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310화
67. 클래식(9)
암스테르담 로얄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와 런던 심포니의 공연을 관람하고 약속 장소에 모였다.
주먹을 꽉 쥐고 눈을 무섭게 뜬 걸 보니 료코도 즐거웠던 모양이다.
어제 조금은 친해진 기분이라 말을 걸기 전에 무슨 대화를 해야 좋을까 생각했다.
‘재밌었냐고 물어봐도 되겠지?’
‘재, 재미없었다고 하면 어쩌지?’
‘그런 뒤엔 뭘 말하지?’
‘아, 저녁. 저녁 물어봐야겠다.’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재밌었지?”
할 말을 생각하고 마음을 먹으면 말을 더듬지 않아서 좋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료코를 봤는데 그러지 않아도 큰 눈이 더 커져서 깜짝 놀랐다.
착한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직은 조금 무섭다.
“네. ……나윤희 악장은요?”
“나, 나도.”
어쩌지.
갑자기 어리가 하얗게 되서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잊고 말았는데 고맙게도 료코가 말을 해주었다.
“저 말 잘 못하니까.”
“어, 어?”
“신경 써주지 않으셔도 돼요.”
료코의 화난 것 같은 얼굴이 실은 수줍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웃으니 료코도 살짝 뒤로 물러나 곁에 섰다.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 하니 안정된다.
“ 보스는?”
“곧 오겠지. 끄으아! 빨리 연습하 고 싶다.”
단원들을 둘러보니 공연을 보기 전 까지만 해도 다들 지쳐 있었는데 어 느새 기운을 되찾은 것 같다.
다행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다 죽어가던 놈이 무슨.”
“그런 연주를 들었는데 어떻게 가만있냐?”
단원들의 대화에 웃고 말았다.
나도 같은 생각이니까.
암스테르담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들으니 당장에라도 바이올린을 쥐고 싶다.
올해는 결승도, 준결승도 함께할 수 없었지만 다음에는 꼭 그러고 싶다.
“아, 저기 오네.”
누군가의 말에 고개를 돌리니 도빈 이가 오고 있다.
가장 힘든 역할을 맡았으면서도 끝 끝내 결승전에 데려가겠단 약속을 지켜줘 너무나 고마울 뿐이다.
“왜 이렇게 늦었어? 빨리 밥 먹고 연습하러 가자.”
“밥은 비싼 걸로 먹어야겠어.”
다들 의욕적이라 그 모습이 멋있어 보이기도 부럽기도 한데 도빈이가 입을 열었다.
“연습은 됐어요. 돌아가 쉬어요.”
지휘자의 말에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뒤에서 보고 있으니 그 모습이 너무 똑같아 조금 재밌다.
료코도 고개를 숙였는데 같은 생각을 한 것 같다.
“그게 무슨 말이야?”
“생각해 봤는데 좋은 아이디어를 제보 받아서요. 내일은 걱정 말고 푹 쉬어요.”
“정말 혼자 나가게?”
“아뇨. 도와주는 사람 있어요.”
“누구? 브라움 악장?”
단원들이 찰스 브라움 악장을 보았는데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사람들도 모르는 눈친데 어제 소소가 도빈이에게 뭔가 말했으니 아마 소소와 도빈이가 준비한 게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 다들 걱정 말고 쉬어요. 해산.”
단원들은 찝찝해하면서도 동시에 안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배고파.”
배고픈 소소는 예민하니 서둘러야 할 텐데 마침 승희 언니에게서 문자 가 왔다.
“료, 료코도 갈래?”
료코를 부르자 깜짝 놀랬다.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였는데 이유를 몰라 당황하자 소소가 나 서주었다.
“가자, 나카무라.”
“일본에선 이름 부르는 게 예의 아니래.”
“아! 모, 몰랐어. 미안해.”
“아, 아니에요. 예의가 아닌 게 아니라.”
“어, 어?”
“그…….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결국 승희 언니를 만나기 전까지 어색한 분위기를 풀지 못했다.
*
차르르르륵.
