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319화 (319/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319화

69. 잊을 수 없는(3)

도빈 군과 작업을 시작한 지 3주째. 거울 앞에 낯선 노인이 추레한 모

습으로 서 있다.

이제 빌헬름을 머리가 없다고 놀릴

수 없을 듯하다.

예상은 했지만 조금이라도 삶을 이

어나가기 위한 치료는 꽤 버거웠다.

늙은 육체는 면역력을 유지하는 것 조차 힘들어하여 자꾸만 속을 게우 는데, 이제 악기를 연주하는 것마저 힘에 부쳐 한스럽기만 하다.

‘원망하고 있겠지.’

아내와 자식들은 마지막에 이르러 서도 고집스러운 날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알면서도 원망하고 있을 테지.

그러나 이렇게밖에 살 수 없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산처럼 쌓여 있거늘.’

즐거운 음악을 하기 위해.

슬픈 이를 위로해 주고 기쁨을 더 하는 음악을 하면서 즐거웠던 나를 위했던 지난 세월.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 만 삶은 턱없이 짧다.

그래도.

이 곡만큼은 완성할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다.

“도빈 군.”

희망을 보여주었던, 새 시대를 연 벗이 고개를 돌렸다.

이것은 그를 위한 곡이다.

“악보를 보냈네. 직접 듣고 싶은데, 들려주겠나?”

“그럼요.”

도빈 군이 메일을 열어 악보를 다 운받았다. 그것을 살피는 벗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진다.

“바로 해볼게요.”

“부탁함세.”

병실에 놓인 한 대의 피아노.

그 앞에 앉은 도빈 군은 숨을 고른 뒤 악보 대신 태블릿을 올려두고 연주를 시작했다.

겹화음이 영광의 결승전을 뚫는다.

속도를 줄이며 운전석에서 일어난 레이서 뒤로 꽃잎이 흩날리고 관객 들은 열광한다.

‘과연.’

역시 도빈 군의 피아노는 훌륭하다.

음과 음을 표현하는 데 있어 그보 다 훌륭한 피아니스트는 없었다.

깊이 있게, 가볍게, 끊어내고 이어 나가는 그 미묘한 힘 조절이 불규칙 적으로 반복되어.

정말 여러 이미지가 함축되어 있다.

중간중간 악보를 공유하긴 했지만

처음 연주함에도 이렇게나 훌륭히 연주할 수 있다니.

감탄하고 있자니 벌써 곡이 끝나고 말았다.

“대단해요, 사카모토.”

“껄껄. 그 말은 내가 하고 싶네.”

“이거라면 분명 관객들도 좋아할 거예요. 병원에선 언제 외출할 수 있대요? 노먼한테 녹음 일정 잡으라 고 할게요.”

평소에는 그리 무뚝뚝하건만.

아이처럼 좋아하는 도빈 군을 보며 말했다.

“그 곡은 도빈 군이 연주해 주게.”

“……안 돼요. 사카모토가 아니면 누가 연주하라는 거예요.”

“알지 않나. 이제 그럴 수 없다는 걸.”

나도 도빈 군도 이제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 것이리라.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할 뿐, 이런 상태로 외출해 녹음을 진 행할 순 없다.

연주는 더더욱.

도빈 군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책 상 앞에 앉았다.

주인공의 테마를 만들고 있는데 어 떤 결과를 들려줄지.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도빈 군의 깃펜이 잠시 멈추었다.

“제대로 연습해서 연주할게요. 그 때까지 치료 잘 받아야 해요. 지금 만드는 곡도 반드시 들려줄 테니 까.”

“여부가 있겠는가.”

***

다시 2주가 흘렀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데 담당의가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백혈구 수치가 안정화되었습니다. 잠시 외출은 가능하십니다만 무리는 금물입니다.”

“허허. 이제 항암제는 안 맞아도 되는 것이오?”

주사를 맞을 때마다 구토를 해대 더는 못 버틸 것 같다.

“느끼시는 대로 몸에 부담을 많이 생깁니다. 체력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잠시 중단하는 거니 식사는 꼭 하셔야 합니다.”

“이런. 치료를 받기 위한 휴식이라니. 끔찍하구려.”

“……이겨내셔야 합니다.”

이겨낸다라.

그 끝을 알기에 이긴다는 말이 너 무도 멀게 느껴졌다.

“그럼.”

의사가 나가고 나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유키의 말에 따르면 치료 기간 중 호전을 보이기도, 악화가 되기도 한 단다.

그러나 결국 이식을 받지 못하면 무의미한 일임을 알기에 그나마 정

신이 또렷한 지금을 활용하는 게 우 선이다.

“사카모토!”

“오오.”

때마침 도빈 군이 병실로 들어섰다.

