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317화 (317/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317화

69. 잊을 수 없는(1)

공항에 도착하자 사카모토의 비서 이자 어렸을 적 통역을 해주었던 오구라 유키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라면 반갑게 인사를 나눴겠지만 조금도 웃을 수 없었다.

“바로 만날 수 있어요?”

“괜찮겠니? 피곤할 텐데.”

“상관없어요.”

그녀가 운전하는 차에 타 UCLA 메디컬 센터로 향했다.

반나절을 날아왔건만.

LA 국제공항에서 병원으로 가는 90분 남짓한 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조급한 탓일까.

몇 번이나 사카모토의 상태를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슬픔이 묻어나오는 오구라 유키의 옆모습만으로도 겁에 질려 괜찮을

거라고, 문제없을 거라고 자위할 뿐 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카모토가 입원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여기야.”

본관을 지나쳐 별관 엘리베이터에 서 내리니 이내 사카모토 료이치의 이름이 적혀 있는 병실을 찾을 수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간신히 달랜 가슴이 병실 앞에 서자 터질 듯이 뛰었다.

그녀가 손잡이를 잡았다.

“잠깐.”

터질 듯한 가슴을 애써 부여잡고는 고개를 끄덕이니 오구라 유키가 문을 열었다.

예상했던 병실과는 전혀 달랐다.

사카모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거 해야 해.”

오구라 유키가 앞서서 강한 바람으로 몸을 닦아냈고 의사나 간호사들 이나 입을 법한 흰색 옷을 덧입었다.

그런 뒤에도 다시 한번 소독을 하고 나서야 나는 두꺼운 비닐 너머에 서 웃고 있는 사카모토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습기를 흘리고 있는 가습기와 순백의 벽, 같은 색의 침대가 있는 방에 갇혀 있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과 그를 가두고 있는 이 얇은 막이 대조되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실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허허. 히무라 군이 약속을 안 지 킨 모양이야. 쿨럭.”

“울지 말게.”

흐린 시야 너머로 사카모토의 얼굴이 자꾸만 일렁인다.

“사카모토……

“여기 있네.”

“사카모토.”

“음음. 괜찮네. 괜찮아.”

서 있을 수 없었다.

“이제 베를린 필하모닉의 주인이지 않은가. 그렇게 앉아 있으면 안 되네.”

고개를 들자 그가 여느 때와 같이 부드럽게 웃었다.

“와줘서 고맙네.”

반나절을 달려왔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난 그저 사카모토 의 마음을 더 무겁게 했을 뿐이었다.

면회 후 복도 벤치에 앉아 있는데 오구라 유키가 다가왔다.

“……무슨 병이래요?”

“감기야.”

과거 유럽에서는 사람이 정말 쉽게 죽었다. 사소한 찰과상만 당해도 며칠을 앓다가 허망하게 가는 이가 너무도 많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오구라 유키가 말을 이었다.

“면역력이 너무 나빠지셔서 몸이 이겨낼 수 없으신가 봐. 연세를 감 안하더라도 백혈구 수치가 너무 낮대. ……그렇게 건강하셨는데.”

“방법은 없는 거예요?”

“기증자를 찾는 중이지만 우선 몸을 회복하시는 게 우선이라 상황이 잘 맞아떨어져야 하나 봐.”

회복할 가능성이 적다는 말을 돌려 말하는 듯해 눈을 감았다.

“선생님은.”

오구라 유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도빈 군의 일정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다고 하셨어. 그래서 비밀로 하길 바라셨고. 하지만.”

“하지만 쓰러지기 전에는 도빈 군 과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하셨어. 버릇처럼. 저기, 부탁할게. 난 상상 도 못 할 정도로 바쁘겠지만, 정말 염치없지만 그래도. 그래도 어떻게 안 될까?”

사카모토와의 작업이라면 그것이 언제든 어떤 조건이든 큰 기쁨이다.

그는 푸르트벵글러와 더불어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고 나 역시 마찬가지.

음악가로서도.

벗으로서도 그와 함께라면 더없이 즐거운데.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이 최악일 뿐이다.

“……내일 다시 올게요.”

