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315화 (315/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15화

    68. 그 사람(4)

    늦은 오후, 레버쿠젠의 별장에 도 착했다.

    목재로 지은 2층 높이의 건물은 제법 잘 관리되고 있었는데 숲 한가 운데에 있어 과연 조용히 지내기에 적절해 보였다.

    오는 도중에 꽤 많은 사람이 호숫

    가 근처에 있어 걱정했는데 기우였던 모양.

    할아버지도 어머니도 한 번도 들리 지 않았다고 하는데 왜 이 좋은 곳을 방치해 두었는지 모를 일이다.

    ‘여기 말고도 사두기만 한 곳이 한 두 개가 아니겠지만.’

    차에서 내리니 관리인이 마중을 나 왔다.

    “어서 오십시오. 이곳을 관리하고 있는 제이슨 프라이데이입니다.”

    수염이 멋대로 나 있고 도끼를 들 고 있었는데 그 뒤로 장작이 널브러 져 있었다.

    아직 날이 더운데 벌써부터 장작을 준비하는 걸 보니 부지런한 사람인 듯하다.

    “반가워요. 유진희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제이슨.”

    아버지 어머니와 인사를 나눈 관리 인 프라이데이가 정중히 별장으로 안내했다.

    잡초 하나 없이 잘 정돈된 정원이 인상 깊다.

    “예정보다 조금 일찍 오셨네요. 이 곳이 거실 저쪽이 부엌입니다. 침실 은 2층에 있으니 원하시는 대로 사 용해 주십시오.”

    “고마워요. 사용을 안 해서 걱정했는데 정말 깔끔하네요. 혼자 관리하 기 힘드셨을 텐데.”

    “마음에 드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정돈된 정원을 보면 제 기분도 좋아 지거든요.”

    좋은 직업 정신이다.

    “다만 지하실은 수리중인 곳이 있어 위험하니 조심해 주십시오.”

    “도진아, 들었지?”

    “네!”

    1층 거실에는 벽난로와 TV 그리고 큰 소파와 곰 가죽이 카펫으로 깔려

    있었는데 도진이가 곰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울먹이고 말았다.

    “이건 부탁드릴게요.”

    “네. 식사 후 돌아오셨을 땐 치워 두겠습니다.”

    부엌과 작은 분수가 있는 넓은 테 라스와 그 앞에 딸린 정원을 둘러본 뒤 제이슨 프라이데이가 고개를 숙였다.

    “2층도 둘러보시지요.”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이 판자를 자르고 조립한 게 아니라 큰 나무를 깎아 만든 거라 고풍스럽다.

    이런 데에는 문외한이지만 분명 실 력 좋은 장인의 솜씨일 거다.

    “ 대박!”

    채은이가 계단 옆방에 들어가자마 자 침대 위로 몸을 날려 베개에 얼 굴을 파묻었다.

    “난 여기! 끄우우우우웁! 우리 집 별장도 이랬으면 좋겠다.”

    신난 것 같다.

    그 옆에 최지훈이, 건너편에는 나 와 도진이가 가방을 두었다.

    2층에도 작은 거실이 있었는데 음 향기기와 TV, 피아노가 있어서 최

    지훈과 같이 살펴보고 있자니 어머 니께서 나오셨다.

    “식사 준비는 아직이죠?”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같이해요.”

    “아, 저도 도울게요, 어머니.”

    “괜찮아. 놀고 있어도 돼.”

    “이런 거 좋아해요.”

    “저도.”

    “도빈이는 맛있게 먹어주면 돼.”

    최지훈이 어머니를 따라 1층으로 내려갔고.

    “도진아, 누나랑 놀자.”

    “뭐 하고?”

    도진이는 채은이를 따라 쪼르르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에 나온 아버지가 나를 보 시더니 웃으셨다.

    “장 보러 갈 건데 같이 갈래?”

    “네.”

    훌륭한 요리사인 어머니께서는 내 탁월한 미적 감각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고, 달리 할 일도 없겠다 아버 지를 따라 나서 다시 차에 올라탔다.

    표정이 무척 좋아 보였다.

    “어때? 나오니까.”

    “조금 지루하긴 하지만 불편하진 않아요. 아버지는요?”

    “하하.”

