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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316화 (316/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16화

    68. 그 사람(5)

    시간마다 준비되는 훌륭한 자연식 과 깊게 파고들 수 있는 베개 그리고 조용한 숲은 배도빈마저 녹아내 리게 했다.

    소파에 길게 누운 배도빈은 눈만 깜빡일 뿐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고 있다 보면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는데 최지훈과 차채은, 배도진은 그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도빈이 이렇게 얌전한 거 처음이야.”

    “나도. 이렇게 게으르면서 지금까진 어떻게 지냈대.”

    “형아. 형아.”

    배도진이 배도빈의 뺨을 때렸다.

    항상 악보를 보거나 악기를 연주했던 형이 누워 있기만 하니 죽은 건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한 행동이었지 만 배도빈은 움직이지 않았다.

    “피곤한가 봐. 형이랑 1층에서 만화 볼래?”

    최지훈이 그런 배도진을 말렸다.

    “형 아파?”

    배도진이 걱정스럽게 배도빈과 자 신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대며 물었다.

    “푹 쉬면 괜찮아질 거야.”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 가자 차채은이 잠든 배도빈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지쳤나 봐.’

    철이 들기 전부터 함께했지만 차채은은 배도빈으로부터 힘들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비슷한 말조차 없었다.

    어렸을 때는 아무 생각 없었지만 돌이켜 보면 그 어린 나이에 배도빈은 너무나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자의에 의한 것이라고는 해도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일을 십 년 넘게 해내고 있었다.

    이렇게 지쳐 잠만 자는 것을 보니 안타까웠다.

    그러나 베를린으로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 붙일 것이기에.

    음악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임을 알기에 차채은은 그런 배도빈이 답답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었다.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가 전해준 힘과 용기를 나눠주고 싶었다.

    덜 여문 그 마음은 그 어떠한 점 에서도 명확하진 않았지만 지금도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성장하고 있었다.

    빠바바밤- 빠바바밥-

    어느새 잠들고 말았는데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벌레에게 물리기라도 했는지 뺨이 아프다.

    눈을 비비고 겨우 일어나자 벨소리 멈췄는데 누군가 싶어 손을 뻗어 보 니 히무라가 막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전화를 건 사람도 박선영이였는데 급한 일인가 싶어 메시지를 확인하 니 전화를 달라는 내용이었다.

    바로 전화를 거니 채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박선영이 다급히 말했다.

    -도빈이야?

    “네. 무슨 일이에요?”

    전화기 너머에서 히무라의 목소리 가 들렸다.

    둘이 잠시간 언성을 높였는데 제대 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뭐야?’

    -도빈아, 나야.

    히무라다.

    “네. 무슨 일 생겼어요?”

    -지금 말하긴 그런데. 혹시 언제쯤 돌아오는지 예정 있어?

    “한 사나흘 뒤엔 돌아갈 거예요.”

    대답은 했지만 박선영과 히무라의 태도로 보아 작은 일이 아님은 분명 했다.

    “무슨 일인데요. 괜찮으니 말해봐요.”

    -도빈이도 알아야지! 모르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어떡할 건데!

    박선영이 소리쳤다.

    전화기 너머로 히무라의 한숨이 나지막하게 전해진다.

    잠깐의 간격을 두고 히무라의 고뇌가 전해져 불안해지는데, 그가 간신히 입을 뗐다.

    -……사카모토 선생님이 쓰러지셨어.

    순간 누군가 어깨를 때린 것 같다.

    가슴이 무너져 서 있을 수 없었다.

    -다행히 정신은 차리셨는데 아무래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부터 생각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가만히 전 화기를 들고 있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선생님은 네게 비밀로 해달라 하셨지만…… 선영이 말대로 더 늦게 전에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알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전화기를 내렸다.

    그러기를 얼마간.

    ‘아니야. 괜찮을 거야.’

    푸르트벵글러와 달리 바른 생활을 하는 사카모토라면 분명 잘 치료받 고 나을 것이다.

    나이가 있어 그럴 뿐.

    괜찮을 거다.

    ‘내일 미국으로 가자. 아니, 오늘 밤이라도. 그래. 괜찮을 거야.’

    사카모토가 죽을 리 없다.

    문득.

    멀리 피아노 소리가 났다.

    정신을 차리니 그 소리가 좀 더 가깝게 느껴졌다.

    ‘이 곡은.’

    첫 번째 에튀드.

    일어나 소리를 따라 걸으니 피아노를 연주하는 차채은과 그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최지훈을 볼 수 있었다.

    ‘……엉망이잖아.’

    다섯 살 때가 훨씬 낫다.

    건반을 누르는 어색한 동작과 제법 진지한 눈이 대조된다.

    굳은 손가락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천재적인 리듬감이 활약할 수 없는 모양.

    채은이가 아닌 그 어떤 사람이라도 10년간의 공백을 두고 멀쩡한 연주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래도 기억은 하고 있네.’

    제멋대로지만 그래도 음계만은 외우고 있다.

    차채은이 연주를 끝내고 일어섰다.

    “와. 더럽게 못 친다.”

    차채은이 멋쩍은 듯 웃자 최지훈이 고개를 저었다.

