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322화
70. 추방의 역사를 들으며(1)
정신을 차려보니 눈을 뜰 수 없었다. 깜짝 놀라 눈 주변을 만져보니 딱딱한 무엇인가가 만져졌다.
찢어진 상처를 인지하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든다.
‘빌어먹을.’
베를린으로 돌아가던 도중 비행기 에 갑작스러운 문제가 생겼다.
요동치던 비행기는 이내 몸이 뜰 정도로 급히 추락했고 조금씩 뜯어 지던 천장이 기괴한 형태로 찢겨나 갔다.
비행기 따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이번엔 시력인가.’
욕지거리가 튀어나왔지만 칼날 같은 바람과 온몸을 감싸고 있는 눈 그리고 얼어붙은 몸이 이대로는 위 험하다고 말했다.
“박 기장님! 정소민 씨!”
비행기에 함께 타고 있던 이들을 불렀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뿔뿔이 흩어졌거나.
아니면 모두 죽었거나.
까득.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더구나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혼자 움직이는 건 자살 행위다.
그러나 이대로 시간을 더 지체했다 간 정말 얼어 죽을 것만 같다.
이대로 죽을 소냐.
‘뭐라도 해야 해.’
몸을 더듬으니 안주머니에 들어 있는 핸드폰을 만질 수 있었다. 그 와 중에도 잃어버리지 않아 불행 중 다 행이다.
쉬이이이익—
살을 에는 바람.
옷을 여미며 핸드폰에 입을 가져갔다.
“와이즈, 여기가 어디야?”
답이 없다.
“와이즈, 할아버지께 전화 걸어.”
몇 번을 이야기해도 핸드폰은 반응 이 없었다.
“••••••시발.”
유일한 방법이 먹히지 않는다.
정말 이대로 죽는 건가.
어머니와 아버지, 도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대로.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생각해.’
뭐라도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핸드폰을 더듬으니 짧게 진동한다.
작동하고 있다는 뜻.
아예 망가지진 않은 모양이다.
음성을 인식하는 장치가 망가졌거나 아니면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오작동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절망적인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
버튼이 있다면 모를까.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터치만으로 누군가에게 연락을 해야 하다니.
다시 한번 욕이 나온다.
……손이 깨질 듯이 아프다.
‘기억해야 해.’
섣불리 건드렸다간 어떤 식으로 작 동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될 테니 신중해야 한다.
핸드폰의 모서리에 의지해 우측 최 하단 근처 버튼을 눌렀다.
제대로 되었다면 분명 통화 상태로 들어왔을 터.
감각과 기억에 의지해 위쪽 부근에 있을 통화기록을 누른다.
‘제발.’
제대로 눌렀는지 확인할 순 없다.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쓸데없는 곳에 연락해선 안 돼. 최근에 연락했던 사람이 누구지? ……나윤희였어.’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내가 타고 있던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소식이 알려져 있을 거다.
박대호 기장이라면 사건이 터질 때 이미 WH와 주변에 사실을 알렸을 테고 몇 시간은 흐른 듯하니 분명 그럴 거다.
‘괜찮을 거야.’
나윤희라면 믿을 수 있다.
동작은 느리지만 머리 회전이 빠르고 행동력도 있으니 분명 최악의 상 황은 피해줄 거다.
조심스레 화면을 눌렀다.
뚜르르르-
‘됐어.’
나윤희에게 가는 전화인지 다른 누 군가에게 가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전화가 가능하다는 것은 다 행이다.
남은 것은 내 목소리가 전달될지에 대한 문제.
음성 인식이 안 되었기에 최악의 사태만은 피했으면 한다.
-도빈아?
신호음이 채 두 번이 울리기 전에 나윤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다급한 목소리에 조금 안도했다.
예상대로 그녀는 최대한 침착했다. 평소 말할 때마다 더듬던 그녀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힘이 빠져나간다.
‘빌어먹을.’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은데 이렇게 죽을 순 없다.