이제는 소독하고 환복하는 일이 익 숙해져 금방 처리하는 듯하다.

어제와 달리 힘차 보여 다행이다.

“오늘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로군.”

“뭐래요?”

“당분간은 치료를 중단하기로 했네. 어쩌면 외출도 가능하겠지.”

“무리하면 안 돼요.”

“껄껄. 그러겠네.”

도빈 군이 자리에 앉았다.

“메일 확인해 봐요. 반쯤 만들었는 데 괜찮게 나올 거 같아요.”

“그거 반가운 소식이구만. 오늘은 좋은 일만 생기는군.”

도빈 군이 보낸 메일을 열었다.

“바이올린 소나타로군.”

살펴볼수록 듣고 싶어진다.

도빈 군의 악보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대체 이 안에서 어떤 힘 이 작용하기에 사람을 이렇게 몰입

시키는 건지 알 수 없다.

“이거 정말 들어야만겠어.”

“캐논이 오고 있어요. 녹음실도 소 독 중이고. 제대로 들려줄게요.”

“하하. 오늘 저녁은 꼭 다 먹어야겠네.”

“피아노는 꼭 사카모토가 맡아야 해요.”

“으음. 어쩔지.”

마음만은 이미 함께하고 있다만.

가능할지 알 수 없다.

“가우왕 군은 어떤가. 지훈 군도 좋겠군.”

도빈 군이 고개를 저었다.

저 간절한 눈이 곧 울 것처럼 일 렁거렸다.

지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소망을 담아 입을 열었다.

“꼭 나아지겠네.”

활짝 연 문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들려준 도빈 군이 어떤 모험을 할지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그러고 싶다고.

진실로 그리 생각했다.

사카모토의 상태가 또다시 안 좋아 졌다.

어제 오후만 해도 외출이 가능할 거라고 들었는데 오늘 아침 면회조 차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죄송합니다. 오늘 면회는 어렵습니다.”

“무슨 일 생겼어요? 사카모토는요.”

“오늘 아침부터 상태가 안 좋아지 셔서 집중 치료실에 들어가 계세요.

돌아오시 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간호사의 말에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조금이라도 빨리 만들었다면 사카모토에게 들려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후회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돌아와 악보를 펼쳤다.

펜을 들었지만 자꾸만 여윈 사카모토의 얼굴이 떠올라 목이 멨다.

‘사카모토.’

그는 다시 태어난 내게 처음으로

이 시대를 보여준 사람이었다.

어머니께서 모으신 클래식 음반으로 감탄하고 있던 어렸을 때는 슈베 르트, 슈만, 브람스, 드뷔시, 멘델스 존, 차이코프스키, 드보르자크, 라흐 마니노프와 같은 후대 음악가들이 펼친 꿈같은 음악에 취해 있었는데.

사카모토의 음악은 도약이었다.

지금은 낭만파로 분류되고 있는 이 들의 음악은 이해할 수 있었던 데 반해.

사카모토가 들려준 그 충격적인 음악들은 내게 새로운 세계였고 희망 이었다.

그 기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리라.

그때까지 아무도 명확히 말하지 못 했던 내 음악을 깊이 이해한 그는 매번 새로운 소리를 들려주었고.

나는 그것을 반복해 들었으며 매달 리다시피 그에게 또 다른 음악을 요 구했다.

내 호기심을 욕구를 채워줄 수 있었던 건 그뿐이었다.

그가 열어준 세상.

‘다행이군. 내가 자네에게 음악적으로 가르쳐 줄 것은 없지만, 자네 의 음악이 필요한 곳을 알려줄 순

있을 것 같네.’

그는 그곳에 내가 필요하다고 했다.

180년이란 시간을 넘어선 나 루트 비히를, 아니, 막 3살에 지나지 않았던 나를 받아들여준 첫 번째 사람.

나는 그가 인도한 길에 들어선 기 억을 잊을 수 없다.

결코.

잊을 수 없다.

이 곡, 사카모토와 함께 연주하기 위해 만든 바이올린 소나타 ‘Hono 소는 그에 대한 경의를 담았다.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사카모토 료이치를 위해.

그의 행복을 바라며.

다시금 펜을 움직였다.

고비를 맞았던 사카모토 료이치는 3일 차에 무균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의료진은 믿을 수 없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노인이라고는 상 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사카모토 료이치는 정열을 불태우고 있었다.

마치 꺼지기 직전의 불꽃처럼.

눈에 핏발이 선 채 곡 작업하는 사카모토 료이치를 차마 말릴 수 없었다.

“401호 환자분 안타까워서 어쩌지.”

“그러니까. 조금 쉬면서 하셨으면 좋겠는데.”

