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320화
69. 희망을 주고 간 그 사람⑴
“히 야아.”
배도진은 베를린의 자택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어머니 유진희에게 갖은 애교를 다 해 애완 거북이를 키우기로 했는데, 녀석이 돌 위에 올라 목을 쭉 내밀 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 며칠째 영혼
을 빼앗기고 있었다.
밥을 너무 많이 주면 안 된다고 주의를 받았지만 뻐끔대며 먹는 모 습이 신기하고 기특해 배도진은 사 료를 집어 어항에 넣었다.
그러나 일광욕을 즐기는 거북이의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왜 안 먹어?”
그렇게 한동안 거북이를 관찰하던 배도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형아 보고 싶다.”
벌써 2달 가까이 보지 못했던 터 라 어린 배도진은 그리움을 달랠 수 없었다.
“이름 같이 짓고 싶은데. 너도 빨 리 이름 갖고 싶지?”
배도진의 질문에 거북이는 늘어지 게 입을 벌릴 뿐이었다.
그때 최지훈이 다가왔다.
“잘 놀아주고 있네?”
“배가 안 고픈가 봐. 안 먹어.”
배도진은 입을 내민 채 거북이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최지훈이 안타깝게 미소 지었다.
형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도진 이가 얼마나 쓸쓸해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최지훈은 배도진의 머
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도빈이 금방 올 거야.”
“정말?”
“응. 저번에 마지막 녹음 한다고 했거든.”
최지훈의 말에 밝아졌던 배도진의 얼굴이 금세 슬퍼졌다.
“그치만 사카모토 할아버지 아프잖아.”
“형 많이 슬퍼했어. 엄마가 사카모토 할아버지랑 같이 있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그 생각이 기특해 최지훈이 배도진
을 안아주었다.
“나도 형 보고 싶은데……. 미국 가면 안 돼?”
남은 한시도 놓칠 수 없었기에 배도빈은 사카모토 료이치와 함께 병 실 생활을 하고 있었고.
음악 작업 외의 일은 연락조차 최 소한으로 하였다.
그런 태도만으로도 배도빈의 절박 함을 알 수 있어 최지훈은 어린 동 생을 달랬다.
“형 많이 바쁘대. 착하게 기다리고 있자. 일 끝나면 꼭 바로 돌아올 거 니까.”
“정말?”
“그럼. 도진이 보고 싶어서라도 달 려올 거야. 그때는 도진이가 형 많이 위로해 주자.”
“응.”
* 3k *
녹음은 단 한 시간뿐이었지만.
혼신을 쏟았던 두 사람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지금껏 반복해 부정해 왔지만 이번 연주가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고 있
었기에 두 음악가는 모든 것을 쏟아 냈다.
리허설 따위 할 수 있을 리 없었기에 ‘Honor’를 연주하는 이미지를 반복해 떠올렸고.
응집된 그 마음이 단 한 번의 연주로 분출된 것이었다.
그것은 지난 수십 년간 음악을 해 왔던 배도빈과 사카모토 료이치도 겪어보지 못했던 경험이었다.
가슴에서 시작된 감정이 손끝을 통 해 악기로 전달되고 켜고 때리는 행 위로 현을 경유해 파장을 일으켰다.
서로의 영혼을 마주한 듯.
온몸의 세포가 그에 반응해 다음 연주를 이어나가는 행위는 마치 두 사람의 정신이 맞닿은 듯한 착각을 주었다.
단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는 그 애 틋한 감정을 음계로는 모두 이해할 수 있었기에.
연주를 마친 두 사람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멋진 연주였네.”
사카모토 료이치가 힘겹게 일어나 려 했다. 손을 헛디뎌 넘어지려는 것을 배도빈이 다급히 막아서 부축 했다.
“쿨럭. ……고맙네. 생전 이런 경험 은 처음이야.”
“저도 그래요.”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다가와 배도빈을 대신해 사카모토를 부축했다.
그는 숨을 가쁘게 내쉬면서도 의료 진의 손을 사양했다. 대신 힘겹게 팔을 뻗어 배도빈을 끌어안았다.
배도빈이 손을 움찔했다.
“고맙네.”
너무도 작은 그 목소리에 배도빈이 팔을 천천히 들었다. 조심스럽게 떨
리는 그의 팔이 사카모토를 안았다.
너무도 쇄약해진 몸이었다.
사카모토의 몸은 당장에라도 부러 질 것처럼 앙상해 배도빈은 차마 마 음껏 그를 안을 수 없었다.
“사카모토……
“ 나는.”
어린 벗에게 기댄 채.
위대한 음악가가 읊조렸다.