    잠깐 웃은 아버지께서 핸들을 돌리 며 말씀하셨다.

    “아빠는 좋아. 아빠도 엄마도 도빈 이랑 도진이한테 좋은 기억을 주지 못한 거 같아서 내내 마음에 걸렸거 드 ”

    그러고 보니 도진이까지 함께한 가 족 여행은 처음이다.

    도진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한 번뿐 이었고 돌이켜 보니 참 바쁘게 살아 온 듯하다.

    아마 인생이 짧다는 걸 알기에 의 식하지 않고도 쉬는 걸 거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족만큼 소중한 것도 없다는 걸 생각해 보면, 휴식을 낭비라는 생각이 현명하진 못한 것 같다.

    “지금부터 가지면 되죠.”

    아버지와 잠시 시선을 마주하곤 웃었다.

    ‘가족이라.’

    어머니와 도진이랑은 함께 사는 만 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지만 아 버지와는 그럴 기회가 적었다.

    어릴 때부터 밖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또 원체 본인 이야기는 잘 안 하시니까.

    어렸을 때부터 알게 모르게 어머니 도 아버지도 날 위해 희생한 일이 많은 만큼, 지금은 아버지도 어머니 도 본인의 삶을 즐길 수 있게 돕고 싶다.

    “테메스……였죠? 아버지가 찾는 부족.”

    “응.”

    “처음에는 영국에서 발견했잖아요. 유럽 본토로 넘어온 이유가 뭐예요?”

    «으«

    아버지께서 생각을 정리하시더니 이내 최대한 쉽게 테메스 부족에 관 한 이야기를 풀어내셨다.

    “테메스의 시작은 기원전 8세기 무 렵으로 보고 있어. 당시 지금의 영 국에서 시작되었는데 켈트 문화와 비슷한 양상이었던 것 같아.”

    역사 강의 시간이다.

    “켈트족에 관한 이야기는 카이사르 가 작성한 갈리아 전기에 소개되는

    데 그 안에서도 꽤 여러 문화가 있었던 것 같아. 그중 하나가 테메스. 어쩌면 그전부터 있었을지도 모르지 만 증명된 건 그때부터야.”

    아버지께선 켈트 문화의 특징 중 하나인 드루이디즘이 아마도 테메스 에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고 조심스 레 추측하셨다.

    “그렇게 번성하던 테메스가 이동하 게 된 건 아마 로마 때문으로 보는 데.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5만 명을 이끌고 영국을 정복했거든.”

    세계사는 어렵다.

    “그때 테메스에 관련된 유적이나

    기록이 대부분 소실되었어. 이후 테 메스의 역사가 끊긴 줄 알았는데, 네가 태어나기 전에 유럽 각지에서 관련 유물이 발굴되었지. 처음에는 그저 로마가 수탈하고 남은 건 줄 알았는데 최근에 부락을 이루고 있었던 터를 발견한 거야.”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만 정리해 보면 기원전부터 영국에서 자리하고 있던 테메스란 부족이 로마의 침략으로 유럽 본토로 도피한 듯하다.

    “수백 년간의 공백이 있는데 16세 기부터는 꽤 번영했던 것 같아. 그 래봤자 마을 단위지만 덕분에 발견 할 수 있었지.”

    16세기면 당시 유럽에 살았던 나 도 알 법도 한데 테메스란 마을은 들어보지 못했다.

    “재밌는 건 그들이 자리 잡은 지역 이 지금의 오스트리아 빈 근처라는 거야. 원래 오스트리아는 기원전 1세 기까진 켈트 민족이 지배하고 있던 땅이거든. 제2의 고향이었던 거지. 그곳도 로마 제국에 의해 몰락되었지 만 어떻게든 숨어 지냈던 것 같아.”

    “빈이요?”

    “응. 음악으로 유명한 곳이지?”

    두말 하면 입 아프다.

    당시 유럽의 예술은 모두 빈 근처

    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때문인지 이후의 기록은 당시 독일어로 적혀 있어. 음악으로 치료를 했다는 기록도, 테메스가 공동체 의 이름이자 부족장의 이름이라는 것도 그때 발견되었고. 18세기까진 오스트리아에 있었는데, 문제는 그 뒤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거야. 지금 은 그걸 찾고 있고.”

    ‘내가 이렇게 주변에 관심이 없었나?’

