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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324화 (324/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24화

    70. 추방의 역사를 들으며(3)

    “껄껄. 요즘 마을 사람들이 당신 덕분에 즐거워하고 있소.”

    “덕분에 저도 살았으니까요.”

    이틀이 더 지나고 방문한 촌장의 목소리가 무척 밝았다.

    이들에게 내 음악은 무척이나 신비롭고 신선하게 받아들여진 듯한데 나로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스칼라라는 녀석은 많은 영 감을 주어 언젠가 한 번쯤 하프를 익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래, 무슨 일이신가.”

    “아마 곧 있으면 이곳으로 사람들이 올 거예요.”

    촌장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모르긴 해도 절 찾으려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닐 거예요. 어쩌면 국가 차원에서 수색하고 있을지도 모 르고요.”

    앞을 볼 수는 없지만 분위기만으로 도 그가 내 말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시로 데려가 주세요. 이 마을이 왜 숨어 살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당 신들이 그걸 바란다면 망치고 싶지 않아요.”

    “진심이로군.”

    대답하진 않았다.

    “……우리에 대해 함구한다는 약속, 할 수 있겠나?”

    아버지가 마음에 걸린다.

    그러나 이들이 그것을 바란다면 강제로 들추는 게 바람직한 일일까.

    “그럴게요.”

    “자네의 영혼을 믿네.”

    옷 쓸리는 소리가 나 서둘러 입을 열었다.

    “하나 더.”

    “무엇인가.”

    “당신들에 대해 알고 싶어요. 어떻게 그런 힘을 가질 수 있었는지, 왜 유럽을 떠나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가능하다면 제 눈을 고치고 싶어요.”

    잠시 간격을 두고 촌장이 다시 자 리에 앉았다.

    “허허. 이만큼 뻔뻔하면 웃음이 나 오는군.”

    그의 목소리에서 적의는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진 않아. 차라리 솔직하게 물어오니 안심일세.”

    “그럼.”

    “그러나 말해줄 수 없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네. 자네는 우리에 대해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어.”

    테메스족의 지도자 칼은 마을 사람 들을 모아두고 배도빈이란 남자를 어떻게 다룰지 의견을 나누기 시작 했다.

    돌려보내자는 말에 반박하는 사람이 나섰다.

    “그건 안 됩니다. 그는 이미 우리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돌려보냈다간 분명 문제가 생길 겁니다.”

    “선조들의 격언을 잊어선 안 됩니다. 바깥 사람들은 분명 저희를 이용하려 들 거예요.”

    “그는 비록 외부인이지만 우리말을 알고 정말 뛰어난 음악가에요. 결혼을 시키고 이곳에 정착하게 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찾아 바깥 사람들이 이곳에 찾아온다고 했어요.”

    “그런 거 거짓말이 당연하잖아. 사람 한 명 찾는다고 국가가 움직인다는 게 말이 되냐고.”

    “그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을 듣고도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의 영혼은 고결하고 순수해요.”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요?”

    “그를 내보내도 결과는 똑같아.”

    많은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유독 스칼라만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촌장 칼은 스칼라를 향해 물었다.

    “스칼라,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스칼라.”

    “네?”

    "그를 어찌해야 하냐고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렇게 답한 스칼라는 다시 배도빈을 떠올렸다.

    마을 최고의 연주자인 스칼라에게 있어 배도빈은 너무도 가슴 벅찬 존 재였다.

    그의 손끝에서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끊임없이 펼쳐졌고 그의 입에서는 여러 악기, 오케스트라, 무대, CD, 디지털 스트리밍과 같이 설레는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그가 말하는 여러 음악가들의 연주도 직접 듣고 싶었다.

    특히나 오케스트라.

    백 명이 넘는 연주자들이 각기 다른 악기를 다뤄 하나의 곡을 연주하는 느낌이 대체 무엇인지.

    스칼라는 너무도 알고 싶었다.

    마을의 규율이 없었더라면 그는 당 장 배도빈을 엎고 산을 내려갔을 것 이었다.

    스칼라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도 이야기는 점점 배도빈을 보내면 안 된다는 의견으로 기울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촌장 칼의 말에 마을 사람들이 각 자의 집으로 돌아갔고.

    “스칼라, 너는 남아 나를 돕거라.”

    “ 네.”

    칼이 손자 스칼라를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방에 들어온 두 사람은 화톳불을 가운데에 놓고 마주 앉았다. 칼이 아무 말 없었기에 스칼라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뭐 할까요?”

    “요즘 배를 보러 다니더구나.”

    “……무, 무슨 짓을 할 줄 모르니 감시하는 겸 다니고 있어요.”

    “정말이냐?”

    “그럼요.”

    “얀은 네가 즐거워 보인다고 하던 데.”

