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312화
68. 그 사람⑴
시상식을 마친 베를린 필하모닉은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에 곤욕을 치 러야 했다.
기자회견장에서 두 시간 동안 시달 린 끝에야 악단주 배도빈이 준비한 만찬으로 위로받을 수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돈 많은 보스가 생기니까 질이 달 라지네.”
“아, 감사합니다. 이거 그냥 마시면 되는 거예요?”
독일과 프랑스에서 수배해 온 셰프 들이 준비한 요리와 토스카나산 와 인, 배도빈의 취향이 한껏 반영된 디저트.
두 명당 한 명씩 붙어 케어하는 접 객원까지.
세계 최고 수준의 대우를 받던 베를린 필하모닉조차 깜짝 놀랄 수준 이었다.
"...!"
음식을 맛본 직원, 단원들은 저마 다 감탄하며 웃었다.
그런 와중에 따로 초대받은 배도빈 의 지인들도 특실에서 파티를 즐기 긴 마찬가지였다.
그간 원고 작업으로 인해 피폐해졌던 차채은이 와인으로 조리한 굴찜을 먹곤 눈을 크게 떴다.
“헐. 미친. 개맛있어.”
“천천히 먹어.”
“오빠도 먹어봐. 진짜 미쳤어.”
차채은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맛을 본 최지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진희가 흐 뭇하여 미소 짓다가 입을 뗐다.
“아들, 내일 바로 독일로 가는 거야?”
“네. 콩쿠르 준비하려 해요.”
“ 또?”
차채은이 입을 열심히 놀리며 물었다.
배영준은 꾸벅꾸벅 졸면서도 포크를 놓지 않는 둘째를 안아들었다.
“아무래도 재워야겠어. 먼저 올라 갈게.”
“도진이 잘 자.”
“우웅.”
배도진이 조는 와중에도 최지훈, 차채은과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아버지에게 안겨 올라갔다.
유진희가 입이 가득 찬 차채은을 대신해 다시 물었다.
“어떤 콩쿠르?”
“퀸엘리자베스에 나가려고 해요. 내년이라 여유는 있지만 쉬운 일은 아니라서요.”
“하나 우승하기도 힘들다고 하던 데.”
“히힛. 도빈이는 오케스트라 대전 에서 우승한 곳에 입단하려면 그 정 도는 해야 한대요.”
항상 노력하는 최지훈이 아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어주는지, 또 그 모습이 기특해 유진희는 진심으로 응원했다.
“채은이는? 출석 괜찮아?”
“위험한데 아빠가 정말 음악 배우 고 싶으면 유럽에서 학교 다녀도 된 다고 해서 이쪽으로 올 것 같아요.”
“잘 된 거 아냐?”
차채은의 표정이 그리 좋지 못해 유학 소식이 반가웠던 최지훈은 고 개를 갸웃했다.
“공부해야 하잖아. 독일어는커녕 영어도 못 한다고.”
차채은의 투정에 유진희가 웃었다.
“둘이 시간 괜찮으면 휴가 같이 가 줬으면 좋겠는데. 도빈이도 좋아할 거야.”
“전 찬성! 게임 샀는데 같이하면 되겠다!”
“저도 좋아요.”
한편 사카모토 료이치는 잔뜩 긴장 하고 있는 페터 형제에게 관심을 보 이고 있었다.
“허허. 이런 경험을 또 하게 될 줄 은 몰랐는데.”
“무슨 말씀이신가요?”
히무라의 질문에 사카모토가 프란 츠 페터의 악보와 그를 번갈아 본 뒤 대답했다.
“이게 정말 정규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만든 곡인가 싶네. 마치 어렸을 적 도빈 군을 다시 보는 듯 해. 프란츠 군, 공부는 어떻게 하기 로 하였는가?”
“그, 그, 그, 그게……
“베를린 대학에 입학할 거예요.”
프란츠 페터가 위대한 거장 앞에서 긴장한 나머지 떨고 있는데 때마침 배도빈이 들어섰다.
“오. 오늘의 주인공이로군.”
사카모토가 벌떡 일어나 배도빈을 끌어안았다.
오케스트라 대전 우승의 축하로는 충분하여 배도빈도 오랜 친구를 꽉 끌어안았다.
“도빈 님, 그 일 말인데요……
“ 대학?”
“네……• 저, 저는 배운 것도 없고 머리도 나빠서 대학은…….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일 도우면서 공부하면 안 될까요? 처, 청소라도 할게요!”
“대학도 못 감당하는 녀석이 무슨 입단이야. 안 돼.”
배도빈의 단호함에 프란츠 페터가 크게 낙담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안 다닐 테니 까.’