“••••••응.”

병원에서 나와 크리스틴 노먼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다소 지친 목소리로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한 작품을 만들 때 전력을 다하는 만큼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탈 진했을 테니, 사카모토의 일이 그녀 에게도 큰 충격이었던 듯싶다.

곧 그녀와 만날 수 있었다.

웨이브를 넣은 단발과 푸른 눈 여 전하다.

“이게 얼마만이야?”

“잘 지냈죠?”

“그럼.”

악수를 나누었다.

“료이치 사카모토 씨는 만나봤어?”

“네.”

“……난 진심으로 그가 치료에 집 중하길 바라. 설득해 줄 수 있을까?”

고개를 젓자 노먼이 내 손을 잡았다.

“그에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게 해줘야 해.”

크리스틴 노먼의 말에 백번 공감하 지만 그녀는 죽음에 대해 모른다.

아직 하지 못한 일이 너무도 많이 남았는데, 내 영혼은 아직도 악상으로 가득차고 가슴은 노래하는데 그 것을 차마 꺼내지 못하고 눈을 감아 야 하는 원통함.

그 처절한 마음을 알기에, 사카모토가 하고 싶은 대로 따라주고 싶다.

결코 채울 수 없다 할지라도.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와 함께하는 것뿐이에요. 노먼.”

노먼과 눈을 마주했다.

그녀는 이내 한숨을 쉬며 가방을 꺼냈다. USB 저장장치를 내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료이치 사카모토는 널 돌려보내려 했어. 여기가 아니더라도 네가 있어 야 할 곳은 많으니까. 그를 존중해 서 네게도 물었어.”

“ 네.”

“내 욕심일지도 몰라. 아니, 맞아. 난, 나라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을 것 같아. 그도 너도 같은 생각인 것 같네.”

노먼이 건넨 USB 저장장치를 꽉 쥐었다.

“그간 사카모토가 작업한 파일이 야. 절대로 그의 음악이 형편없는

영화 때문에 묻히는 일 없도록 할 거야.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편 집할게.”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제야 사고가 조금씩 돌아가기 시 작했다.

“ 당연하죠.”

나 역시 사카모토의 정열에 어울리는 음악을 할 것이다.

루트비히 판 베트호펜과 배도빈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네. 죄송합니다. 작업에 집중하고 싶다고 하셔서요.”

“네, 안녕하세요. 이사님. 아…… 선생님께서 당분간 면회는 힘드시다 고 하셔서요. 네. 네. 연락드리겠습니다.”

벌써 12년째 사카모토 료이치의 개인 비서로 활동하고 있는 오구라 유키는 쏟아지는 안부, 면회 요청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러 인사들이 며칠째 연락이 안 되던 사카모토 료이치를 걱정하던 와중, 그가 쓰러질 당시 스파팅 세션1) 장에 있던 이들로부터 샌 투병 사실이 알려지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1)제작진과 작곡가가 촬영본, 편집 본을 보며 의견을 공유하는 회의

각 국의 음악 협회는 물론, 내로라 하는 음악계 거물을 넘어서 대중 예술 문화 전반에 걸쳐 전 세계 팬들 이 그를 걱정하였다.

수십 년간 여러 사람의 가슴속에 감동을 남겨준 ‘세계의 사카모토’.

그의 천재적 음악성을 사랑하고.

그보다 뛰어난 인품을 흠모하는 이 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었다.

그러한 여파로 인해 사카모토 료이치가 사실상 회복 불능이라는 보도 가 나오자 세계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1_ 아.

느나 정말 어렸을 적부터 사카모토 료이치 음악 듣고 자랐는데 벌써 가 신다니까 진짜 눈물 나온다.

L 나도. ‘비’는 언제 들어도 먹먹한 데 기사 보고 들으니 정말 주체가 안 되더라.

느이분 정말 대단하신 게 아베 그 또라이 같은 놈이 정권 잡고 있을

때도 공개적으로 군국주의 비판하던 분이셨음.

느일본 클래식 음악 협회 썩어 빠 진 거에 질려서 나카무라 대표랑 같이 전 일본 클래식 음악 조합 만들 기도 하셨지.

