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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306화 (306/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306화

    67. 클래식(5)

    베를린 필하모닉 B가 무대 위에서 마지막 점검을 끝냈다.

    오보에의 음에 맞춰 조율을 확인한 이들의 얼굴에는 비장함마저 깃들어 있었다.

    “마지막 무대라 그런지 평소보다 집중한 느낌이지?”

    “그러게. A도 B도 진심이라 다행이다.”

    “근데 저 잡동사니는 다 뭐래?”

    “글쎄. 뭐, 필요하니 가져다 놓은 거 아니겠어?”

    그 모습을 확인한 관객들이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의 마지막 공연에 대한 기대심을 잔뜩 키웠다.

    이윽고.

    베를린의 마왕이 모습을 드러내자 열정적으로 반응했다.

    “도빈 군!”

    “마에스트로!”

    그들은 마왕을 향한 사랑을 숨기지 않았는데, 최고의 상대를 맞이해 그 가 어떤 연주를 들려줄지 너무도 설 렜기 때문이었다.

    지금에야 여러 시도를 하고 있지만 배도빈이 사랑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폭력과도 같은 심상이었다.

    얌전한 음악을 즐기던 이들에게 배도빈의 원초적이고 파괴적인 연주는 거부할 수 없는 강제력을 띠고 있었고 가슴에 때려 박히는 음표들에 모 두, 배도빈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를 마왕이라 불리게 한 이유였고 팬들이 그의 연주회를 찾는 이유였다.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관객들은 결승 무대에서 이번에야말 로 배도빈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마지막 작품, 교향적 무곡을 어떻게 들려줄 지.

    이번에는 또 어떤 폭력으로 자신들을 조교할지 떠올리면 애탔다.

    배도빈이 돌아서 자신의 악기들을 둘러보았다.

    ‘ 좋아.’

    마왕이 지휘봉을 내밀자 제1바이올린과 관악기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신비하고도 음산한 분위기.

    원곡과 다르지 않은 시작이었다.

    음이 잦아들고.

    배도빈이 힘차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모든 악기가 노래하기 시작했고 관객들은 마치 마왕성으로 향 하는 흉흉한 대문을 보는 듯한 착각 에 빠져 버렸다.

    저 멀리.

    마왕의 위엄 넘치는 성이 보였다.

    높이 솟은 탑과 검푸른 벽돌.

    날카롭게 솟은 깃발과 푸른 계통의 스테인드글라스.

    은은한 조명 아래 마왕성은 위세롭 고 엄숙하게 웅거하고 있었다.

    피셔 디스카우의 힘찬 팀파니로 인 해 마왕성을 맞이한 관객들의 두려 움이 더욱 고조되고.

    달빛만이 비추는 길에 놓인 관객들 은 악마들 사이에 끼어 어쩔 수 없이 성으로 향해야만 했다.

    박쥐가 날아올라 마왕을 칭송했고.

    길옆의 나무가 마귀로 변해 가지손을 흔들어댔다.

    아름다운 몽마가 관객들을 비웃었고 그 기괴하고도 매력적인 심상에 관객들은 점차 홀릴 수밖에 없었다.

    선 굵은 멜로디 사이마다 등장하는 트라이앵글과 탬버린 소리는 작은 악마처럼 관객 주변에서 빛났다.

    ‘들어가라.’

    배도빈이 두 팔을 앞으로 쭉 밀었다.

    바순과 색소폰, 플루트가 끝도 없이 펼쳐진 복도의 융단과 벽에 걸린 촛대를 표현했다.

    마왕성의 위압적인 외관과 달리 고풍스럽다.

    베를린 필하모닉 B가 펼쳐낸 심상 에 빠져든 관객들의 마음에 어느덧 두려움 대신 설렘이 깃들었고.

    바이올린의 아름다운 선율에 따라 마왕성으로 끌려 온 이들의 옷이 조 각처럼 떨어져 나갔다.

    음을 이어받는 첼로.

    사라진 옷을 대신해 드레스와 턱시 도를 입혀주었고 새로운 기분으로 복도 끝에 이르렀을 때.