“안 들으셔. 다시 쓰러지면 못 일 어날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

“매일 오는 애도 많이 지쳐 보이더

라.”

“배도빈?”

“어. 저번에 보니까 병실에서 뛰쳐 나왔는데 복도에 피가 떨어져 있더 라고. 코피를 쏟은 거 같은데 사카모토 씨한테 안 좋을까 봐 그랬던 모양이야. 빨리 소독하라는데 그 모 습이 정말……

“하아.”

“뭐랄까…… 그간 필사적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썼구나 싶었어.”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다. 외출 오 늘이지?”

“어. 아침에 나가셨어.”

“별일 없어야 할 텐데.”

간호사 중 한 명이 환자기록부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류이치 사카모토가 오전 1시간 외 출한다는 기록이 적혀 있었다.

고**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소독한 녹음 실에는 배도빈과 사카모토 그리고 만약을 대비한 최소한의 인원만이 남아 있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배도빈은 분

주하게 움직였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피아노 앞에 힘겹게 앉아 있는 사카모토를 불렀다.

“시작할게요.”

“잠시 기다려주게.”

사카모토는 눈을 감고 수그린 채 숨을 골랐다.

‘마지막 기회야.’

반복된 항암 치료로 육신에는 이미 남은 힘이 없었기에 그에게 남은 것 은 정신뿐이었다.

고결하고 순수한 바람.

위대한 정신이 그의 몸을 붙들었다.

“되었네.”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하고.

사카모토 료이치가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지난 며칠 밤을 머릿속으로만 연주 했던 배도빈의 ‘Honor’가 시작되었다.

관객은 단 둘.

‘세계의 사카모토’라 불렸던 위대 한 음악가의 마지막 연주회였다.

위대한 정신이 붙든 연약한 육체는 곧 아름답게 노래했다.

여섯 개의 건반이 천사의 날개처럼 날아올랐다.

사카모토의 오른손이 멀리 뻗어 천 상으로부터 내려오는 빛처럼 주제를 확장시켰고.

목자에게 닿았다.

배도빈의 캐논은 평소 그 비범한 음량 대신 정제된 억눌린 채 아름다 운 소리를 내었다.

‘누구신가요?’

피아노가 들려주는 성스러운 빛 앞 에 두려워하는 목자.

천사들이 그를 위로한다.

‘두려워 말라.’

황금색 빛 아래 내려온 천사는 여섯 장의 날개를 접어 목자를 일으킨다.

‘어째서 고개를 들었느냐.’

배도빈이 손을 떤다.

섬세한 비브라토가 목자를 대신한다.

‘저는 그저 해를 보고 싶었을 뿐이 에요.’

‘그것은 욕심. 네 눈을 멀게 뿐이다.’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걸요.’

‘저 위에 계신 분께서는 네가 고통 받길 바라지 않으신다.’

조심스러운 바이올린과 자애로운 피아노가 대화를 나누듯.

풍부한 색채감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안전을 위해 녹음실에 남았던 두 사람은 입을 닫을 수 없었다.

그때.

피아노의 선율이 바뀌었다.

‘그렇다면 올라오라.’

목자의 순수함에 감동하고 그로 인 해 시력을 잃을 것을 걱정한 빛이 그에게 닿았다.

그 순간.

억눌린 채 떨던 캐논이 제 목소리

를 내었다.

환희.

높이 솟은 목자는 천사의 안내를 받으며 산 위로, 구름 위로 올랐다.

티끌 하나 없는 그 기쁨에.

배도빈의 캐논은 한껏 신을 냈다.

그러나.

‘너무 높아요.’

아래를 본 순간, 지금껏 자신이 살았던 세계와 떨어지자 목자의 가슴 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두려워 말라.’

피아노가 고음역대로 치솟은 바이올린을 받쳐주며 곡에 안정감을 더 했다.

‘저 위에 계신 분께서 너를 보고 싶어 하신다.’

천사의 등에 올라탄 목자는 그 보 드라운 날개에 취했고.

마침내 태양에 도달했을 때.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한목소리로 연주되었다.

‘ 오오.’

그 찬란함에.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 완

벽한 하모니에 음악가 사카모토 료이치의 몸이 반응했다.

전신의 세포가 꿈틀거리듯.

저곳을 향해.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다고 외치는 듯했다.

사카모토 료이치의 힘찬 피아노에.

배도빈은 애써 눈물을 참으며 현을 그었다. 더욱 더 밝고 더욱 높은 저 너머로 음을 쏘아 보냈다.

‘ 아아.’

그것이 절정에 도달한 순간.

두 음악가는 직감했다.

이것이 그들이 바라던 형태의 음악 이었다고.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며.

마지막 음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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