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323화
70. 추방의 역사를 들으며(2)
‘테메스라니.’
아버지께서 반평생을 찾아 헤매던 그 이름.
레버쿠젠의 별장에서 아버지와 장을 보러 가면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영국에서 발견했잖아요. 유럽 본토로 넘어온 이유가 뭐예요?’
‘테메스의 역사는 지금의 영국에서 시작되었는데 켈트 문화권이었던 것 같아. 그렇게 번성하던 테메스도 로마가 영국을 정복하면서 명맥이 끊 긴 줄 알았지. 수백 년간의 공백이 있긴 하지만 16세기부터는 오스트 리아 빈 근처에서 마을 정도는 이뤘 던 것 같아.’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듯 했다.
이들이 나와 같이 18, 19세기의 독일어를 사용하는 것도 당시에 자주 식탁에 올라왔던 절인 양배추의 신 냄새가 나는 도.
당시의 켈틱 하프를 사용하는 것 마저 이들이 켈트 문화권에 속해 있던 테메스 부족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어떤 이유로 빈을 떠났을 테고 이곳에 정착했을 테지.
폐쇄적인 태도를 보아 그리 좋지 않은 이유였다는 정도로 추측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런 곳에 있을 줄이야……
남아시아.
그것도 사람의 발길이 닫지 않는 히말라야 산맥 부근에 있었으니 아버지와 수많은 사학자가 전 유 럽을 뒤져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놀라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촌장이 걱정스레 물었다.
“왜 그러시오?”
“ 아.”
대답을 하려다 한 번 더 생각했다.
촌장은 외부와의 접촉을 꺼려한다.
아마 이 마을 사람 모두가 같은 생각이겠지.
촌장이 앞을 볼 수 있었다면 들 이지 않았을 거라 했던 만큼 적당히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이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리라.
‘아는 척 해봐야 좋을 거 없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고.’
그러나 아버지의 꿈이 실존함을 알 게 된 것만큼은 기쁜 일이다.
“……통증이 사라졌어요.”
말을 돌렸다.
“몸과 정신은 하나라 죽음만이 떼 어놓을 수 있소. 훌륭한 음악으로 영혼이 감응하면 육체의 상처도 낫기 마련이오.”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다.’
그러나 욱신거리던 눈이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된 것과 동상에 걸린 피부가 안정되었기에 촌장의 말을 마냥 부정할 순 없었다.
그 순간.
‘ 설마.’
사카모토의 병이 나은 게 떠올랐다.
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오래 버티지 못한다던 사카모토는 의사마저 기적이라 할 정도로 순식간에 상태 가 호전되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그와의 녹음은 수십 년간 음악만을 위해 살았던 나와 사카모토조차 겪어보 지 못한 경험이었다.
온몸이 소리에 반응하여 그때까지 느낄 수 없었던 감각이 살아났던 묘한 기분.
‘기록에 의하면 테메스의 지도자는 영적인 능력이 강하다고 하는데 음악으로 환자를 치료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
아버지의 말까지 떠오르니 차마 입을 닫을 수 없었다.
“껄껄.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곧 나을 테니 동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촌장이 일어서려 해 황급히 손을 뻗었다.
“눈, 그걸로 제 눈도 고칠 수 있습니까?”
촌장이 내 손과 그의 손을 포개며 말했다.
“당신의 간절함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모든 일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 오. 애석하나 그만한 상처를 치료할 순 없소.”
‘아니.’
나는 내 눈으로 직접 죽기 직전의 사카모토가 나은 것을 확인했다.
테메스의 이 신비한 힘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는 몰라도 가려운 피부를 낫게 해주는 정도가 전부일 리 없다.
이들이 가능하다면.
그 수단이 음악이라면 나 배도빈이 못할 리 없다.
“……바이올린을 쓰게 해주세요.”
“얼마든지.”
툭.
무엇인가가 침상 옆에 놓였다.
“여기 두고 가겠소. 필요한 게 있으면 얀을 부르도록 하시오.”
“감사합니다.”
“테메스 신의 가호가 있기를.”
* * *
2주 정도 흐른 것 같다.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지만 대충 열 번에서 스무 번 정도 자고 일어났으니 그렇게 추측할 뿐이다.
이곳 사람들은 시간에 대한 개념 은 있지만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 리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분과 초는 말하지 않고 시간 정 도는 간혹 말하지만 대개는 ‘해가 떴다’, ‘해가 높이 떴다’, ‘해가 졌다’, ‘달이 떴다’ 정도로 말했다.
또 이들의 삶은 정말 순박해서.
식사는 농사와 채집, 사냥으로 해 결하며 그 외의 시간은 대부분 음악으로 보낸다.
음악과 함께하는 삶이라는 표현 이 적절한데 방 안에 있자면 갖은 악기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주로 현악기 소리가 많이 들리는 데 바이올린을 만드는 사람도 있다.
소리가 제법 좋다.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이다 보니 자연스레 연주자도 악기를 만드는 사람도 수준이 높은 것 같다.
그중에서도 처음 내게 하프 연주를 들려주었던 사람이 가장 특출 했는데.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인재다.
‘다시 듣고 싶은데.’
그 사람의 연주를 통해 동상이 나았으니 다시 한번 듣는다면 무엇인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지만 지금 이 순간도 가족과 동료들은 애가 마를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이들의 비밀을 통 해 눈을 치료하고 돌아가야 한다.
‘이게 아니면 아마 시력을 회복할 수 없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귀나 손이 망가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낫는 게 우선이야.’
그러나 그간 아무리 연주를 해도 눈이 나아질 기미는 없었다.
‘조건이 있는 건가?’