    마왕이 두 팔을 높이 들었다.

    오케스트라의 음량이 폭발적으로 커지면서 마침내 기나긴 복도의 끝이 열리고.

    관객들은 마왕을 맞이했다.

    트럼펫 소리가 높이 솟고.

    큰북과 작은북, 튜바가 마왕의 위 엄을 떨친다.

    ‘ 아아.’

    더없이 몰입한 이들이 두려워하고 있을 때.

    음이 잦아들었다.

    이내 고요함만이 남고.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1악장이 끝났다.

    그 뒤 어떤 연주를 들려줄지 관객 들은 애달파 간절해질 정도였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르고.

    정적을 깬 것은 구두굽 소리였다.

    지휘자 배도빈이 발을 굴러 딱딱 소리를 냈고.

    전혀 생각지 못했던 전개에 전 세 계 모든 이가 의아해하는 순간, 관 악기가 불길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가운데 등장한.

    아름다운 멜로디.

    얼어붙을 것만 같았던 콘서트홀을 녹여 버리고 말았다.

    어리둥절한 관객들 사이로.

    마왕의 위엄 넘치는 모습이 드러나고.

    리드미컬한 소리 사이로.

    타악기가 전면에 나섰다.

    현악기의 우아하고도 치명적인 연주에 맞춰 들리는 갖은 소리들은 마 치 춤을 추는 사람들이 내는 발소리 처럼 들렸다.

    ‘ 찬양하라.’

    ‘기뻐해라.’

    ‘마왕께서 타락을 바라신다.’

    지금까지의 교향적 무곡과는 전혀 다른 전개가 펼쳐졌다.

    멜로디의 높이 차이를 더욱 강조하고 빠르게 전개하며 보다 열정적으로 변한 현악기를 배경으로.

    타악기들이 춤추기 시작했다.

    탬버린과 트라이앵글이 소악마의 익살스러운 날갯짓을 표현했고.

    큰북과 작은북이 철갑을 두른 기사들이 창으로 땅을 찍는 것처럼 울렸다.

    자동차 휠과 솥뚜껑이 울릴 때는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관객들은 정말 미지의 악마가 춤추는 듯한 기분을 느꼈고.

    타악기가 전면에 나선 신선한 분위 기에 점차 취해갔다.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강하게 등을 떠밀어내니 마왕성에 초대된 가련한 관객들은 저도 모르게 춤추기 시작했다.

    마음이 요동쳤다.

    그 과정에서 사카모토 료이치 역시 베를린 필하모닉이 안내한 마왕성에 서 춤을 추었다.

    더할 수 없이 기뻐하고 있었다.

    ‘마치 멜로디가 있는 난타 공연을 보는 듯하군.’

    느낌은 전혀 다르나 배도빈의 베를린 필하모닉은 우아함을 유지하는 가운데 갖은 도구를 활용해 신비로 운 분위기를 표현하며 파티를 열었다.

    마치 악마에게 홀린 듯이 잘츠부르크 대축전극장에 앉아 있는 관객들 의 어깨가 꿈틀댔다.

    이미 속으로는, 마왕성 안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

    배도빈이 다시 한번 발을 굴렀다.

    두 번의 구두굽 소리가 울리자.

    현악 주자들이 마왕을 따라 발을 여러 번 굴렀다.

    단 여덟 번의 짧은 행동이었지만 관악기와 타악기의 연주와 어울려 정말 무도회장에 온 것만 같이 느껴 졌다.

    비로소 관객들은 체면을 떨쳐 버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박자에 어울리기 시작했다.

    사카모토 료이치는 이제 정말 크게 웃고 싶었다.

    이렇게 즐거운 연주회가 또 있었을까.

    베를린 필하모닉 B의 연주회는 정말 마왕성에서 펼쳐지는 파티를 보여주는 듯했다.

    신비롭고 불길하면서도 빠져들 수 밖에 없는 멜로디와 유혹하는 악마들 그리고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춤 추고 싶은 그의 마음이.

