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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321화 (321/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21화

    69. 희망을 주고 간 그 사람⑵

    평범한 밤이었다.

    유진희는 둘째를 재우고 느긋하게 카레를 끓이고 있었다.

    전화로 괜찮다고는 했지만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않고 작업에 몰두했을 것이 뻔해, 오랜만에 솜씨를 발 휘하기로 했다.

    ‘하루 묵힌 걸 더 좋아하니까.’

    그녀는 큼지막하게 썰어 넣은 당근 과 감자가 푹 익을 때까지 냄비를 저으며 이틀 전 아들과의 통화를 떠 올렸다.

    사카모토 료이치의 병이 호전을 보였다는 소식을 전하던 첫째의 목소 리는 무척이나 밝았다.

    유진희는 그제야 애타던 가슴을 쓸 어내릴 수 있었다.

    ‘다행이야.’

    어렸을 적부터 교류했던 만큼 배도빈과 사카모토 료이치는 서로에게 각별했고 그랬던 만큼 유진희도 못내 마음이 쓰였다.

    그런 생각을 하곤 맛을 보니 제법 괜찮았다.

    불을 끄고 차를 챙겨 1층 거실로 나온 유진희는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TV를 틀었는 데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의아해하며 핸드폰을 확인한 유진 희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도빈이한테 연락 없었느냐!

    유장혁의 다급한 목소리에 유진희가 놀라 물었다.

    “아버지 보러 한국 들렸다 온다고 했죠.”

    순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유진희 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도빈이한테 무슨 일 있어요?”

    —오오…….

    유장혁의 탄식은 강철 같던 평소와 같지 못했다.

    유진희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무슨 일인데요? 네? 도빈이 지금 어딨어요?”

    불안한 마음에 아버지를 다그치던 유진희는 TV 화면에 떠오른 자막을 보고선 말을 잃었다.

    【네팔, “히말라야 산맥 근처서 비행 기 추락.”1

    •속보입니다. 2시간 전, 네팔 항공 국에서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임 지 휘자 배도빈 씨가 타고 있던 비행기 가 히말라야 산맥 부근에서 추락했다는 소식입니다.

    전환된 화면에서는 아나운서가 상 황을 보도했다.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

    전화기를 들고 있을 생각마저 못하 게 된 유진희는 힘없이 핸드폰을 떨 어뜨렸다.

    “여보, 피곤할 텐데 그만 자……. 여보?”

    안방에서 나온 배영준이 그 모습을 보았고.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 모습 에 아내에게 달려갔다.

    “왜 그래? 어?”

    넋이 나간 유진희는 남편을 보자 입을 열었다.

    그러나 무엇부터 말해야 좋을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 말문이 막힌 채 입만 움직일 뿐이었다.

    “아아. 아아아아악!”

    배영준은 오열하는 아내를 끌어안았다. 온몸을 비틀며 절규하는 유진 희에게서 평소 사려 깊고 차분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괜찮아. 괜찮아.”

    배영준은 그런 아내가 처음이었기 에 등을 쓸어내렸고.

    이내 TV 화면을 목격했다.

    순식간에 쏟아지는 여러 생각과 무 너지는 가슴 안에 울부짖는 아내.

    배영준은 순간 어지러워 그대로 주 저앉고 말았다.

    “아아아악. 아아아아!”

    그가 실낱같은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자신마저 무너졌다간 아내도 잃을 수 있겠다는 생각뿐.

    그의 눈에 유진희의 핸드폰이 들어 왔다.

    아버지라 적혀 있는 액정을 보고 배영준은 아내를 끌어안은 채 조심스레 핸드폰을 들었다.

    -진희야, 진희야!

    “……장인어른, 접니다.”

    잠시 간격을 두고.

    유장혁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도빈이 살아 있을 거다.

    너무도 간절한 목소리였다.

    -도빈이에게 준 핸드폰 지구 어디 에 있든 추적할 수 있어. 어지간하면 망가지지 않아. 괜찮을 거다.