잘츠부르크 대축전극장 앞에선 카메라 플래시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전 세계를 10주간 뜨겁게 했던 클래식 음악계의 거장들이 한자리에 모두 모였기에 각 언론에서는 인력을 최대한 풀었다.
아사히 신문의 베테랑 기자 이시하라 린마저 이렇게 치열한 인터뷰 쟁 탈전은 처음이었다.
“제르바 루빈스타인! 올해 결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발터 경! 발터 경! 암스테르담에 게 아쉽게 패하셨습니다. 내년에는 어떤 각오로 나오실 건가요!”
“마에스트로 토스카니니! 이쪽 좀 봐주세요!”
“이이익! 좀 비켜 봐요!”
레드카펫을 지나는 거장들과 단 한 번의 인터뷰라도 따내고 싶었지만 보안 요원과 경쟁자 그리고 무뚝뚝 한 음악가들로 인해 지쳐갈 즈음.
“이시하라 씨, 저기!”
카메라맨이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B 소속으로 홀륭 히 제몫을 소화한 나카무라 료코.
비록 주목받는 인물은 아니지만 일 본 내에서는 비올라의 카리스마로 사랑받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옆에는.
“미스 나! 부상 회복은 아직인가요?”
“결승전과 준결승전에서 출전하지 못한 대신 뒤에서 도왔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히 무슨 일을 맡으셨던건가요!”
“소소 양! 한 번만 웃어주세요!”
단 한 번의 무대로 세계적 스타가 된 나윤희와 왕소소가 함께 있었기 에 더욱 간절해졌다.
“료코! 나야! 나! 이시하라 린!”
그녀의 외침에 깜짝 놀란 료코가 이시하라 린을 쏘아보았다.
‘나 정말 뭐 잘못했나.’
볼 때마다 싫어한다는 느낌을 받은 이시하라 린은 상처 받았지만 애써 무시하곤 살갑게 웃었다.
그랬더니 나카무라 료코가 다가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빨리 지나가야 해서 오래 못 있어요.”
“미안, 미안. 금방 끝낼게. 자, 나 카무라 료코 씨, 우승을 축하합니다. 드디어 수상하는 날인데 소감이 어떠신가요?”
“좋았어요.”
너무도 간단한 대답에 이시하라 린 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자 나카무라 료코가 말을 덧붙였다.
“사실 B팀 안에서는 누구도 우승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도빈 군, 아니, 감독은 아니었지만. 열심히 따라가다 보니 결과 가 좋았어요. 또, 제가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었고요.”
“정말 좋은 경험이었던 것 같네요.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분투중인 나카 무라 료코 씨와의 인터뷰였습니다.”
이시하라 린은 만족하여 정리 멘트를 날린 뒤, 은근슬쩍 마이크를 나윤희에게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나윤희 씨.”
어색한 한국말에 흐뭇하게 지켜보 던 나윤희가 깜짝 놀랐다.
“네, 네. 아, 안녕하세요.”
“의상이 멋진데요? 세 분이 친하신 가요?”
‘어쩌지.’
나윤희는 성급히 나섰다가 나카무 라 료코가 싫어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 네.”
의도대로 인터뷰가 이어져 이시하 라 린은 신이 나 다시금 마이크를 료코에게 돌렸다.
그러자 그녀가 시키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이시하라 린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형태였다.
“나윤희 악장은 제 목표예요. 전 언젠가 나윤희 악장 같은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료, 료코.”
“늦었어.”
입장이 벌써 꽤 지연되었기에 왕소 소가 두 사람을 밀었고 이시하라 린 은 좀 더 두 사람의 관계를 묻고 싶었지만 그 정도로 마무리해야 했다.
“잘 찍었지?”
“그럼요. 아. 준비. 준비.”
카메라맨이 서둘러 카메라를 들자 이시하라 린이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작은 키.
그러나 이 시대 그 어떤 음악가보 다 높은 곳에 위치한 거인이 리무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등장한 순간 모든 언론이 그 에게 집중하였다.
“마에스트로! 슈피겔입니다!”
“마에스트로 배! 그라모폰에서 나 왔습니다!”
“BBC에서 나왔습니다! 배도빈 감독, 우승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스트라드입니다! 베를린 필하모닉 의 향후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도빈아! 누나야!”