그러나 진달래의 경우도 있었고 그 와 마찬가지로 프란츠도 자신이 받는 지원에 부담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것을 잘 알기에 배도빈은 조금도 양보해 줄 생각이 없었다.
본인도 인류가 쌓은 지식에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어머니 유진희를 통해 반 강제로 지식을 접했고, 그 것이 살아가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느꼈던 탓도 있었다.
‘음악가는 음악만 하면 되지만 인 간으로서 필요한 것도 있으니까.’
더욱이 배도빈과 달리 프란츠는 기 본적인 기보법도 제대로 익히지 못 한 터라 더더욱 정규 교육이 절실했다.
“그러니 포기하고 지금 받는 수업 잘 들어. 3년 안에 입학하지 못하면 내쫓을 거야.”
“네, 네!”
배도빈이 프란츠의 어깨를 도닥이 고 입을 열심히 오물거리는 알베르 트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사카모토와 히무라, 나카무라에게 말했다.
“그럼 이따 봐요.”
“그러지.”
그렇게 인사를 나눈 배도빈은 어머 니 곁에 앉아 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지막 무대까지 준비하고 또 지금 까지 여러 사람들과 밀린 이야기를 처리하느라 상당히 피로했던 탓이었다.
“고생했어. 우리 아들 멋있던데?”
“그럼요. 누구 아들인데.”
모자 사이의 살가운 대화를 최지훈 이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오빠, 우리도 같이 가기로 했어.”
“어딜?”
“휴가. 레버쿠젠으로 간다며.”
“아아. 잘됐네. 근데 괜찮은 거야? 학교는?”
“유학 올 거지롱.”
“여기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차채은을 보며 배도빈이 피식 웃었다.
“말은 할 줄 알아?”
그 한마디에 차채은은 금방 기분이 가라앉아 애꿎은 샐러드를 입 한가득 넣었다.
“본격적으로 공부할 거면 악기도 다시 시작해 보는 건 어때?”
그때 최지훈이 나섰다.
“움?”
“전문적으로 하지 않아도 글 쓰는데 도움이 될 거야. 경험자랑 아닌 사람의 차이도 크고 또 글의 신뢰도 도 달라질 테니까.”
배도빈이 최지훈과 차채은을 번갈아 봤다.
최지훈은 차채은의 재능이 이대로 묻히는 걸 진심으로 아까워했고.
전과 달리 타협점을 내놓은 그의 말은 차채은에게도 그럴 듯하게 들렸다.
“그런가?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차채은이 배도빈을 보며 물었다.
“입만 놀리는 것보단 훨씬 낫지.”
“으음. 근데 그럼 더 이상하게 보 지 않을까? 예를 들어 오빠보다 못하는 내가 오빠를 평가하면 독자들 도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없어.”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구, 굳이 활동하진 않아도 괜찮잖아. 평론의 질을 높인다고만 생각해도.”
“그건 그렇네.”
차채은이 일단은 수긍했다.
시작이 가장 어렵기에 최지훈으로 서는 반은 성공한 일이었는데 배도빈도 만족스러운 일이라 둘은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유진희가 살며시 웃었다.
한숨 돌린 배도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리가 좀 비네요? 할아버지는요?”
최지훈이 유진희를 대신해 대답했다.
“아빠랑 나가셨어.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 말?”
“모르겠어. 음……. 아빠 요즘 좀.”
어떤 단어가 좋을까 잠시 고민한 최지훈이 마침 적당한 단어를 떠올 려 말을 이었다.
“신나신 거 같은데 나쁜 일 다시 하시는 건 아니겠지?”
“네가 있는 이상 그러진 않으실 거야.”
최지훈이 배도빈을 보며 웃었다.
“달래 언닌 아까 누구 만나러 간다고 했어.”
“……아리엘 얀스?”
“몰라? 아리엘 얀스면 LA 필하모닉 감독 아냐? 그 사람은 왜……. 헐. 둘이 사귀어?”
“몰라.”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는 게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고 차채은이 눈을 깜 빡였다.
“혹시 질투하는 거야?”
“어머. 정말이니?”
그 말에 유진희까지 합류하니 배도빈이 드물게 신경질을 내며 특실을 벗어났다.
“하긴. 저 음악만 아는 인간이 그 런 데 신경 쓸 리가 없지.”
“아빠 닮아서 그래.”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요.”
삐진 배도빈을 보며 웃은 유진희와 차채은은 최지훈의 말에 잠시 멈췄 다가 고개를 바짝 내밀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한편 유장혁 회장과 최우철 대표는 조용한 곳에서 따로 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핫하하하! 우리 손주가 돈은 잘못 벌어도 음악은 기막히게 하지 않나.”
작년 한해 170억 원의 수입을 올린 배도빈이지만 범지구적 기업을 다수 운영하는 WH그룹의 총수, 유 장혁 회장에게는 그보다 세계 최고 의 지휘자라는 명예를 틀어쥔 것이 더욱 자랑스러웠다.