    물론 역사 공부 따위 받아본 적도 없지만 18세기까지 빈 근처에 마을을 이루고 있던 이들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가방끈은 짧았지만 사교계에 불려 다니며 그들을 통해 여러 이야기를 접했지만 테메스란 이름을 들은 적 은 없었다.

    “여기까지면 많은 사람이 집착할 이유가 없는데, 아빠랑 함께 연구하는 사람들은 테메스 부족이 남긴 신 탁이 사실이지 아닐까 싶어.”

    “뭔데요?”

    “위대한 영혼을 위로하라. 무결한 이에게 닿도록 외쳐라. 마침내 완전 한 존재를 위해 노래하리니 이윽고

    새로운 문이 열려 광명을 비추리 라.”

    배영빈이 보는 만화나 아리엘 얀스 의 말투와 비슷하다.

    “드루이디즘과 관련이 있는 만큼 테메스 부족이 말하는 위대한 영혼 은 신을 뜻할 테고 신을 위로하기 위해 음악을 했던 것 같아.”

    종교와 음악은 떼놓을 수 없는 관계.

    서양 음악도 교회로부터 발전해 왔으니 그럴 법도 하다.

    “궁금한 건 새로운 문이 뜻하는 건 데 그게 아마 테메스가 숨긴 보물의 열쇠이지 않나 싶어.”

    “보물이요?”

    “그래. 보물. 정확히 어떤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기록에서는 테메스 부 족의 족장 테메스가 대대로 물려준 보물이 있다고 하거든.”

    “찾으면 엄청 비싸겠네요.”

    “아빠의 로망이지.”

    아버지가 차를 세우며 고개를 돌렸다.

    역사나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지 만, 아버지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씩 하고 웃으며 마트로 들어갔다.

    * *

    저녁을 먹은 배도빈, 최지훈, 차채은은 2층 거실에 모였다.

    “도진이는?”

    “아버지, 어머니랑 산책 갔어.”

    “너무 어두운데. 형광등 안 켜져?”

    “전기가 나갔나 봐. 불이 안 들어오는데.”

    최지훈이 어두운 와중에도 스위치를 찾았지만 딸칵거리는 소리만 날 뿐, 불은 들어오지 않았다.

    “아, 여기 있다.”

    차채은이 손전등을 켜자 협소하게 나마 시야가 트였다.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 우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불고 그에 맞춰 창문이 덜컹거렸다.

    불규칙하게 울리는 소음이 불쾌하 게 울렸고 차채은이 배도빈 뒤에 숨 어 손전등을 건넸다.

    “좀…… 무섭다.”

    손전등을 받아 든 배도빈이 무심하 게 주변을 비춰보곤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뭘 해야 하는데?”

    “모, 몰라.”

    “아. 도빈아, 여기 좀 비춰 봐.”

    최지훈이 뭔가를 발견한 듯해 배도빈이 성큼성큼 걷자 차채은이 후다 닥 그 뒤를 쫓았다.

    “ 뭔데?”

    “수첩인데 뭔가 적혀 있는 것 같아.”

    최지훈이 책상 서랍을 가리켰고 배도빈이 그것을 비추었다.

    펼쳐진 수첩에는 최지훈의 말대로 누군가의 일기가 적혀 있었다.

    심하게 훼손되어 알아보기 힘들었지

    만 마지막 문구만은 읽을 수 있었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이게 무슨 말이야?”

    “모, 몰라아. 오빠, 그냥 우리 나, 나가자.”

    “아, 뒤에 더 있다.”

    최지훈이 페이지를 한 장 더 넘기 자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지하실 쪽은 검게 덧칠이 되어 있었다.

    “뭔가 숨기려는 거 같지 않아?”

    “그러게. 가볼까?”

    “미, 미쳤어?”

    쿠구궁-

    “꺄아아악!”

    순간.

    아래에서부터 기계가 작동하는 듯 한 소리가 육중히 울렸고 깜짝 놀란 차채은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래서 났지?”

    “어. 보고 올게.”

    “가지 마. 가지 마.”

    배도빈이 계단에 발을 내딛자.

    끼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가 고막에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계단을 타고 올라 오는 검은 연기가 배도빈의 발을 휘

    감았고, 최지훈이 눈매를 좁혔다.

