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305화
67. 클래식(4)
OOTY 오케스트라 대전 파이널라 운드 시작 5분 전, 뉴튜브, 웹플릭 스, JH씨네마 그밖에 140여 국가의 유력 방송 매체를 통해 동시 중계되 고 있는 시청자의 합은 이미 2억 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것은 클래식 음악계가 전에 없는 수준으로 확장된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였으며, 새 시대의 찬란한 미래를 비추는 듯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어마어마 하네.”
히무라 쇼우는 기사를 훑어보며 고 개를 저었다.
이 기세라면 정말 클래식 음악 역 사에 대기록을 작성할 것만 같았다.
“파이가 달라졌지. 더 이상 이 업 계가 무너질 거라 걱정하는 사람은 없어.”
나카무라 이데는 다소 감성적이 되 어 무대 위 대형 스크린을 보았다.
베를린의 두 상임 지휘자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는데, 그중 한 명과는 특히나 연이 깊었다.
그것은 갑자기 찾아온 일이었다.
엑스톤의 기획팀에서 넘긴 자료를 확인했을 때만 해도 나카무라와 히무라는 뛰어난 음악가를 잡아야 한 다는 생각에 무작정 연락.
한국으로 향했다.
나카무라는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정말 이 아이가 만들었다고?’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소년이라 할 수도 없었던 조그만 아이는 나카무라 앞에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악보를 채워나갔다.
그로부터 15년이 흘러.
소년은 당당히 세계 정상에 자리에 서 최고의 음악가로 찬양받고 있었다.
희망이라 불리던 별은 정말 그 이름처럼 단지 음악만으로 여러 사람 의 인생에 영향을 주었다.
그만이 경직되어 마를 일만 남았던 클래식 음악계에 이렇게 많은 이가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였다.
“정말 신기해.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결국 해내잖아. 도빈이를 보고 있으면 뭐든 가능하겠다 싶다.”
히무라의 말에 나카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체가 마비되고 절망에 빠졌던 그는 몇 번이고 삶을 포기하고 싶어졌다.
그의 반평생을 바쳤던 이바라키의 엑스톤마저 매각되어 단순 유통업체가 되었을 땐 세계가 그에게 그만 포기하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카무라가 강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료코뿐이었고 유일한 안식처는 배도빈의 바이올린이었다.
“그래. 이번에도 기적을 보여주겠지.”
나카무라는 진실로 배도빈이 이끌어갈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줄 거라 믿었다.
무대에 베를린 필하모닉 A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랄까 좀…… 무섭지 않아?”
진달래가 눈매를 좁히며 나윤희에게 물었다.
“응……
나윤희도 같은 생각이었는데, 오케스트라의 카리스마라 불리는 베를린 필하모닉이지만 오늘따라 기세가 더 흉흉했다.
“공연 전에도 티격태격하더니 정말 진심으로 할 건가 보네. 언닌 어디 응원해? 역시 B팀이야?”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오늘 결승 무대에 함께하지 못하여 너무도 분하고 답답하면서도 동시에 누구보다도 함께 고생한 B 팀 단원들이 우승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상대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세계 최고 수준의 연주자들.
각 개인의 기량만으로도 충분히 솔로로 성공할 수 있음에도 베를린 필하모닉에 남아 오직 완벽한 하모니 만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이들이었다.
“마에스트로!”
“빌〜”
마침 40년간 제국을 지배했던 폭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관객들은 반가움을 감추지 않고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가장 위대 한 지휘자를 반겼다.
그러한 환호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당당한 걸음, 멀리서도 느껴지는 그의 무게감은 폭군이 어떤 존재 인지 말해주었다.
살아 있는 전설.
세 방향으로 엄숙히 고개를 숙인 푸르트벵글러가 뒤돌자 콘서트홀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결승 무대를 위 해 준비한 최고의 무대.
마침내 4억 명을 돌파한 시청자 모두 가슴을 열고 기다렸다.
푸르트벵글러가 두 손을 힘차게 찍어 올리자 영광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현악부와 관악부, 타악부 모두 행진의 시작을 알렸고 오보에가 기품 스러운 왕자의 모습을 비추었다.
은빛 갑주를 입고 투구를 허리에 낀 당당함 뒤에 시종과 근위대가 함께해 절도 있게 발을 맞춘다.
팀파니가 천천히 걷는 말굽 소리를 들려주었고.