“행복하네. 자네를 만난 것이 내 생에 가장 큰 희망이었네.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늙은이의 미래가 열리지 않았나.”
배도빈은 조금씩.
사카모토 료이치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이 가볍지만.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마음으로 받아내기엔 너무도 무거웠다.
“……이제 돌아가게. 자네를 기다 리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사카모토는 이제 거의 배도빈에게 기대어 의지하고 있었다.
배도빈은 안간힘을 다해 사카모토를 지탱했다.
“사카모토.”
벗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축축이 젖어 있었다.
간절했다.
“약속하게. 오늘이 지나면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배도빈이 있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무너져 내리는 친구와 함께하고 싶었다.
사카모토가 간신히 붙잡고 있던 깍 지를 풀어 배도빈과 얼굴을 마주했다.
“자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 니야.”
“안 돼……
애써 부정하는 어린 벗을 보며 사카모토가 빙그레 웃었다.
“고집하곤.”
“병원. 병원으로 가요. 빨리.”
배도빈은 잔뜩 상기된 사카모토의 얼굴과 뜨거운 체온을 느끼며 다급 히 말했다.
그러나 사카모토 료이치는 대답하 지 않고 슬며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와 함께 배도빈의 어깨를 잡고 있던 그의 손이 스르륵 떨어졌다.
“……앉고 싶군.”
배도빈의 도움을 받아 비틀대며 걸 어간 사카모토 료이치는 의자에 앉았다.
눈을 감았다.
희미하게 빛을 느끼는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이 함께 작업했던 첫 번째 곡을 회상하며 지난날을 추억했다.
“이별은 여기서 하세.”
“그런 말 하지 마요.”
“……자네가 보내주었던 샘플이 떠 오르는군. 우리가 함께했던 첫 곡이었지.”
“옛날이야긴 언제든지 들어줄 테니까 돌아가요.”
사카모토는 힘없이 웃었다.
몸에 심상치 않은 증상이 일고 있었기에 그 뒤는 없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듣고 싶네.”
배도빈은 차마.
열이 나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올 곧게 앉아 있는 사카모토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정말.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에 슬픔을 삼키며 피아노 앞에 앉아, 다시 태어난 뒤 처음으로 만들었던 교향곡.
사카모토 료이치와 함께 작업했던 첫 번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die meiste Hoffnung.
가장 큰 희망.
즉흥 연주였지만.
원곡과 달리 피아노로 편곡된 연주였지만 그 때문에 사카모토는 당시 의 추억을 더욱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곡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이렇게 피아노로 연주했기에 나카무라를 통해 전달받았던 배도빈의 샘플 연주가
겹치는 듯했다.
건반을 누를 때마다 떨어지는 눈물.
배도빈은 피아노에 집중하지 못하 고 자꾸만 고개를 돌렸다.
사카모토는 자세를 조금도 흩트리 지 않고 웃는 듯 묘하게 입가를 올 린 채 있었다.
그러다 조용히 어깨를 기댔고.
마침내 고개를 숙였다.
“사카모토!”
외출을 나갔던 사카모토 료이치가 앰뷸런스에 실려 돌아오자 UCLA 메디컬 센터는 발칵 뒤집혔다.
“사카모토!”
“체온”
“lOfXF 입니다.”
“사카모토!”
“진정하세요!”
의료진이 사카모토를 붙잡고 놓지 않는 배도빈을 떼어냈고 치료실로 들어갔다.
방금까지의 소란이 거짓이라도 되는 듯 고요한 복도.
홀로 남은 배도빈은 무릎 꿇고 바닥을 내려쳤다.
“끄으으으으윽”
웅그린 채 눈물을 쏟아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저주했다.
제발.
신이 있다면 단 한 번만이라도 기적을 일으켜 달라고.
청력을 잃은 뒤로는 그에 대한 모든 것을 부정했던 배도빈은 어렸을 적의 신실했던 마음으로 돌아가 간 절히 기도했다.
“끄으읍. 사카모토오오.”
잠시 뒤.
다급히 응급센터에 들어선 사카모토 료이치의 아내 미야코는 아들에 게 안긴 채 실신했고.
뒤늦게 온 크리스틴 노먼은 넋 나간 채 주저앉아 있는 배도빈 곁으로 향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그러다 네 몸도 상하겠어.’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사카모토 료이치가 배도빈에게 어떤 존재였는 지 알았기에 노먼은 차마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었다.
그저 함께 슬퍼하며.
해가 지고 다시 떠오를 때까지 자리를 지켜줄 뿐이었다.
꼬박 16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치료실에서 의료진이 나왔다.
사카모토 료이치의 가족들이 의사에게 달려들어 매달렸다.
“선생님, 그이는요? 네?”