    “불은 아닌 거 같은데.”

    “가지 마. 가지 마.”

    끼이 익.

    배도빈이 한 발 더 내딛자 차채은 이 오열하다시피 떼를 썼다.

    “대체 왜 가려는 거야. 영화도 안 봐? 이럴 때 가는 거 아니라고오!”

    “뭔지 궁금한데.”

    “오빤, 오빤 아니지?”

    덤덤한 배도빈에게 질린 차채은이 최지훈에게 매달렸지만 소용없었다.

    “나도 궁금해. 지하에서 올라오는 건가?”

    “확인해 보면 되지. 조심해서 내려 와.”

    “안 간다고!”

    바람에 덜컹거리는 창문과 발아래 깔린 검은 연기로 잔뜩 예민해진 차채은은 이미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두 사람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뿐인 손전등은 배도빈이 들고 있었고 혼자 어둠 속에 남아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가, 같이 가.”

    “빨리 와.”

    ‘무슨 신경이야.’

    차채은이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어둡고 무서워 뭐라도 잡고 싶어 난간에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아 허 공을 가를 뿐이었다.

    그때.

    차채은의 눈앞으로 무엇인가가 떨 어 졌다.

    “ 엄마야!”

    “왜 그래?”

    “바, 바, 바, 방금 뭐 떨어졌어.”

    배도빈이 차채은이 있는 방향으로 불을 비췄다.

    그 탓에 시야가 가려진 차채은이 손을 앞으로 뻗곤 휘저었고 배도빈 과 최지훈은 잠시 말을 잃었다.

    “채은아.”

    “왜, 왜.”

    “고개 들지 말고 그냥 내려와.”

    “그런 말 하지 마! 어떻게 가라는 거야아아!”

    배도빈이 차채은이 보고 내려올 수 있게 계단을 비췄다.

    삐걱.

    끼이익.

    그대로 주저앉아 우는 차채은을 데 려오기 위해 최지훈이 내려왔던 계단을 다시 올라가자 차채은이 엄마 와 아빠를 찾으며 더욱 크게 울었다.

    한참을 달랜 뒤에야 일어선 차채은 이 최지훈과 함께 발을 맞춰 내려오는데 배도빈이 재촉했다.

    “빨리 와.”

    “되겠냐! 멍충아!”

    차채은이 있는 대로 화를 내며 배도빈을 보았고 아주 작은 불빛에 어 이 없어 웃는 배도빈의 얼굴이 보였다.

    그 순간.

    거대한 금속 날이 빛에 반사되었다.

    “도빈아!”

    “오빠!”

    콰드득!

    도끼날이 참혹한 소리와 함께 배도빈의 목과 어깨 사이로 파고들어 모 습을 드러냈다.

    사방으로 번진 피가 계단을 물들였고.

    무참히 벌어진 상처에서는 혈액이 심장이 뛸 때마다 꿀렁대며 분출되었다.

    힘없이 떨어진 손전등이 돌아, 기괴한 가면을 쓴 남자를 비추었고.

    “너어어!”

    이성을 잃은 최지훈이 뛰쳐나갔다.

    공포에 질린 차채은은 그대로 주저 앉아, 가면 쓴 남자에게 허리를 베인 최지훈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꾸우욱. 꾸우욱.

    계단을 올라오는 남자로 인해 모든 시야가 가려졌고.

    이내 그녀의 눈앞으로 도끼날이 쇄 도했다.

    차채은이 VR을 벗어 던지며 소리 쳤다.

    “뭐 이런 게임이 다 있어!”

    “죽었어?”

    배도빈이 묻자 차채은이 달려들어 배도빈을 사정없이 때렸다.

    “내가! 가지! 말자고! 했지!”

    “안 가면 진행이 안 되잖아.”

    배도빈이 우는 차채은을 달래느라 애먹을 때 최지훈이 게임 타이틀을 살피며 물었다.

    “와. 근데 진짜 잘 만들었다. 루드 캣 신작이야?”

    “그런가 봐. 나한테도 보내줬는데 할 시간이 없어서.”

    “이거 19세인데 어떻게 산 거야?”

    “그딴 게 중요해? 버려!”

    배도빈 일가와 최지훈, 차채은의 첫 번째 휴가가 엉망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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