영명하게 나선 이들은 마침내 궁 앞에 이르러 행진을 멈추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백성들이 왕자과 기사들의 고상함에 감탄하기 시작한다.
바이올린이 속삭이는 소리는 조심스럽게 백성들의 칭송을 대신하였다.
‘우리 왕자님 얼마나 늠름하신가.’
‘정말 대단하시지. 이번에는 또 무 슨 일을 해내시고 돌아오셨을까?’
‘ 이크.’
백성들의 대화가 잦아들고.
근위대가 창을 높이 들어 땅을 찍었다. 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퍼지듯이 베를린 필하모닉의 관악기와 타 악기가 점차 소리를 높였다.
‘북방을 점령하고 왔소!’
자랑스러운 왕자가 정벌을 마치고 귀환했음을 알리는 그 소리에 백성들이 다시금 환호했다.
광대들이 나서 흥을 돋운다.
비서로 종군했던 남작이 왕자의 공을 읊을 때마다 백성들의 칭송이 반 복되었고 마침내 그 목소리가 닿아.
왕성에서 위엄 넘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 나온다.
만백성과 신하들이 고개를 조아려 왕을 영접하자 폭군이 벼락같이 왕 자를 꾸짖는다.
‘왕자여, 어찌하여 병사를 잃었느 냐!’
‘왕자여, 어찌하여 동방을 두고 돌아왔느냐!’
왕과 왕자 사이의 갈등이 반복, 고조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관객들을 긴장하게 하였다.
‘이러려고 도장조를 선택했구만.’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베토벤 교향곡 8번을 듣던 사카모토 료이치는 빙그레 웃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는 마치 큰 공을 세우고 개선한 왕자와 더 큰 공을 세우지 못했음을 꾸짖는 왕의 만남과 같았다.
그 갈등은 베를린 필의 뛰어난 표 현력으로 관객들을 조마조마하게 하였으나 마침내 더욱 크고 힘찬 멜로디와 함께 왕과 왕자가 서로를 끌어 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승은 절대 넘겨줄 수 없다고 말 하지만, 최고의 자리에서 왕위를 물 려주고 있는 벗의 연주를 들으며 사카모토 료이치는 처음으로 그를 부러워했다.
만약 자신이 빈 필하모닉에 남아 지휘자로 계속 있었다면 저럴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 본인이 추구하는 음악이 따로 있었기에 만약은 만약일 뿐.
사카모토 료이치는 이 기품 있고 아름다우며 영광스러운 음악을 진실로 축복하였다.
한편.
푸르트벵글러의 의도를 모를 리 없는 배도빈은 대기실에서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마음에 감격하면서도.
혹시나 그가 너무 빨리 은퇴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마냥 반갑 지만은 않았다.
첫 번째 삶에서 만들어 둔 아홉 개의 교향곡.
여러 악단이 연주한 곡을 들었으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보다 그를 충족시키는 오케스트라는 없었다.
당시 배도빈의 의도를 고스란히 녹여, 현대인들이 보다 잘 느낄 수 있도록 연주하는 격정의 심포니.
규정하길 좋아하는 학자들은 라이든샤프트의 시작을 배도빈으로 이야 기했지만, 그 자신이 항상 말해왔듯.
음악사는 어느 한 명에 의해 바뀌지 않았다.
배도빈은 지난 수십 년간 쌓아온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하모닉이야말로 라이든샤프트 세대의 밑바탕이 되어주었다고 여기며.
현대에도 자신의 뜻을 온전히 펼쳐 준 그들에게 깊게 감사했다.
‘식단 관리랑 금연만으로는 안 되겠어. 강제로라도 운동을 시켜야지.’
배도빈은 푸르트벵글러를 더 건강히 할 생각을 하며 기분 좋게 자신이 만든 여덟 번째 곡을 감상했다.
♪♫♬♪♫♬
베를린 필하모닉 A의 연주는 이제 후반부에 이르렀다.
고풍스러우면서도 드높은 기상을 펼친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에 관객과 시청자 그리고 음악인들은 하나같이 가슴이 뛰었다.
‘베토벤 8번이 이렇게 좋았었나?’
‘진짜 미쳤다. 심장아 작작 좀 뛰 어.’
‘과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인가. 리듬을 완벽하게 조율해 멜로디가 부각되었어. 이런 연주를 듣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지.’
마침내 트럼펫과 함께 마지막 음이 울리자.