“그래. 그건 그렇고. 일은 잘 되고 있는 것 같더군. 어떤가?”
“유럽 시장은 거의 확보하고 있습니다. 웹플릭스가 강세를 보여 주춤 하곤 있지만 인터플레이가 구축망 하난 잘 만들어놓았더군요.”
“역시 최우철이야. 믿고 맡기길 잘 했어.”
최우철이 대표로 있는 유통업체 이日는 최근 공중분해 된 인터플레이의 인프라를 흡수, 활용하며 JH씨네 마, JH사운즈 등 유럽 시장을 빠르 게 잠식해 나가고 있었다.
“버만 그 녀석 배알 좀 꼬일 거야. 음?”
최우철과 차승현의 합작으로 인터 플레이의 이미지는 나락을 떨어졌고, 그 빈자리를 이日가 채운 것인데 그 모든 일이 단 6개월 만에 벌어 졌으니 잔뼈가 굵은 유장혁으로서도 예상치 못했던 성과였다.
더욱이 인터플레이와는 차별되는 정직하고 유저 친화적인 이미지를 구축한 우日가 사실은 대부분 인터플 레이의 시스템을 활용한 기업이었으니, 제임스 버만의 속이 뒤틀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접촉을 해오더군요. 뭐, 제 방식으로 처리했지만.”
“핫하하하! 어련히 잘했을까. 걱정 말고 계속 진행하게. 참 그리고.”
“네.”
“JH가 대체 뭔 뜻인가?”
최우철은 대답하지 않고 슬쩍 웃을 뿐이었다.
‘질투는 무슨.’
아득바득 발버둥치는 인간은 싫지 않고 그렇게 성장하는 사람은 좋아하기에 거뒀을 뿐.
푸르트벵글러와의 작업을 통해 가 능성을 보여준 진달래가 성장하기 전에 다른 악단으로 간다면 속이 뒤 틀리기야 하겠지만 어머니도 채은이 도 너무 넘겨짚었다.
진달래가 아니더라도 니나 케베리 히가 다른 소속사로 이적한다든지 마르코나 료코, 프란츠 모두 마찬가 지다.
내 것을 빼앗으려 하는 이를 용서 할 수 있을 리 없다.
“보스.”
멀핀 과장이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일할 때만 쓰는 안 경을 여전히 끼고 있다.
“오늘은 즐기라고 했잖아요.”
“하지만.”
손을 드니 그녀가 움찔했고 잠시 기다렸다가 천천히 안경을 들어 그 녀에게 건넸다.
“정말 쉬도록 해요. 그간 우리 모 두 고생했잖아요.”
단원들도 정말 본인들의 한계를 넘 어서 열심히 해주었지만 무대 뒤에 서 서포트를 했던 사무국 직원들이 없었더라면 음악만 아는 바보들은 제때 다니지도 못했을 것이다.
카밀라와 멀핀 그리고 모든 직원이 사소한 일부터 꼼꼼하게 처리해 줬 기에 베를린 필하모닉이 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아질 텐데 지치면 안 되잖아요. 그렇죠, 이자벨 멀핀 부장?”
딴에는 미리 진급 이야기를 말해준 건데 기뻐할 줄 알았던 이자벨 멀핀 이 굳어버렸다.
“멀 핀?”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환청이 들 려서.”
“환청 아니에요. 앞으로 B팀의 역 할이 더 커질 거라 독립적으로 운영 할 수 있게 권한을 늘릴 생각이에요. 그렇게 되면 B팀을 관리할 멀핀의 권한도 늘어야겠죠. 운영진하고는 이야기된 일이니 조만간 정식 공 문이 내려갈 거예요. 물론 그에 따른 적절한 보상도 있을 거고요.”
“보스……
멀핀이 꽤 감격한 모양이다.
분명 유능한 직원이기도 하지만 오케스트라 대전 직전에 과장이 되었는데, 승진 속도가 너무 빠른 느낌 도 없지 않아 있다.
그것을 문제로 삼는 인간이 생기면 좋으련만.
‘빨리빨리 잘라버리게.’
능력 있는 사람들이 적절한 대우를 받고 돈이나 축내는 한심한 가축을 털어버리는 게 경영의 첫 번째 목표 라고 할아버지께서 알려주셨다.
내 생각도 다르지 않으니 이 부분 은 카밀라와 멀핀에게 힘을 실어줘 야 할 듯싶다.
하는 일도 없는 임원들이 너무 많이 가져가니까.
“아무튼 그럼 쉬도록 해요. 이제 슬슬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아, 네. 감사합니다.”
멀핀과 인사를 나누고 단원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