    추측이 아닌, 단호한 말이었으나 유장혁의 말투는 바람에 가까웠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수 색대가 찾고 있으니 곧 소식이 올 거야.

    “저도 가겠습니다.”

    -……진희와 도진이를 부탁한다.

    “으어억! 아아아아악!”

    “ 여보.”

    눈이 뒤집힌 유진희는 비명을 질러 댔다.

    너무도 긴 밤이었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이냐!”

    유장혁 회장의 노성에 비서진이 움찔했다.

    손자를 만나면서 부드러워졌던 그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수많은 이들에게 주목을 받았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유장혁은 WH에 적대하는 세력이 든 정도를 지나친 팬이든 손자에게 해가 될 무리를 우려해 어린 배도빈 에게 자신과 같은 핸드폰을 선물하였다.

    그것만 지니고 있으면 어디에 있든 찾을 수 있도록.

    그러나.

    핸드폰 신호가 잡힐 때만 해도 희 망을 가졌거늘, 추락 후 6시간이 지 난 현재 신호가 끊기고 말았다.

    마지막 신호가 잡힌 곳으로 접근조 차 못한다고 하니.

    유장혁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었다.

    책상을 내려친 유장혁의 주먹이 부 들부들 떨렸다.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폭력에 대응할 사람은 유장혁과 오랫동안 함께한 비서실장 김재식뿐이었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다만 기상 상태가 좋지 않아 헬기를 띄울 수가 없어……

    유장혁 회장이 바닥에 재떨이를 내 던졌다.

    “헬기를 못 띄우면 뛰어서라도 올라 가! 아니, 믿을 놈 하나 없다. 내가 직접 가겠다.”

    “회장님!”

    “비켜!”

    “위험합니다! 네팔 당국과 국제구조대, 아이슬란드의 사설 구조대와 WH에서도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제발.”

    유장혁이 김재식의 멱살을 잡았다.

    “제발이라고 했나? 어! 제발이라고!”

    “회장님……

    “내 손주가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데 네가 감히 그 말을 꺼내! 도빈 이뿐이야? 그 비행기 안에는 내 직 원 스무 명이 같이 타고 있었어. 내 직원들이! 제발이란 말은!”

    노기를 띤 유장혁 회장의 눈이 눈물로 그렁댔다.

    “그 아이들이 무사하길 바랄 때 쓰는 거다.”

    비서실장을 밀쳐낸 유장혁 회장이 성큼성큼 걸어 나가자.

    김재식이 이를 빠득 물고는 비서실 직원들에게 임무를 하달했다.

    “현 시간부로 수배 가능한 모든 구조대를 확보한다.”

    “ 네.”

    “구조 활동 중 희생은 용납하지 않는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반드시 찾아. 시체라도 찾아내!”

    “ 예.”

    이른 새벽.

    눈을 뜬 최지훈은 굳은 채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흐려지는 시야 뒤에 배도빈의 얼굴 이 떠올랐다.

    몇 주 전만 해도 지금껏 보지 못 했던 밝고 환한 웃음으로 오케스트라 대전 우승 트로피를 들고 있었다.

    뚱한 표정.

    눈매를 좁히고 집중하던 얼굴.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

    무심한 듯 던지던 따뜻한 말들이 떠오르며 최지훈은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무엇에 홀린 듯.

    최지훈을 움직이고 있는 건 본능뿐 이었다.

    “도련님!”

    배도빈의 추락 소식을 접한 집사가 최지훈의 방에 들어섰을 때.

    최지훈은 짐을 챙겨 방을 나서려 했다.

    “어, 어딜 가십니까?”

    “도빈이한테요.”

    “아, 안 됩니다. 거기가 어디라고 가시려고요!”

    “이거 놔요!”

    “안 됩니다. 어억. 도련, 도련님!”

    집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복도로 나 선 최지훈은 아버지 최우철과 마주 보았다.

    “……다녀올게요.”

    “어딜 가려는 거냐.”

    최지훈은 시선을 회피하다 대답하 지 않고 최우철을 지나쳤다.