    “연습하면 금방 좋아질 거야.”

    “나만 치게 하지 말고 오빠도 해 봐.”

    최지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의자 에 앉았다.

    “뭐 할까?”

    “요즘 연습하는 거 있다며.”

    “어…… 도빈이 깨지 않을까.”

    “해봐.”

    피아노 옆으로 가 바닥에 앉았다.

    이상한 말을 들어서 기분이 몹시 안 좋은데 최지훈의 연주라도 들으며 마음을 가라앉혀야겠다.

    “아직 완성은 아닌데.”

    최지훈이 손바닥으로 손가락을 뒤 로 쭉 민 뒤에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오케스트라 대전 기간 내내 열심히 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또 어떤 연주를 들려줄지.

    차분히 눈을 감자 곧 5도 화음이 귀를 때렸다.

    강렬하게 연주를 시작한 최지훈은 스케일로 손을 풀더니 이내 낙차를 크게 벌렸고.

    이내 호우처럼 떨어졌다.

    ‘무슨.’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건반을 부술 듯한 타건은 각 음계를 명확하게 터뜨렸다.

    A-D-F#-D로 이어지는 11도 분 산화음 뒤에 마치 세계를 넘어선 듯 한 도약.

    3옥타브를 넘겨 다시금 이어지는 아르페지오.

    연주는 더욱 빨라져 마침내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버렸다.

    초당 14개 음만 넘어서도 사람의 귀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데 최지훈의 연주는 마치 픽셀을 지우기 라도 하려는 듯했다.

    음계 하나하나가 모여 큰 그림을 이루는 게 피아노라면 음계 사이의 간격을 최대한 좁혀 리듬감이 존재 하는 한계선에서 화질을 높이는 중 이다.

    “그만!”

    최지훈의 어깨를 잡았다.

    녀석이 깜짝 놀라 돌아봤고 그 순진무구하면서도 놀랍도록 곧은 눈빛 에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왜, 왜 그래. 무섭게.”

    “히힛. 아직 엉망이지? 최대한 멜로디를 살려 보려는 중인데.”

    “……하지 마.”

    “어?”

    이 녀석이라면 언젠가 해내고 말 것이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해낼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혹사시킬 테니까.

    “속주만이 답이 아닌 건 알잖아. 넌 다른 방향으로도 더 성장할 수 있어. 굳이 이런 게 아니라도 최고가 될 수 있어.”

    “도빈아.”

    “이런 식으로 했다간.”

    나조차 깜짝 놀라게 한 연주법이다.

    이런 식으로 소리를 가지고 노는, 아니, 유린하는 피아니스트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초절기교로 유명한 가우왕이나 완 벽한 피아니스트라는 크리스틴 지메 르만도 아닌 오직 최지훈만이 시도 한 일이다.

    “망가질 거야.”

    최지훈의 손을 보았다.

    그야말로 피아노를 연주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좋을 만큼 크게 얇 으며 힘도 갖추었다.

    그걸 사용하는 최지훈 역시 탁월한 재능에 굴하지 않는 마음을 가졌으니 언젠가는 정말 최고의 자리에 오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야.”

    자신을 파괴하는 행동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괜찮아. 가끔 쑤시기는 하지만 아 프면 확실히 쉬니까.”

    “쑤시다니?”

    “여기랑 여기 또 여기……

    최지훈이 손가락 마디를 가리켰다.

    이제 고작 19살에 멀쩡한 마디가 없다니, 피 흘리는 나윤희와 과거의 지옥 같던 일이 떠오른다.

    그리고.

    사카모토.

    “병원도 가봤는데 별문제 없대. 괜찮아. 나 걱정해 주는 거야?”

    “당연하잖아!”

    멱살을 잡고 놈을 일으켰다.

    “오, 오빠! 왜 그래!”

    고개를 들어 멍청한 형제에게 말했다.

    “웃지 마. 쉽게 생각하지 마.”

    “••••••그래.”

    “너는. 너는!”

    “윤희 누나처럼 안 될 거야. 괜찮아. 안 그럴게.”

    최지훈이 나를 안았다.

    그제야 애써 속이고 있던 마음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사카모토가…… 쓰러졌대.”

    *

    “조심해서 잘 다녀와.”

    “네.”

    “도착하면 전화하고.”

    고개를 끄덕이곤 어머니와 도진이를 안아주었다.

    “다음에 또 오면 되니 맘 쓰지 말 고 다녀와. 사카모토 씨 잘 위로해 드리고.”

    “네.”

    아버지께서 등을 쓸어내려 주셨다.

    “괜찮을 거야.”

    “그래.”

    채은이와 인사하고.

    최지훈과는 말없이 서로를 안아주었다.

    할아버지의 직원이 마중을 나와 차 에 탔고 초조하게 기다리길 얼마간, 하노버에 있는 격납고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출발할 수 있어요?”

    “예. 준비 끝내두었습니다.”

    12시간 안에 모든 걸 처리할 수 있다니.

    이럴 때는 정말 할아버지께 감사할 뿐이다.

    익숙하지 않은 개인기에서 자꾸만 쑤셔오는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출 항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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