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309화
67. 클래식(8)
“우승했다고 얼굴이 폈구만.”
“아, 가우왕 씨.”
“그래.”
최지훈과 대화하는 도중 가우왕이 찾아왔다.
최지훈과 인사를 나눴는데, 지금까지 녀석을 대하던 모습과 사뭇 달랐다.
관심 없는 인간과는 눈도 안 마주 치고 그나마 인정하는 사람에게도 눈길을 줄 뿐이었는데 악수까지 나누니 뭔가 신기해 보인다.
전에도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팬을 대한다는 느낌이었는데 확실히 뭔가 가우왕 안에서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듯하다.
“뭘 그렇게 봐?”
“왜 여기 있어요?”
“무슨 말이야?”
바쁘다고 하면서 오케스트라 대전 일정 내내 잘츠부르크에 붙어 있는 걸 보면 실은 한가한 모양이다.
“한가해 보여서요.”
“누구 때문에 남았는데!”
“ 아.”
열렬한 팬에게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래요.”
반성하고 있자 가우왕이 황당하다는 듯 최지훈을 보며 불평을 해댔다.
“……야, 얘 때려도 되냐?”
“하핫. 도빈이가 너무 했어요.”
최지훈과 가우왕이 차를 주문하고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할멈이 네 이야기하더라.”
“ 네?”
“지메르만.”
나는 최지훈의 저런 표정 처음 본다. 밑도 끝도 없는 바보를 보는 얼 굴이다.
“크리스틴 지메르만 선생님을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난 그래도 돼.”
가우왕은 피아노를 잘 못 다뤘다면 분명 굶어 죽거나 맞아 죽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지훈이는 왜요?”
“뻔뻔하고 재수 없지만 재능 있는 사람은 좋아하거든.”
스승이라더니 둘이 똑 닮은 모양.
최지훈의 표정이 밝아졌다.
“저도 기회가 된다면 꼭 만나 뵙고 싶어요.”
“그럴 거 같아서 말해준 건데, 만나지 마. 가능한 평생.”
가우왕이 진심으로 불평을 해댔다.
“꼰대도 그런 꼰대가 없어. 내가 그 마귀할멈 밑에서 2년간 타건 연 습만 한 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행여나 같이 피아노 배우자 고 하면 당장 도망쳐.”
가우왕의 타건이 그렇게 빠르면서도 정확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또 이미 여러 국제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던 실력자에게 2년간 타건 연 습만 시켰다는 사실만으로도 크리스 틴 지메르만이란 피아니스트가 얼마 나 철저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해서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셨잖아요.”
최지훈의 말에 쉼 없이 중얼거리던 가우왕이 멈췄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그건 내가 잘나서야. 게다가 지금 넌 누구의 가르침이 필요할 때가 아냐.”
“음. 생각해 볼게요.”
“그래.”
내 생각에도 이미 최지훈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이를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지 오래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가 먼저 나서서 봐줬을 테니 크리스틴 지메 르만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최지훈 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은 없었으면 한다.
“그나저나 베를린은 내일 뭐 하냐?”
“집에 가야죠.”
“뭔 소리야 이건 또. 앙코르 무대 서야 할 거 아냐. 못 들었어?”
기억을 더듬으니 아닌 것 같으면서 도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당장 언제까지 준비해야 하는 정도는 신경 썼지만 대회 스케줄이나 약 관 따위 관심 밖인 게 당연하다.
-빠바바밤! 빠바바밤!
마침 멀핀에게서 전화가 왔다.
두 사람과 대화하다 보니 벌써 시간이 꽤 흐른 모양이다.
“베토벤 C단조를 벨소리야? 중증이네.”
“저도 신기했는데 잘 들려서 의외로 좋아 보이더라고요.”
가우왕과 최지훈의 대화를 무시하곤 전화를 받았다.
“네, 멀핀.”
-단원들 다 모였어요. 곧 출발하실 거죠?
“그래야죠. 그런데 내일 공연해야 하는 게 사실이에요?”
