다.

    아직 해가 뜨기 전.

    어둠이 푸르스름하게 걷힐 즈음이다.

    테메스인들을 만난 것도.

    또 그들의 음악을 알게 된 것과 지금껏 내가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점.

    멋진 노예를 맞이한 것.

    또.

    ‘……너 대체 뭐 하는 놈이냐.’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신의 장난’ 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 것까지 정신없는 여정도 이제 끝이다.

    *

    전 세계에 클래식 음악 열풍을 일으키고 OOTY 오케스트라 대전에서 정점에 오른 천재 음악가가 실종된 지 5주째.

    인류는 크나큰 상실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 매체에서는 연일 구조 활동에 대해 보도했지만 사망 확인자는 늘어만 갔다.

    WH 그룹은 유가족들에게 최대한 예우를 갖추어 보상하였고 기적적으로 생존한 네 사람에게는 그들이 하 루빨리 본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도록 여러 방면에서 지원했다.

    그러나 모든 탑승 인원에 대한 조사가 마무리되었음에도 배도빈 만큼은 찾을 수 없었다.

    그의 가족과 가까운 인물들은 비탄의 늪에 빠져 있었다.

    “여기까지.”

    눈에 띄게 쇄약해진 푸르트벵글러가 연습실을 벗어나자 단원들이 한 숨을 내쉬었다.

    유쾌했던 베를린 필하모닉은 이제 대화조차 거의 나누지 않았는데 그 중에는 푸르트벵글러와 같이 식음 조차 제대로 못 하는 이도 있었다.

    이제 정말.

    전 세계로부터 인정받아 영광의 무대만이 남았다고 생각했거늘.

    배도빈이 살아 있을 거라는 희망 조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몇몇 언론과 팬들 사이에는 이미 죽은 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조심스레 올라왔고.

    배도빈의 주변 인물 모두 그러한 말을 헛소리로 치부했지만 조금씩은 느끼고 있었다.

    비행기 추락 후 히말라야의 가혹한 환경 속에서 5주간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 기적을 바라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특히나 최지훈의 경우에는 상태가 심각했다.

    가족을 제외하고 배도빈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많은 기자가 그와 인터뷰를 나누길 바랐는데, 매일 집 앞에 진을 치고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는데.

    그중 한 명이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베를린 필하모닉에 합류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배도빈 씨의 사망이 거의 확실시 되는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까?”

    “뭐?”

    자택 앞에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질문을 받은 최지훈이 질문을 한 기자를 노려보았다.

    천진난만한 미소와 귀공자 같은 외모로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던 그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명백한 적의였다.

    마치 맹수가 먹이를 노려보는 듯한 기분마저 들어, 주변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질문을 해대던 기자들도 심상치 않은 반응에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최지훈은 시선을 고정한 채 앞으로 나섰고 그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댄 브라운.”

    최지훈이 댄 브라운 기자의 신분 증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단지 이름을 불렸을 뿐이었지만 댄 브라운은 사색이 되었다.

    세계적 기업 EI 그룹의 가장 큰 파 워를 지닌 EI전자의 사장직을 맡다가 지금은 6개월 만에 인터플레이를 누 르고 전 유럽 시장의 4할을 차지해버린 JH의 총수 최우철.

    굳이 경제 쪽 전문 기자가 아니더 라도 최우철이 어떤 인간인지 모르는 이는 언론인은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기에 댄 브라운은 저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그 모습을 보던 최지훈이 주변을 둘러보며 경고했다.

    섣부른, 어설픈 협박은 하지 않았다.

    단지 기자들과 눈을 마주하는 것 만으로 그들이 헛소리를 하지 못하게.

    주제를 깨우쳐 주었다.

    최지훈이 자택으로 들어가자 기자들은 그제야 얼어붙었던 발을 옮길 수 있었다.

    “……그 최지훈 맞아?”

    “눈 한번 살벌하네.”

    “형제처럼 지낸다고 했으니까. 예민하겠지. 후우. 인터뷰 못 따면 들 어오지 말라 했는데. 이제 어딜 가냐.”

    한편.

    집으로 들어온 최지훈은 재킷을 벗어던지고는 머리를 감쌌다.

    필사적으로 참아내긴 했지만 감정을 주체하기 벅찼다.

    헛소리를 하는 인간의 얼굴을 짓이겨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냈다.

    생전 처음으로 사람을 때리고 싶다고 생각했기에 최지훈은 찬 물을 들이켜곤 눈을 감았다.

    세수를 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기 전 숨을 고르고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복도에서도 들릴 정도로.

    서럽게 우는 친구를 달래기 위함이었다.

    “꺼어어억어엉.”

    주저앉은 채 오열하는 차채은에게 다가간 최지훈이 그녀를 꽉 안았다. 등을 쓸어내리자 그제야 조금씩 진 정했다.

    “괜찮아. 괜찮아.”

    “헙. 허어어어엉.”

    “도빈이 괜찮을 거야.”

    “그 새끼들이. 끄읍! 그 새끼들이 자꾸 오빠 죽었다고오!”

    “안 죽었어. 다 헛소리야.”

    차채은 역시 기자들의 타깃이었기에 16살의 소녀가 감당키에는 너무나 가혹한 상황이었다.

    최지훈과 차채은 두 사람 모두 너 무나 슬펐지만 차마 배영준, 유진희, 배도진 앞에서 울 수는 없었기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기대 간신 히 버티고 있었다.

    “진짜 싫어! 다 죽었으면 좋겠어. 제발. 흐어어엉.”

    차채은의 등을 쓸어내리던 최지훈도 같은 생각이었다.

    남의 불행을 ‘알 권리’를 들먹여 자신의 포트폴리오로 삼으려는 악질들은 사실 이외의 ‘화제성’을 얻고자 주변인들을 괴롭혔다.

    배도빈 일가의 저택은 WH의 사설 경호팀이 붙어 24시간 기자들의 접근을 막았는데.

    그것이 첫째를 잃은 가족의 상처를 더욱 비틀었다.

    최지훈은 당장에라도 찾아가 어머 니와 도진이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또 화제가 되어 기자, 아니, 쓰레기들이 날뛸 것이 두려웠다.

    ‘도빈아.’

    그리고 형제를 잃는 것이 더욱 두려웠다.

    한편.

    배도빈 일가의 저택은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둘째를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으로 겨우 이성을 잡은 유진희는 하루하루 위태로워 보였다.

    아들을 찾아 나선 남편마저 잘못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어 배도진이 없었더라면 정신을 온전히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함께 살고 있던 왕 소소와 나윤희, 진달래 그리고 이웃인 이승희는 큰 힘이 되어주었다.

    그들 역시 사무치게 괴로웠지만.

    나윤희가 유진희와 배도진을 돌보고 있으니 조금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게을렀던 왕소소가 집안인을 살폈 고 진달래는 배도진과 놀아주며 유 진희가 그나마 조금 쉴 수 있게 도 왔다.

    식음을 전폐한 유진희는 너무나 약해졌고 나윤희는 그녀가 조금이 라도 쉴 수 있게 최선을 다해 그녀 와 저택 구성원들을 돌봤다.

    그렇게.

    남은 사람이 서로를 의지해 버티는 동안에도 슬픔은 더욱 커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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