사카모토와 녹음했을 때의 그 기 분을 느낄 수는 없었다.
단순히 높은 수준의 연주를 해야 한다면 이미 많은 사람이 음악으로 병을 이겨냈을 테니 뭔가 다른 조건 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던 와중.
옆에서 수발을 들어주는 얀이라는 아이가 말을 걸었다.
“형은 어디서 왔어?”
“ 베를린.”
“거긴 형처럼 바이올린 잘 연주하는 사람 많아?”
“많지.”
현재 활동하는 사람만 해도 찰스 브라움과 스노우 한, 케르바 슈타 인, 다니엘 이반, 손가락 터뜨리기 전 나윤희 등 여러 사람이 있다.
“듣고 싶다.”
어린애의 솔직한 생각에 웃을 뿐이다.
“동상 치료할 때 하프 연주했던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스칼라?”
얀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스칼라는 신과 가장 친한 사람이야.”
“무슨 말이야?”
“스칼라가 연주하면 테메스 신이 좋아해. 동상이 나은 건 테메스 신 이 기뻐해서 주는 선물이야.”
어린애의 말이라, 아니, 종교적인 말이라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적어 도 테메스인들은 그런 식으로 생각 하는 듯하다.
“ 얀.”
그때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스칼라!”
“외부인에게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응. 나 갈게.”
우울해진 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얀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스칼라가 잔뜩 경계하며 엄포를 늘어놓았다.
“언젠가 돌아가고 싶다면 우리에 대해 알려고 하지마. 널 이대로 두는 것도 마을의 질서를 어기는 일이 니까.”
“그래.”
평화롭게 사는 이들의 삶을 망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단지.
“네 하프 연주를 듣고 싶은데.”
“이러고 있으면 답답하다고.”
“그때는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기 에 들려줬을 뿐이다. 네게 호의를 베풀 의무는 없어.”
“그런 것치곤 매일 오던데.”
“뭐, 뭐?”
“눈이 안 보이니까 귀가 엄청 예민 해 지더라. 발소리만 들어도 알아. 매일 와서 있다가 돌아가는 거.”
스칼라는 말이 없었다.
“맞춰 보자. 할 일도 없는데.”
“외부인과 그럴 수는……
“음악 하는 데 출신이 중요해?”
“……기다려라.”
망설이는 것 같더니 음악을 좋아 하는 것은 감출 수 없는지 순순히 밖으로 나간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나이 차이가 얼 마 안 날 것 같은데 어떨지 모르겠다.
벽에 기대어 주변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한다.
참으로 신기한 것이 이렇게 앞을 볼 수 없는데도 주변이 어떻게 생겼 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타닥타닥 튀는 장작 불과 공기의 흐름, 잎과 잎이 스치는 소리까지 굳이 소리가 아니더라도 여러 감 각이 예민해졌다.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느낌이다.
스칼라의 발소리가 들렸다.
“왜 그러고 있어?”
“……네가 먼저 해라.”
“맞춰보자니까.”
이 녀석의 연주를 들어야 하는데 고집을 피운다.
“내, 내 연주를 듣고 싶다면 네가 아는 곡을 가르쳐라. 그렇다면 어 울려주지.”
우리 찌질이 악장도 그렇고 삽살 개 같은 피아니스트도 그렇고 음악하는 인간들은 죄다 이렇게 솔직하지 못하다.
푸르트벵글러도 그렇고.
‘뭐가 좋을까.’
이 녀석을 구슬리려면 괜찮은 곡을 들려줘야 할 것 같은데 마침 적당한 곡이 떠올랐다.
현을 넘나드는 밝은 기운.
‘찰스 브라움’의 독주 파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의 우아한 음색을 한껏 살리기 위해 만든 곡으로 독주 파트는 찌 질이의 한계를 시험하고자 했던 만큼 손이 바쁘다.
비구름과 그 사이로 내려오는 햇 빛을 들려주자.
스칼라가 침을 삼켰다.
‘귀가 좋아지긴 하네.’
좋긴 하지만 앞이 안 보이니 답답하다.
“어때?”
“……이건 누가 만든 곡이지?”
“ 나.”
“거짓말하지 마라. 너 같은 어린 애가 만들 수 있는 곡이 아니야!”
‘이걸 확 들이박을 수도 없고.’
아마 키가 작아서 어린애라 하는 것 같은데 앞만 보였다면 당장에 엉덩이를 걷어차 주었을 거다.
“믿든 안 믿든 상관없어. 이 곡은 찰스 브라움이라는 바이올리니스 트를 내 악단에 들이려고 만들어 준 곡이야.”
“..악단?”
“그래.”
“여러 명이 함께 연주하는 것 말 이냐.”
반응이 조금 이상하다.
마을 전체가 음악에 미친 이곳 사람이 오케스트라를 모르다니.
‘혹시.’
빈에 머물던 당시 테메스와 지금 의 테메스는 다를 수밖에 없다.
외부와의 정보 교류가 없는 상태 에서 200년간 세대가 교체되었으니 개념적으로는 알고 있어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현악기만 있는 이곳에서 완편 오케스트라를 이룰 수도 없을 테니 말이다.
“자, 자세히 말해봐라.”
‘요거 봐라.’
잘 구슬리면 쉽게 넘어올 것 같다.
“네 연주가 먼저야. 아까 들려줬던 곡 맞춰보자.”
“한 번만 듣고 어떻게 바로 연주 하란 말이냐.”
“못 해?”
“너는 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 는군!”
녀석이 처음 연주했던 곡을 바이올린으로 들려주자.
한참 가만히 있던 녀석이 후다닥 뛰쳐나갔다.
“야, 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