콘서트홀은 격한 감동을 주체하지 못 한 관객들로 인해 환희로 가득 찼다.
“브라보!”
그 가운데에서 또 다른 전설 마리 얀스의 눈과 입가에는 주름이 짙어 졌다. 더없이 훌륭한 연주에 기뻤기 때문이고 베를린 필하모닉 A가 클래식 음악의 정수를 들려주었기 때 문이었다.
멜로디의 변형 없이 악보에 충실하 나 박을 연결시키고 떼어놓으며 박 자를 가지고 놀아 결국에는 리듬이 더욱 활동적이게 되어 연주 전체의 활력을 준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는 공교롭게도 마리 얀스와 런던발 오케스트라가 지향하는 것과 유사했다.
그것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연주 자 집단이라는 베를린 필하모닉이 해내니 그 완성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왕관을 넘겨주진 않았지.’
마리 얀스는 왕이 이제 막 왕관을 들어 왕자 앞에 선 클라이맥스에서 끝난 모습을 상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갈 테면 스스로 가져가란 뜻 이겠지. ……자네가 정말 부럽네. 푸르트벵글러.’
마리 얀스는 멀리 북미 대륙에 있는 손자를 떠올리며 아쉬워했다.
빛나는 재능을 지닌 손자 아리엘이 처음부터 오케스트라와 접하며 성장 했다면 그 역시 푸르트벵글러와 같이 자신의 자리를 손자에게 물려줄 수 있을 거라는 안타까움이었다.
그러나 가장 분하고 슬픈 일은 따로 있었다.
‘두 사람이 경쟁해 그려갈 미래를 함께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당장 내년을 기약할 수 없는 늙은 육체가 마리 얀스를 괴롭혔다.
그러한 마음은 그뿐만이 아니라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사카모토 료이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브루노 발터 등과 같은 시대를 풍미한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은 더욱 발전할 미래의 음악의 편린뿐.
베를린 필하모닉 A가 물러나고 20 분 뒤.
무대 위에 오르는 젊은 연주자들을 보며 마리 얀스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한편.
선배들의 연주를 들은 B팀 단원들 은 기세가 한풀 꺾였다.
암스테르담을 한 번 넘어섰던 경험 과 결승 무대 전 두 상임 지휘자와 의 대담으로 한껏 달아올랐던 그들 이 듣기에도 人팀의 연주는 완벽했다.
더 이상 어떻게 더 잘할 수 있을 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기에 단원들은 말없이 악기를 챙겼다.
그럴 때, 제2바이올린 수석이었던 나윤희가 악장직을 수여받고 부상으로 빠지면서 생긴 공백을 채운 왕소 소 악장이 문 앞에 섰다.
이제 무대 위로 올라가야 하거늘.
단원들은 그녀를 의아하게 보았다.
“관객들에게 그런 얼굴 보여줄 거야?”
평소 드라마 시청과 식사, 수면에 만 관심이 있고 말수가 적었던 소소였기에 단원들은 소소의 일침을 더 크게 받아들였다.
나윤희의 열연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B팀은 배도빈을 제 외한 나머지 단원 중 오케스트라 대 전에서 가장 많은 스케줄을 감당한 사람이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배도빈 지휘자보다도 작은 악단 내 최단신인 왕소소 악장도 그러한 고 초를 감내하고 힘을 내고 있거늘.
젊은 단원들은 다시 한번 마음을 고쳐 먹었다.
“좋아.”
한결 나아진 얼굴들을 확인한 소소 가 대기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자 잠시 뒤, 악장실 문이 열리며 찰스 브라움이 합류했다.
‘잔뜩 쫄아 있을 줄 알았는데 제법 이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협박과 배도빈의 협박보다 무서운 제안으로 갑작스레 솔로 활동을 접고 입단한 그였으나.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는 단원들을 보며 조금씩 그도 베를린 필하모닉에 정을 붙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래야 할 맛이 나지.’
배도빈 이외의 음악가는 인정하지 않았던 나르시스트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으로서 위치를 찾아가고 있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배도빈 지휘자 덕이었어. 이제 우리 차례인 것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해?”
찰스 브라움의 질문에 단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이름을 알리기 전이었던 단원들을 받아주고 세계 최고의 무대 에 함께하게 해준 배도빈을 위해.
그들의 지휘자를 위해.
“가자.”
베를린 필하모닉 B가 한마음으로 무대 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