L시간 참 야속하지요. 연애하면서 본 철도 직원이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또 큰 별이 지네요. 안타깝읍니다.

L아무도 안 만나고 병실에서 작업 만 하고 있다더라.

느도빈이랑 같이하고 있대 irir

弓q|발 유작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Lz, 킈 그 그평소에는 관심도 없으면 서 슬픈 척하는 거 역겹네. W

L어그로 좀 눈치 봐가며 끌어. 머 리 빈 게 뭐 자랑이라고 그래?

L시발 진짜 저딴 새끼 길 가다 콱 뒈졌으면 좋겠다.

L난 잘 모르지만 사카모토란 분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는 댓글창만 알 것 같다. 모든 사람이 슬퍼하잖아.

느저기 위에 분탕치는 애 안 보임?

녀모든 ‘사람’이.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동년배 중 에서는 유일한 절친 사카모토 료이치가 걱정되었다.

본인도 작년 위기를 겪었기에 더욱 놀랐거늘.

-네. 죄송합니다.

“……아닐세. 끊지.”

돌아온 답변은 거절이었다.

그것이 푸르트벵글러의 가슴을 더 욱 아프게 했다.

평온하고 여유롭던 사카모토 료이치가 다른 이와의 만남을 거부하면 서까지 작업에 몰두하는 것은 본인

의 죽음을 직감하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먼 땅에서 마지막 불꽃을 준비하는 벗을 떠올리며 푸르트벵글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기다릴 뿐.

‘……최선을 다하거라. 도빈아.’

푸르트벵글러는 적어도 사카모토 료이치와 함께 작업에 들어간 배도빈이 베를린 필하모닉에 신경 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마 음의 준비를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베를린 필하모닉의 전 단원이 같은

생각이었다.

휴가를 누리고 있던 단원들은 사카모토 료이치의 투병 소식과 사무국 으로부터 배도빈이 합류했다는 이야 기를 전달받고는 자발적으로 연습을 나왔다.

베를린 필하모닉 B에서 배도빈을 대신해 지휘봉을 잡을 사람이 없던 탓이었다.

그들은 휴가 뒤 있을 공연을 위해 서라도 임시 지휘자 케르바 슈타인을 중심으로 기존의 레퍼토리를 맞춰나갔고.

A팀은 케르바 슈타인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네. 그러니 여기는 걱정 마세요.

“네. 일이 마무리되면 아무래도 다 시 준비해야 할 것 같네요. ……단 원들에게는 잘 설명해 주세요.”

-모두 이해하고 있어요. 보스의 생 각보다 더요.

이자벨 멀핀으로부터 그러한 사실을 전해 들은 배도빈도 우선은 안심 할 수 있었다.

강행군 뒤의 휴가를 자진 반납하면 서까지 스스로 움직이는 단원들이 고마우면서도.

동시에 믿음직스러웠다.

‘푸르트벵글러도 있으니 괜찮을 거 야.’

완벽주의 때문에 그 어떠한 일도 남에게 맡기지 않는 배도빈이었지만 40년간 강철 같이 제국을 지켜온 그와 단원들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 지금은.’

배도빈이 병실로 다시 들어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무균실에서 나올 수 없는 사카모토 료이치를 위해 마련한 병원의 음악 작업실은 여러 문제로 전자기기를 들일 수 없었고.

두 거장은 아날로그로 모든 작업을 대체하고 있었다.

“껄껄. 이러고 있으니 어렸을 때로 돌아간 것 같군. 어떤가, 도빈 군. 불편하진 않고?”

“알잖아요. 원래부터 이렇게 작업 했던 거.”

배도빈의 말에 빙그레 웃은 사카모토 료이치가 다시금 악보를 들여다 보았다.

“음. 근데 이 느낌표는 뭔지 알려 주겠나?”

“4분음표예요.”

“……악필은 여전하구만.”

“도진이는 팩토리얼이래요.”

“하하하하! 쿨럭. 쿨럭. ……도진 군다운 말이로군.”

곧 끊어질 듯한 생명줄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사카모토 료이치의 얼굴은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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