안전바 밖으로 필사적으로 뻗은 손 과 목에 선 핏대가 그들이 얼마나 배도빈과의 인터뷰를 따고 싶어 하는지 말해주었다.
그러나 배도빈은 잔뜩 인상을 쓰고 주변을 둘러본 뒤 입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제야 기자들은 배도빈의 귀에 이 어폰이 꽂혀 있다는 걸 발견했다.
베를린의 마왕이 레드 카펫을 지나 대축전극장 안으로 들어서자 언론인들은 잠시 그들의 본업을 잊은 채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겠지?”
“기자 생활 10년 만에 이런 적은 또 처음이네.”
“심지어 다들 조용했잖아.”
“내빈해 주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오늘 진행을 맡은 앙드레 자르제입니다.”
참가자와 관객들은 오케스트라 대 전 기간 내내 사회를 맡았던 자르제 앙드레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그 역시 가장 큰 규모의 클래식 음악 축제를 성공시킨 인물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 13억 8천만 명이 시청해 주셨던 OOTY 오케스트라 대전도 이제 마무리 되었습니다. 오늘은 대 회 기간 내 수많은 기록을 되짚고 참가하신 분들의 앙코르 공연을 관 람한 뒤 시상식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 자르제의 말과 함께 무대 위에 준비된 초대형 스크린에 제1회 오케스트라 대전의 기록들이 비치기 시작했다.
참가자도 관객도 시청자 모두 그 영상으로 인해 지난 10주간의 기억을 다시금 되짚어볼 수 있었다.
1라운드부터 파이널라운드까지 단 한 번의 무대도 지나칠 수 없을 정 도로 수준 높은 공연이었다.
사람들은 특별히 좋아하는 악단의 연주 이외에도 여러 오케스트라를 경험하면서 시야를 넓힐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삶이 달라지니.
그것만으로도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은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의 주 최 의도를 수행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음은 내년 OOTY 오케스트라 대전에 변경되어 적용될 사항을 안 내해 드리겠습니다.”
자르제의 말은 몇몇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운영 직원들에게만 전해졌을 뿐, 대다수의 시청자는 그 뒤에 있을 축하 공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정말 오래 기다리습니다. 곧장 오 늘 밤을 빛내주실 분들을 만나보도 록 하지요. 런던 심포니와 런던 필하모닉 입니다.”
런던 필하모닉과 런던 심포니의 콜 라보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완벽 한 지휘와 더불어 대회의 품격을 한층 더 높여주었다.
빈 필하모닉은 요제프 슈트라우스 의 천체의 음악'(Sphärenklänge op.2 35)을 연주해 별들의 전쟁이라 불렸던 오케스트라 대전의 마지막 밤을 아름답고 웅장하게 노래했다.
“다음은 마에스트로 마리 얀스와 암스테르담의 실내 관현악단입니다.”
그리고 소규모 편성으로 나온 마리 얀스는 놀랍게도 그의 손자 아리엘 얀스를 독주자로 내세워 비발디의 겨울을 지휘하였다.
아리엘의 비현실적인 외모에 한때 난리가 났던 채팅창은 강인하면서도 기품 있는 심상에 말을 잃고 말았다.
관객들은 본 무대 이상의 열정으로 마리 얀스와 암스테르담 그리고 아 리엘에게 감사를 표했다.
흥분이 가라앉고 사회자가 나섰다.
무대 위에는 피아노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눈치가 빠른 사람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마지막 차례인 베를린 필하모닉에 서 피아노를 두고 나머지 악기를 치 웠다면, 그 의도는 쉬이 유추할 수 있었다.
“정말 환상적인 무대였습니다. 다음은.”
카드를 확인한 자르제는 밝게 웃으며 모두가 기다렸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다음은 베를린 필하모닉을 대표해 마에스트로 배도빈의 협주가 있겠습니다.”
객석에 앉은 모든 이의 얼굴이 더 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해졌다.
함께한 이들과 눈을 마주하고 기쁨을 확인하거나 손을 잡았다.
이윽고.
애타는 관객들을 달래기 위해 배도빈이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