주변 상황을 전달함에 따라 나윤희 의 숨이 가빠졌고 이내 어머니의 목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입조차 움직이기 버거워.
“사랑해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죽었나?”
“어디서 온 애야?”
“모르겠어.”
“몇 살일까?”
“어려 보이는데.”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정신을 차리자 멀리서 그리운 말들이 들려왔다.
17년 전, 아니, 근 200년 만에 들어보는 옛 독어에 혼란스러울 수밖 에 없었다.
“으악. 깼다.”
“꺄악!”
몸을 일으키자 아이들이 요란하게 소리치며 도망갔다.
‘ 대체•…”
티딕, 틱 하는 장작 타는 소리와 희미하게 맡을 수 있는 신 냄새.
자우어크라우트(양배추 절임)와 빵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내가 미친 것인가.
그때의 빈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에 오만 생각이 다 났다.
‘꿈인가?’
눈은…… 뜰 수 없다.
동상 때문인지 온몸이 가렵고 눈의 통증은 여전하다.
‘꿈도 아니라면 대체.’
순간 시간을 거슬러 왔다는 허무맹 랑한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태어난 경험을 비추어 불가능한 일도 아니 지 않느냐는 생각에 답답해졌다.
‘어디지.’
사람을 부르려던 차.
아이들의 목소리와 여러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낯선 노인의 목소리가 역시나 옛 독어로 말을 걸어왔다. 낮고 부드럽지만 경계하고 있다.
“정말 깨어났구나. 얀, 따듯한 물을 가져오너라. 동상 때문에 가려울 거다.”
“네!”
그렇게 말한 노인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알아 듣진 못하겠지만 놀라지 마시오. 이제 괜찮으니.”
내 손을 그가 포개었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진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스레 입을 열자 잠시 간격을 두고 노인이 답했다.
“이거 놀랍구려. 말이 통할 줄이야.”
노인의 목소리에서 정말 놀랐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쪽에서 묻고 싶은 이야기다.
“여기가 어디죠?”
“피상 근처라고만 알아주시오. 나흘 전 큰 소음이 들려 근처를 살핀 청년이 당신을 발견했고.”
나흘이나 흘렀다니.
피상이라는 지역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마 네팔의 어딘가일 것 이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노인의 말에서 꿈이거나 시간여행과 같은 건 아니 라는 거다.
살아만 있으면 반드시 돌아갈 수 있다.
“전화를 쓸 수 있을까요?”
“안타깝지만 그런 물건은 여기 없소.”
“촌장님, 여기.”
순간 뜨거운 습기를 느꼈다.
노인의 주름진 손이 내 팔목을 잡 고 조심스레 그릇으로 인도했다.
“뜨거우니 천천히.”
망설이다 목이 타는 듯해 혀끝을 대니 데이고 말았다.
찻잎을 넣은 듯, 허브 향을 맡을 수 있었고 조금씩이나마 마시자 몸 에 온기가 돌았다.
“감사합니다.”
빵 냄새가 훅 다가왔다.
지금으로서는 이들의 친절이 고마 울 뿐이다.
예를 갖추니 촌장이라 불린 노인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소.”
“무슨 뜻인지.”
“이제 막 일어난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다만, 당신이 앞을 볼 수 있었다면 마을로 들일 수 없었을 테니 까.”
무슨 말인가 싶은데 누군가 한 명 더 방으로 들어왔다.
“왔구나.”
누군지 모를 이와 인사를 나눈 촌 장이 내 팔을 잡았다.
“몸을 닦아낼 거요. 편히 있으시 오.”
“아뇨. 그렇게까지는.”
노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젖은 천으로 내 몸을 닦기 시작했다.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이 들만의 민간요법이라 생각하고 몸을 맡겼다.
‘그나저나 2023년에 전화조차 없는 폐쇄적 마을이라니.’
숨어 있기라도 하듯.