“아버지는. 아버지는 괜찮으신 거죠? 예?”
배도빈은 한껏 지친 의사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다. 그가 무슨 말을 꺼낼지 두려워 귀를 막고 싶은 심정 이었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간신히 멎었던 눈물이 다시금 차올랐다.
마음을 나누었던.
서로를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했던 벗의 죽음을 들을 수 없었다.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검사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무척 안정적입니다.”
“•…”네?”
“편히 주무시고 계십니다.”
기쁨과 놀람으로 오열하기 시작한 사카모토의 가족들 뒤에서 배도빈이 눈물을 닦았다.
“들었니? 어?”
배도빈은 기뻐하는 크리스틴 노먼 의 얼굴을 본 뒤에야 기뻐할 수 있었다.
“껄껄껄!”
이틀 뒤.
몰라보게 혈색이 좋아진 사카모토 료이치는 일반 병실로 자리를 옮겨 호탕하게 웃었다.
배도빈은 너무나 의심스러운 나머지 사카모토의 얼굴을 쥐고 주물렀다가 폈다가 하면서 정말 괜찮은 건 지 확인했다.
그러나 정말 기운을 차린 듯해 다행이면서도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려 담당의에게 설명을 요구하자 그가 난감하다는 듯 입을 쌜 쭉댔다.
“믿을 수 없으시겠지만…… 백혈구 수치가 정상화되고 있습니다. 자연 치유라고밖에.”
“그게 가능한 거예요?”
“사례가 없진 않습니다만 노인에게 선 거의 없죠. 제 경력을 걸고 말씀 드리지만 정말 기적입니다.”
“껄껄. 참 운도 좋네. 혹시 모르지. 도빈 군의 연주가 기적을 일으켰을 지도.”
“……헛소리하는 거 보니 진짜 나은 거 같은데.”
의사의 말을 듣고도 마음을 놓지 못한 배도빈이 사카모토의 팔과 다 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얼마나 놀랐으면 그랬을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카모토가 입을 뗐다.
“그간 무리해서 그런지 편히 쉬고 싶구만.”
“아, 그래요.”
배도빈이 사카모토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당분간은 가족들하고만 지내야겠어. 얼마나 원망을 샀는지 몰라. 잠 도 푹 자야겠고.”
사카모토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기에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있던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말에는 배도빈도 그래야 한다는 뜻 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케스트라 대전 이후 7주간.
여러 방면에서 개혁 중인 베를린 필하모닉을 더 이상 비워둘 순 없었다.
“정말 괜찮은 거죠?”
“ 암.”
배도빈이 의사에게 시선을 주어 대답을 촉구하니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만 같이 있어요.”
오후의 햇살이 이리도 귀중했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꼼짝없이 죽을 줄로만 알았거늘 내 게도 기적이란 게 찾아오다니.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냄새가 나고 만질 수 있는 사소한 감각들이 이렇게나 달리 느껴질 수 있음에 놀랄 뿐이다.
도빈 군과의 녹음은 실로 진귀한 경험이었다.
온몸이 반응하는 듯한 감각은 그 어떤 때보다 집중하게 해주었고 녹 음된 것을 들어봐도 진정 내 연주가 맞는지 의심되었다.
도빈 군도 나도 그런 연주는 다시 하기 힘들 거라 생각했다.
‘잘 돌아가고 있으려나.’
한국에 들려 유장혁 회장을 보고 돌아간다 했으니 지금쯤 아직 한국 에 있을지도 모른다.
‘ 한가하군.’
이렇게 편히 지낸 것이 또 얼마만 인지.
오랜만이라 잊고 있었거늘 휴가란 참으로 좋은 것이다.
빌헬름 그 친구가 실각당하고 그렇게 분한 와중에도 하와이에서 잘 지 냈던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완치 판정을 받아 내일이면 이 한가한 생활도 끝.
참으로 뜻밖에 얻은 새 삶이나 마 찬가지니 가족을 더 사랑하고 음악 에 더 진중해야지.
‘오늘까지는 쉬고.’
리모컨을 들어 TV 채널을 돌리는 와중 딱히 볼 만한 것이 없어 뉴스 채널에 두었다.
-WH전자가 핵융합 기술의 진보를 이뤘다는 소식입니다.
TV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 고 있었지만 사카모토 료이치의 관 심을 끌지는 못했다.
조금씩 찾아오는 졸음을 거부하지 않고 그가 잠시 눈을 감은 사이.
아나운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속보입니다. 2시간 전, 인천에서 독일로 향하던 음악가 배도빈 씨의 개인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소식입니다. 추락 예상 지점을 중심으로 초 국가적 수색, 구출 작전이 세워졌으나 기상 악화로 인해 구조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