    스칼라는 속으로 쓸데없는 말을 했다고 얀을 탓했다.

    “밖으로 가고 싶은 게냐.”

    할아버지의 말에 스칼라가 깜짝 놀 라 고개를 들었다.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지만 칼의 눈에는 나가고 싶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감추지 마라. 우린 서로에게 단 하나뿐인 가족이 아니더냐.”

    “그가 무슨 말을 하더냐.”

    머뭇거리는 손자를 보며 칼이 먼저 입을 뗐다.

    “그는 한 악단의 지휘자라 하더구 나. 베를린 필하모닉이라 했지.”

    “믿을 수 없어요. 200명이 넘는 연주자들이 모여 연주를 한다니. 그들이 연주를 하면 수백만 명이 듣는대요. 거짓말쟁이에요.”

    스칼라의 말은 조금씩 빨라졌다.

    “그들은 하프 줄을 금속으로 쓴다 고 했어요. 장치를 달아 반음을 다룰 수 있다는 거짓말을 했고 소리를 저장해서 언제든지 다시 들을 수 있다고 했어요. 입에 발린 거짓말이 틀림없어요.”

    그의 말과 달리.

    눈은 빛나고 있었다.

    칼은 스칼라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중에는 큰 배를 만들어서 사람 들을 데리고 전 세계를 누비며 공연을 한대요. 수천 명이 탈 수 있는 배 따위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가고 싶구나.”

    “내가 죽으면 네가 이 마을을 이끌 어야 한단다.”

    “……알아요.”

    “하지만 동시에 테메스 신의 뜻을 이뤄야 할 사명도 갖고 있지.”

    칼은 어느새 장성한 스칼라를 바라보며 과거를 떠올렸다.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하프를 곁에 두고 자던 스칼라는 마을 최고의 연주자가 되었다.

    모든 이가 테메스 신을 위로할 이로 여겼다.

    그러나 스칼라는 더 발전할 수 없었고 그것에 고뇌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의 기대 속에서 압박 받았고 스스로 더 나아가지 못해 괴로워하는 손자를.

    할아버지는 안타깝게 여길 뿐이었다.

    “네 얼굴이 참으로 밝더구나.”

    그런데.

    배도빈이 마을에 온 뒤로 스칼라의 얼굴이 밝아졌다.

    매일 새로운 음악을 접하고 놀라며 즐거워하는 모습에 할아버지는 손자가 있어야 할 곳이 이곳이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할아버지.”

    “스칼라, 그와 함께 나가서 더 큰 세상을 배우거라. 그래서 테메스 신이 만족할 만한 연주를 하게 된다면 너의 역할은 다한 것이다.”

    “할아버지!”

    “그는 믿을 수 있다. 그의 바이올린을 들으면 그가 얼마나 순결한지 알 수 있어.”

    “싫어요.”

    “테메스 신을 볼 때까지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마라.”

    칼의 단호한 말과 곧은 시선을 접한 스칼라는 한순간 말을 잃은 뒤.

    눈물과 함께 할아버지를 끌어안았다.

    자고 있는데 누군가 날 툭툭 건드렸다. 짜증을 내며 일어났더니 스칼라가 귀에다 입을 가져다댔다.

    “뭐 하는 짓이야!”

    “쉿!”

    “소름 끼치니까 하지 마!”

    “조용히 하라고!”

    무슨 일인가 싶어 일단 가만있었더니 녀석이 내 팔을 들어올렸다. 화들짝 놀라 손을 빼냈더니 등을 때려 이성을 잃기 일보직전에 녀석이 반 가운 이야기를 꺼냈다.

    “도시로 데리고 가달라며. 가만히 좀 있어.”

    그런 거라면 미리 말을 해야지.

    순순히 녀석이 입혀주는 옷을 입었다. 거친 털이 느껴지는 두툼한 옷이다.

    “따라 와.”

    녀석이 내 팔목을 붙잡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중간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한 것을 스칼라를 붙잡고 늘어지니 녀석이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하라더니.”

    “안 놀라겠어?”

    그렇게 한참.

    체감으로 30분쯤 걸으니 걸음 소리가 울리고 바람이 멎었다. 동굴이 나 어떤 건물에 들어온 듯한데 촌장 칼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오시오.”

    “……네.”

    “스칼라, 올 때 들키지는 않았느냐.”

    그 난리를 해놨으니 나도 녀석도 차마 조용히 왔다고 말하진 못했다.

    칼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스칼라에게 이야기는 들었을 테고. 조건이 있소.”

    “ 얼마든지요.”

    “우리에 대한 비밀을 지킬 것.”

    고개를 끄덕였다.

    “스칼라를 데려갈 것.”

    정말 의외라 고개를 뒤로 빼자 칼이 말을 덧붙였다.