내가 앞을 볼 수 있었다면 들일 수 없다는 말에 의아하다.
방 안에 장작을 태우니 핸드폰을 충전할 전기조차 없는 것 같다.
‘전화가 있는 곳까지 데려가 줬으면 좋겠는데.’
촌장의 태도로 그조차 어려울 것 같지만 부탁은 해봐야 할 것이다.
이 상태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그때, 부드러운 하프 소리가 울렸다.
‘이건.’
넘실거리는 파도처럼 평화로운 음 률은 지금껏 내가 들었던 하프 연주를 모두 부정해 버렸다.
연주가 끝나고.
더 듣고 싶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켈틱 하픈가요?”1)
1)켈틱 하프(Celtic harp):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등 켈트 문 화권의 하프.
8세기에 발생, 19세기를 전후로 구 조상, 계통상 차이점을 보인다. 전통 켈틱 하프는 30〜36개의 금속 현을, 19세기 이후 켈틱 하프는 30개의 거트현을 사용하고 반음계를 조율할 수 있다.
배를 닦고 있던 손이 멈췄다.
“정말 놀랍구려. 맞소. 우리 마을 최고의 하프 연주자지.”
“멋진 연주였어요.”
잠시 간격을 두고 노인이 물었다.
“말해보시오. 어떻게 듣기만 해서 어떤 악기인지 알고 또 우리와 같은 말을 쓰는지.”
언어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소리가 다르니까요.”
노인의 질문에 금속 현과 거트현 (양의 소장을 정제한 가는 줄)의 차 이를 말해주었다.
노인은 감탄했지만 나야말로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18세기에나 쓰였던 전통식 켈틱 하프 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켈트족이 쓰던 하프는 다시 태어난 뒤에는 들어볼 기회가 없었다.
비록 살펴볼 수는 없지만 이곳은 정말 내가 살던 그때를 연상케 했다.
“젊어 보이는데도 지식이 대단하구려.”
“음악가니까요.”
“허어. 어떤 악기를 연주할 수 있소?”
촌장의 목소리가 다소 친근해졌다.
“피아노도 연주하고 바이올린도 좋아해요.”
“껄껄. 그럼 한번 들려주겠소?”
구조와 치료 그리고 멋진 연주까지 들려줬으니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고개를 끄덕이니 어린아이가 후다 닥 밖으로 나갔다.
“같은 말을 쓰고 음악을 좋아하다 니. 생김새는 달라도 고향 사람을 만난 듯하오.”
“……저도 그래요.”
정말 그렇다.
“후우.”
촌장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잠시 뒤 보폭이 좁은 발소리가 점 점 크게 들렸고 이내 촌장이 내게 바이올린을 쥐어주었다.
투박하나.
예전 그 느낌이다.
옛 느낌을 받았으니 무엇을 연주할 지는 자연스레 떠올랐다.
바흐 파르티타 제2번.
우수에 젖은 영혼과 고결한 정신을 정갈하게 갈무리하는 바흐의 바이올린 독주곡을 연주하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숨소리마저 내지 않았다.
지친 탓에 완주를 하지 못하고 바이올린을 내렸더니 촌장이 기쁘게 웃었다.
“음악이란 영혼을 노래하는 행위. 연주만 들어도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지. 그대의 영혼은 참으로 고결하 오.”
바이올린을 가져가기에 손에 힘을 풀었다.
“같은 생각이에요.”
영혼을 노래한다는 노인의 말에 참으로 공감한다.
곡을 짓는 행위는 작곡가의 자아실 현이며 연주는 연주자와 청자의 대 화.
노인의 말은 지극히 옳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이 닿으면 이렇게 멋진 일도 일어나지.”
노인이 내 팔을 쓸어내렸고.
어느새 사라진 통증과 가려움이 어 디로 향했는지 알 수 없어 의아한 와중에.
노인이 놀라운 말을 꺼냈다.
“테메스 신의 축복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