    베를린의 마왕에게 영혼을 빼앗긴 것처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러한 마음은.

    현장을 찾은 이들은 물론 디지털 스트리밍으로 시청하고 있던 팬들도 마찬가지였다.

    악마들에게 농락당해 감정이 동하는 모습이 마치 춤을 추는 듯했다.

    이대로 계속 춤추고 싶다고.

    진정 그리 바랐다.

    ♪♫♬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는 끊어지 지 않았다.

    2악장과 3악장을 바로 연결하면서 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배도빈은 2악장 내내 격렬하게 춤췄던 타악기를 배제하고 트럼펫의 힘찬 소리를 넣었다.

    그리고.

    해석이라고 할 수 없이.

    위대한 음악가의 원곡을 무참히 개 조해 버린 베를린 필하모닉만의 3악 장이 시작되었다.

    분위기를 반전시킨 트럼펫 소리에 뒤이어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 이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대화하기 시작했다.

    찰스 브라움이 이끄는 제1바이올린 이 마왕을 칭송했고.

    왕소소가 이끄는 제2바이올린이 제 1바이올린의 멜로디를 반전해 노래 하며 긴장감을 더했다.

    ‘무슨 일이지?’

    지금까지 마왕을 칭송하며 춤추고 노래했던 다른 악기들이 일순간 멈 춰 눈치를 본다.

    관객들도 마찬가지.

    두 천재 바이올리니스트가 이끄는 신하들의 싸움이 치열해졌을 때.

    관객들은 또다시 의외의 상황에 깜 짝 놀랐다.

    누구나 아는 남자가 무대 위로 올라 왔기 때문.

    뚜벅. 뚜벅.

    밝은 금발을 단정히 묶어 넘긴 베를린 필하모닉의 고문, 니아 발그레이는 구두 소리를 감추지 않고 연주가 되는 도중 지휘단으로 향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

    그의 손에 들린 베를린의 보물을 눈 치채기까지 그리 긴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니아 발그레이가 건넨 캐논을 받아 든 배도빈은 잠시 지휘봉을 내려두고 두 악장이 이끄는 격렬한 대화 사이에 섰다.

    대포와도 같은 폭음.

    장대비보다 빠르게 떨어지는 폭주.

    마왕의 강림과 함께 격돌하던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이 멈추었다.

    손과 발끝에서 돋아나는 전율이 등 과 어깨를 타고 관객들의 머리를 관통하는 순간이었다.

    압도적인 존재감에 짓눌릴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에 떠는 악마 중에서 패배를 시인한 제1바이올린이 캐논의 노래를 따르기 시작했다.

    제2바이올린과 비올라가 함께했고.

    피셔 디스카우의 폭발적인 팀파니와 함께 모든 악마가 캐논을 따랐다.

    말 그대로 즉위식.

    배도빈이 연주를 멈추고 캐논을 내려놓자 마치 왕좌에 앉은 듯했다.

    마왕은 지휘봉을 대신해 활을 휘둘러 만마가 내는 갖은 소리를 웅장한 노래로 바꾸어놓았다.

    잡동사니로 난타 공연을 보여주는 듯한 모습과.

    발을 굴러 춤추는 효과를 냈던 것에 이어 니아 발그레이를 통해 캐논을 전달받는 과정까지.

    베를린 필하모닉이 선보인 극적인 연출과 매혹적인 연주에 관객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영혼을 가져가달라고.

    제발 이곳에 영원히 함께 있게 해달 라고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마왕이 마침내 두 팔을 번쩍 들어올 려 주먹을 쥐었을 때.

    그의 땀이 조명에 닿았다.

    마왕은 분명 웃고 있었다.

    더없이 맑고 순수하게 자신의 음악 이 온전히 연주되었음에 기뻐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전 세계 5억 명의 시청자 들의 가슴에 깊게 새겨진 순간.

    세계는 마왕의 군세에 정복당해 버렸다.

    “브라아보!”

    왕좌를 강탈한 마왕을 향한 감격의 환호와 박수가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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