-네. 대회 시작 전에 안내해 드렸는데 잊으셨나 보네요.
우승 이외에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어차피 번외라서.
“그럴 순 없죠. 지금 내려갈게요.”
통화를 마치고 일어났다.
“가자. 가우왕도 갈 거죠?”
“그래야지.”
로비로 내려가자 단원들이 모여 있었다.
어제 연회의 여파가 상당해 퀭한 안색은 기본이고 서 있기도 버거워 보이기도 한 사람도 있다.
“보스……
“도빈이다……
“오늘은 쉬면 안 될까?”
“안 돼요.”
경험이 부족한 이들에게 런던 심포 니와 암스테르담 오케스트라와 같은 완성도 높은 연주만큼 좋은 공부도 없다.
더군다나 C팀이 꾸려지게 되면 그 럴 여유가 더 없어지니 이번 기회를 놓칠 순 없다.
내년에는 다른 오케스트라도 더욱 발전해 나올 테니 말이다.
“내일 앙코르 무대도 올라야 하잖아요. 연주회 듣고 저녁 먹은 다음 짧게라도 맞춰볼 거니 다들 힘내요.”
“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다 죽어가던 단원들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달려들었다.
어깨를 붙잡고 흔들거나 거의 울기 직전인 얼굴로 현실을 부정하는 중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일은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잖아! 번외라고!”
“번외라도 무대에 오르는 일이에요. 대충 넘기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단호히 말하자 날 붙잡고 있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노이어 수석 말이 맞았어.”
“무슨 말이요?”
“……악마라고. 끄으윽. 나 진짜 쉬고 싶어. 끅.”
“자고 싶어.”
가만 듣고 있자니 조금 불쌍해지기 도 하다.
“늦겠어요! 우선 서둘러 가죠.”
때마침 멀핀 과장이 재촉해 공연장으로 향하는데 가우왕이 단원들을 둘러보곤 한마디 했다.
“거의 시첸데?”
“일정이 빠듯했으니까요. 두 달 내내 쉬지 않고 달렸는데 지칠 만하죠.”
최지훈이 거들었다.
확실히 매주, 후반에는 며칠에 한 곡씩 준비해야 하는 일정 때문에 베를린뿐만 아니라 다른 악단도 무리 하긴 마찬가지였다.
보통은 연주의 완성도를 위해 두 달 이상 준비해야 하는 신곡들을 단 기간 안에 준비해야 했으니.
완성도가 떨어지는 게 불만이긴 했지만 지금까지 잘 따라와 준 단원들 도 한계를 넘어섰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공연장에서 만난 푸르트벵글러와 사카모토에게 했더니 한쪽이 노발대발했다.
“단 한 번이라도, 어떤 무대라도 최선을 다해야지!”
맞는 말이다.
“껄껄. 하지만 정상적인 일정은 아니지 않은가.”
사카모토 료이치의 말도 맞다.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라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사카모토가 슬쩍 제안했다.
“어차피 어떤 형태든 상관없다면 도빈 군이 독주를 하는 건 어떤가.”
“독주요?”
사카모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다들 얼마나 바라는지는 결승무대에서 솔로로 나섰을 때의 반응 으로도 알 수 있지. 연주자로선 오래 쉬었으니 괜찮은 방법 같은데.”
“저도요! 저도 보스의 독주 듣고 싶어요!”
“야, 너도?”
“나도! 나도!”
사카모토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단원들이 달려들었다.
“아닌 거 같은데.”
“상황이 이상해서 그래! 진짜야!”
단원들을 의심스럽게 보는데 소소가 내게 다가와 손짓을 했다.
귀를 빌려달란 말 같아서 가까이 가니 그녀가 재밌는 발상을 전해주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라 가능한 일인지 알아봐야 할 듯해 멀핀 에게 부탁하니 3, 4위전이 끝나기 전까지 알아봐 놓겠다고 믿음직하게 나섰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재밌을 것 같은 모양이다.
‘멀핀 연봉은 확실히 올려줘야겠어.’