    최우철의 억센 손이 아들을 붙잡았다.

    “네가 간다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 알아요.”

    “그럼 어쩌자고 이러는 거야!”

    “가야 해요!”

    아들을 끌어낸 최우철은 당장에라 도 터질 듯한 슬픔을 보았다.

    “옷도 얇아서 추울 텐데.”

    치미는 슬픔을 억누르며 최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눈 속에서 혼자……. 무서울 거잖아요. 가야 해요.”

    소중한 이를 잃었던 두 남자는.

    다시는 같은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최지훈은 가야만 했고.

    최우철을 아들을 막아서야만 했다.

    “널 잃을 순 없다. 구조대가 수색 중이니 믿고 기다려.”

    “아버지!”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를 친형제처 럼 여기고 있음을 알기에.

    “갈 거예요. 놔주세요. ……제발.

    제발!”

    최우철은 어쩌지 못하고 발버둥치는 아들의 얼굴을 꽉 잡았다.

    슬픔이 가득한 절망의 눈동자는.

    그때의 자신을 보는 듯했다.

    “……하나만 약속하자.”

    최지훈은 당장에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사고 부근까지는 가자. 하지만 올라가는 건 안 돼. 절대로.”

    “끄으으윽.”

    “약속해!”

    “아아아아아악!”

    무너져버린 아들을 껴안고.

    최우철은 그저 함께 있어줄 수밖에 없었다.

    * * *

    “말도 안 돼.”

    진달래는 너무도 비현실적인 보도를 믿을 수 없었다.

    한 번 죽은 거나 다름없던 자신에 게 희망을 주었던 남자.

    그에게 닥친 일을 믿고 싶지 않았다.

    분명 뭔가 잘못된 거라고.

    누군가의 악질적인 장난이라 생각 하며 문을 박차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진달래는 쓰러져 하염없이 눈물을 쏟고 있는 차채은과 고개를 돌린 채 떨고 있는 왕소소, 초점을 잃은 채 넋이 나간 유진희를 끌어안고 있는 나윤희를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진짜라고

    인지한 순간 그녀는 더욱 부정했다.

    “아니잖아.”

    그러지 않으면 이성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잖아!”

    비명과도 같은 외침 끝은 눈물이었다.

    나윤희가 손을 뻗었다.

    어찌나 깨물었는지 그녀의 입술은 모두 터져 넝마가 되어 있었다.

    진달래는 상상하기도 싫은 상황에 서 그나마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나윤희의 손에 이끌렸다.

    “아니지……? 응? 아니지? 어?”

    나윤희는 말없이 진달래의 등을 쓸 어내렸다. 부정조차 할 수 없는 상냥함에 결국 진달래도 울고 말았다.

    얼마나 흘렀을까.

    나윤희가 진달래에 귓가에 대고 나 지막이 말했다.

    “……형부 잠깐 나가셨어. 구조대 쪽이랑 통화 해보신다고. 도빈이 소식 없는지.”

    혼이 나간 유진희가 배도빈의 이름 에 움찔 몸을 떨었다.

    나윤희가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며 말을 계속했다.

    “도진이 아직 자고 있을 거야. ……소식 접하지 않게 할 수 있지?”

    아이의 영민함은 형의 소식을 충분 히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또한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엔 너무 도 어렸다.

    나윤희의 말을 이해한 진달래가 눈 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인 순간.

    희미했던 유진희의 초점이 돌아왔다.

    “도진이.”

    “ 언니.”

    유진희가 반응을 보이자 나윤희가 그녀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시선을 마주했다.

    혼란스러워 하는 유진희가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명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언니. 도진이 아직 자고 있어.”

    “도진이……

    “도진이한테 언니뿐이잖아.”

    다 터진 입술에서 전해진 나윤희의 말과 아들을 향한 사랑이 유진희의 정신을 기적적으로 돌려놓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탈진한 몸은 말을 듣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나윤희의 부축을 받아 주 방으로 향한 유진희는 얼굴을 씻었다. 컵에 찬물을 가득 따라 마신 뒤 나윤희를 꽉 안았다.