    “그대의 영혼을 믿고 부탁하오. 스칼라가 더 넓은 세상에서 음악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시오.”

    이쪽에서 바라던 바다.

    베를린 필하모닉에 앉혀다가 전 세계를 누비는 해상 오케스트라에 취직시켜줄 거다.

    그의 수준과 상응하는 보수도 원하는 분야에 대한 교육도 지원해 줄 생각이다.

    “그럼요.”

    “……할아버지, 역시 안 되겠어요. 너무 쉽게 대답하잖아요.”

    “아니. 그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나이 먹은 사람들끼리 통하는 말이 지만 연륜이 그냥 쌓인 것이 아니다.

    “그리 해준다면 그대가 원하는 걸 들려주겠소.”

    생각보다 일이 너무 잘 진행되어 그간 답답했던 것이 조금은 가신다.

    “문제없어요.”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앉도록 하시오.”

    주춤거리며 주변을 더듬으니 스칼 라가 의자로 인도해 주었다.

    갑작스러운 만남과 수수께끼 같은 상황 속에서 칼의 무거운 입이 마침 내 떨어졌다.

    “테메스 신은 소리의 신, 우리 선조들께서는 그분을 모시고 있었소. 브리튼에서 번성했지. 그러나 곧 로 마 제국의 침략으로 우리는 터전을 잃고 떠돌던 선조들께서는 이내 합 스부르크 왕가의 영토에 자리를 잡 으셨소. 빈이라고 하던데, 당대 음악가들은 모두 그 근처에 있었다고 하 오.”

    아버지께 들은 그대로다.

    “오랜 유목 생활로 규모는 줄어들었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의 도움으로 그나마 전쟁터에 끌려가진 않아도 되었소.”

    “그게 무슨.”

    “치료의 힘 때문이오.”

    ……알 것 같다.

    가장 안전한 곳에서 수천, 수만,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버리는 빌어먹을 놈들이 이들의 힘을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진 않았지. 유럽에 큰 전쟁이 터졌고 오스트리 아에서는 테메스인을 찾아 강제로 징병하였소. 대부분 죽고 남은 무리는 간신히 유럽을 떠나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이곳에 자리하게 되었소.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역사의 반복 이오.”

    이들과 같은 경험은 아니지만.

    테메스인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다시 태어난 뒤 가장 분노했을 때는 아돌프 히틀러라는 정신 나간 짐승 새끼가 내 곡들을 체제선전용으로 썼다는 것이었다.

    나 루트비히를 독일인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인물로 내세워 행한 개짓거리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고.

    그 거짓에 선동되어 전쟁터에서 죽어간 수백만 명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분통이 터졌다.

    사람을 위로하기 위한 음악이.

    사람을 이용하고 죽이는 데 사용된다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았기에 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상황을 이해하셨소?”

    “네.”

    “……그럼 남은 건 시험뿐이오.”

    “시험?”

    “나는 당신을 믿지만 내 감만으로 당신을 보내줄 순 없다는 입장을 이해하리라 믿소. 그러니 테메스 신께 도움을 청할 것이오.”

    칼은 마치 테메스가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종교적 의식절차일 것이 뻔해 순순히 들어주기로 하며 일어서자 칼이 내 어깨를 잡아 방향을 잡아주었다.

    “앞으로 곧장 걸어가시오.”

    “그러고요?”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되오.”

    대체 내 진심을 뭘로 믿는다는 건 지 알 수 없었지만 나와 그들을 위해서라도 이곳에서 나가야 하니 시키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허.’

    신기하다.

    분명 동굴일 텐데 어디론가 들어오는 바람이 묘한 소리로 화음을 이룬다.

    마치 음악처럼.

    걸어 들어갈수록 멜로디는 선명해져 정말 누군가의 의도가 아닐까 싶은 훌륭한 음악이 귀를 즐겁게 했다.

    ‘ 따뜻하다.’

    이렇게 포근한 소리가 또 있을까.

    자연의 노래를 들으며 슬며시 듣는데, 그간 얌전했던 놈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워낙 오랜만에 ‘보는’ 거라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금까지 치워두면 얌전했던 ‘신의 장난’이 말을 듣지 않고 여러 문장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뭐야, 대체.’

    당황한 나머지 그것들을 치우려 고개를 흔들자.

    순간 바람 소리가 멈췄고.

    시끄럽게 울리던 ‘신의 장난’도 사라진 끝에.

    똑— 똑—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방금 뭐였지.’

    심상치 않아 돌아갈까 생각하던 중, 다시금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어울렸다.

    그러고 있자니.

    마음이 이끌려 그 소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완벽한 음악.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음악이다.

    그때.

    다시금 눈앞에 ‘문장’이 떠올랐다.

    [상실한 시각을 회복합니다.]

    [있어야 할 곳으로 속히 돌아가기를 권장합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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