이번 오케스트라 대전에서 이자벨 멀핀 과장이 없었더라면 상당히 불편했을 테고.
그녀의 처우는 분명 개선해 줘야겠다.
‘다른 단원들도.’
나와 푸르트벵글러를 비롯해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 명성과 달리 연봉 문제에 있어서는 그리 취급이 좋지 못했다.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가장 많은 수익을 올리는 디지털 스트리 밍 서비스가 활성화되지 못했던지라 재정 문제가 심각해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의 베테랑 연주자들에게 어울리는 액수는 아니었다.
다른 오케스트라였다면 적어도 수 석급인 A팀 단원들의 평균 연봉이 10만 유로(한화 약 1억 2,700만 원)였고 수석급이 11만 유로.
B팀은 6만 유로에 수석이 8만 유 로로 책정되었는데.
그들의 연봉은 평균을 맞춰주긴 했지만 문제는 수석급부터 시작되는 ‘양보’에 있었다.
수석, 악장단에 이르러서는 재정 문제로 인해 본인들이 크게 양보해 표준이라는 ‘1:4:20=단원:악장:지휘 자’ 룰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악장 중에서 최고참인 케르바 슈타
인의 연봉이 24만 유로, 푸르트벵글러는 89만 유로로 베를린 필하모닉 은의 구성력은 수익보다는 개인의 자부심과 소속감에 기대고 있었다.
푸르트벵글러와 악장들의 희생으로 일반 단원들의 연봉을 확보하지 못 했더라면 아마 수십 년간 이적이 없었던 대기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레몽 도네크란 예외가 있긴 하지만).
‘지금 돈 잘 벌잖아. 보상을 해줘 야지.’
하지만 디지털 스트리밍 서비스가 활성화된 지금 이 문제도 분명 짚고 넘어갈 문제다.
그런 생각과 하고 있자니 어느덧 암스테르담 오케스트라가 준비를 마 치고 있었다.
“마에스트로!”
이어서 나온 마리 얀스.
여전히 순백의 정장을 입고 머리를 차분히 뒤로 넘긴 그가 포디움에 올랐다.
곧 그의 모차르트가 연주되기 시작 했고, 암스테르담만의 담백하면서도 차분한 카리스마가 콘서트홀 안에 모인 관객들을 녹였다.
‘ 아아.’
절제의 미학.
마리 얀스가 지휘하는 암스테르담 로얄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는 정말이지 장인이 세공한 보석과도 같다.
아름다움을 목도한 이들이 느끼는 경외와 경애, 애타게 갈구할 수밖에 없는 그 감정을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가장 완벽한 형태로 선보인다.
그것이 암스테르담의 연주자들로 인해 빛을 반사했을 때 생기는 빛의 스펙트럼은 왜 저들이 지난 수십 년 간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세계 최 고의 오케스트라로 군림했는지 알 수 있는 근거였다.
‘가장 명확한 이유지.’
확실히 완성도에 있어서는 베를린 A와 빈 필, 런던 심포니와 더불어 최고 수준이다.
“브라보!”
연주가 끝나자 마음이 동한 이들이 일어났다.
마리 얀스를 연호하는 목소리와 손 뼉 치는 소리에서 그들이 얼마나 행 복한지 느낄 수 있었다.
대기 시간을 두고.
런던 심포니가 무대에 올라섰다.
마리 얀스 못지않은 환호를 받으며 등장한 브루노 발터가 준비한 곡은 슈만.
런던 심포니는 놀라운 수준의 현악기로 농밀한 감성을 표현, 지친 몸 과 영혼을 달래주었다.
이들도 암스테르담도 대회라는 규격이 아니었다면 3, 4위에 절대 만 족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칼을 갈고 있을 것이다.
마치 그 당시의 빈처럼.
오케스트라 대전을 온몸으로 느끼 고 있자니 수많은 천재들이 치열하게 경쟁했던 당시의 빈으로 돌아간 듯했다.
이렇게나 훌륭한 음악가들이 함께 하는데 클래식이 무너질 거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