    “고마워.”

    유진희가 비틀거리며 6층, 둘째의 방으로 향했고 나윤희는 그제야 다 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살아 있을 거야. 꼭. 살아 있을 거야.’

    그러나 차오르는 비탄이 주르륵 홀 러내리고 말았다.

    부엌에 홀로 남은 나윤희는 그제야 울기 시작했다.

    “도빈아……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은데.

    아직 갚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이 남았는데.

    그를 향한 목소리는 공허하게 흩어 지고 말았다.

    부우우웅- 부우우웅-

    그때.

    나윤희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을 확인한 그녀는 다급히 전화를 받았다.

    “도빈아?”

    잠깐의 간격을 두고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 누나.

    “지금 어디야? 몸은 괜찮아?”

    나윤희가 유진희에게 가기 위해 벌떡 일어났다.

    -……앞이 안 보여요. 언제까지 통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곁에 어머니 있어요?

    앞을 볼 수 없다니.

    가슴이 철렁였다.

    “응. 바로 갈게. 언니! 언니!”

    나윤희는 배도진의 방으로 향하면서 그 어떤 때보다도 냉정해졌다.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힘을 낼 수 있었다.

    “도빈아, 뭐든 괜찮아. 구조대가 움직이고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띠링- 띠링-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는지 알림 소리가 계속해 이어졌다.

    그럴수록 조급해졌지만 나윤희는 필사적으로 이성을 유지했다.

    _네.

    “주변에 어떤 소리가 나? 눈이 있어? 땅은?”

    유진희를 찾으면서 나윤희는 최대한 배도빈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 물었다.

    -추워요. 눈이 쌓여 있는 거 같아요. 바람 소리가 세서 다른 소리 는…… 앞이 비어 있는 것 같아요. 바람은 앞뒤로만 불고.

    유추할 수 있는 장소는 절벽이 있는 계곡.

    "음."

    아주 작은 단서라도 좋았다.

    3,000명의 구조대에게 전달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기에 나윤희는 배도빈의 말은 하나도 남김없이 반복했다.

    절대 잊지 않도록.

    “주변에 사람들은 없어? 열기를 찾더라도 가까이 가면 안 돼. 비행기가 언제 다시 폭발할지 모르니까. 섣불리 움직여서도 안 돼.”

    -다른 사람은 없는 거 같아요. ……그럴게요.

    나윤희는 6층에 도착하자마자 배도진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깜짝 놀란 배도진과 수척한 유진희는 숨을 헐떡대는 나윤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언니!”

    나윤희가 전화기를 넘겼다. 해야 하는 일을 마친 그녀는 쓰러져 흐느꼈고.

    그 모습을 본 유진희는 다급히 전 화기를 귀에 댔다.

    “도빈이니? 응?”

    -네, 어머니.

    신께 감사했다.

    차라리 자길 데려가 달라고 했던 마음을 애써 누르며 유진희가 입을 열었다.

    “많이 무섭지? 할아버지랑 아빠가 도빈이 꼭 찾을 거야. 주변에 뭐가 보여?”

    -……앞이 안 보여요.

    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다시금 심장 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러나 살아 있으면 된다고. 살아 있기만 해달라고 다시금 기도했다.

    띠링- 띠링-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알림 소리가 반복해 들릴 때마다 유진희 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도빈아, 괜찮을 거야. 살아 있기만 하면 돼. 엄마가 꼭 찾으러 갈게.”

    알림음이 몇 번 더 울리고.

    아들의 목소리 대신 세찬 바람 소 리가 귀를 괴롭혔지만 유진희는 울 수 없었다.

    조난을 당한 아들이 불안하지 않도 록 안심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내 아들. 내 아들. 흡. ……꼭 갈 게.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우리 아 들 씩씩하니까 조금만 힘내자?”

    -어머니.

    “응. 응.”

    - 사랑해요.

    뚜_ 뚜_ 뚜_ 뚜_

    “도빈아, 도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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