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301화 (301/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301화

66. 라이든샤프트(3)

-베를린 필하모닉 B가 결승 진출을 확정 짓습니다!

2023년 7월 16일.

베를린 필하모닉 B가 암스테르담 로얄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를 추월한 날.

라트비아 출신의 천재 지휘자 아리 엘 핀 얀스는 TV 앞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아리엘의 손은 힘을 잃었고 그의 손에 들린 와인잔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버티지 못한 유리잔은 낙하 하여 산산이 부서졌다.

‘할아버지.’

아리엘에게 그의 조부는 유일한 스 승이자 부모였으며 친구였고 꿈이었다.

그의 나이 만 4세 때.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을 발한 아 리엘 얀스는 부모의 도움으로 영국, 길드홀 음악연극원에서 영재 교육을 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모차르트의 재림이 라 불리며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2005년 7월 7일.

마리 얀스의 바이올린을 만들어 주 기도 했던 베이커가의 장인은 친구 의 손주를 위해 작은 바이올린을 만 들어 두었고.

아리엘 얀스는 그날만을 손꼽아 기 다렸다.

얀스 부부는 이른 아침부터 재촉하는 아들을 달래야만 했다.

‘아버지! 어머니! 어서요!’

‘그렇게 좋니?’

‘네! 빨리 보고 싶어요. 빨리.’

총총 뛰며 안달하는 아들을 사랑한 부부는 준비를 서둘렀고.

가족은 기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그러나.

리버풀 역에서 베이커가로 향하는 지하철에 오른 일가족을 기다렸던 것은 방향 잃은 폭력이었다.

고막을 찢을 듯한 폭음과 함께 정신을 잃은 아리엘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심하게 압박 받고 있었고 간 신히 몸을 빼낸 뒤에야 자신을 감싸 고 있던 것이 부모였음을 알 수 있었다.

‘살려 주세요!’

‘여기! 들것 가져와!’

‘끄아아앙!’

‘앰뷸런스가 부족해! 지원 요청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여기! 여기 아이가 있어!’

비명과 절규, 슬픔의 울부짖음, 사 이렌 소리와 고함 속에서 영민했던 아리엘은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베이커가의 나이 많은 친구에게 바이올린을 부탁한 일과 아침부터 부모를 재촉했던 기억 그리고 자신을 지키기 위한 두 분의 희생까지.

그 경험은 마치 늪처럼 소년을 삼 켜갔다.

‘아리엘.’

급히 런던을 찾은 마리 얀스는 슬 픔을 느낄 새도 없이 아리엘 얀스를 돌봐야 했다.

총명하게 빛나던 눈빛은 죽었고 탈 수 증세로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손자는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정신을 잃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

병실에서 밤을 새워 고민했지만 그 어떤 말도 자신과 손자를 보듬어줄 순 없을 것 같았다.

날이 밝았을 때.

잠들었던 마리 얀스는 쓸쓸히 앉아 있는 아리엘을 보았다.

뜨고 있을 뿐, 초점 잃은 눈동자는 공허할 뿐이었다.

힘없이 벌어진 입과 코에서 나오는 미약한 호흡만이 소년이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마리 얀스는 저 작은 가슴으로 감당하기에 너무도 큰 시련을 준 신을 저주하고 싶었다.

‘아리엘.’

손자는 반응이 없었다.

‘아리엘.’

손자의 어깨를 잡아 흔들자 잠시나 마 의식이 돌아온 듯싶었다.

‘……할아버지.’

‘많이 힘들 거다. 참지 않아도 돼. 충분히 슬퍼하지 않으면 더 힘들 거야.’

벌어졌던 아리엘의 입이 떨리며 닫 혔다. 앙다문 입술이 올라갔을 때 마침내 소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소년은 부모를 애타게 부르짖었다.

목이 쉬고도 정신을 잃을 때까지 멈출 줄 몰랐다.

그렇게 부모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 아리엘은 조부의 집에서 생활하 게 되었지만 종일 창밖을 내다볼 뿐,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마리 얀스는 손자를 위로하기 위해 그의 서재에서 바이올린을 켰다.

‘듣기 싫어요.’

마리 얀스의 안타까움은 더해졌다.

부모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토록 사랑했던 음악마저 잃은 손자를 내 버려둘 수 없었던 마리 얀스의 고민 은 깊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손자 가 걱정되었던 마리 얀스는 평소와 같이 방을 살피러 나섰다.

복도에 흐르는 작은 선율.

틀림없는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 나타 21번이었다.

의아한 마음에 살짝 문을 연 마리 얀스는 작은 소리로 튼 오디오 앞에 서 소리 죽여 우는 아리엘을 발견하 곤 그를 안을 수밖에 없었다.

‘오오. 아리엘. 아리엘.’

‘……끅. 끄으으윽.’

어찌하여.

어찌하여 이 아이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마리 얀스는 진실로 신을 저주했다.

품에 안겨 몸을 떠는 소년은 너무 도 작아 악마의 작은 손짓에도 바스 라질 것만 같았다.

‘저 때문에. 저 때문에.’

‘아니다. 결코 내 탓이 아니야.’

‘제가 떼써서. 빨리 가자고 떼써서.’

마리 얀스는 그제야 손자의 상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부모를 잃은 일마저 감당키 어렵건 만 그 이유를 자신에게 돌리고 있었다. 이 어린 소년은 그를 위로한 유 일한 음악마저 죄악으로 여기고 있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리엘, 그것은 악마가 한 일이란다. 결코 네 잘못이 아니야.’

‘다시는 안 할 게요. 안 들을 게요.’

아리엘은 울며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라면 이 아이는 늪에 빠져 숨조차 쉴 수 없을 것이다.

마리 얀스는 어린 손자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신께서 너를 보살필 거다.’

그리고 방 한쪽에 놓아 둔, 벗이 만들어 준 바이올린을 가져와 아리엘 에게 안겼다.

‘연주해 보렴.’

소년은 망설였다.

죄책감이 바이올린을 켜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애로운 할아버지의 미소와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이 결국에는 소년에게 용기를 주었다.

소년은 모차르트의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망설임이 남아 있던 손은 연주를 할수록 그간 쌓여 있던 울분을 따라 격해졌다.

한참을 연주한 끝에.

아리엘은 눈물과 콧물로 엉망인 얼굴로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보렴. 이렇게나 아름다운 연주를 하지 않느냐. 넌 신에게 사랑받는 아이란다.’

‘하지만.’

‘그날은 너를 질투한 악마가 저지른 일이다. 그러니 음악을 그만두면 악마에게 지는 거란다. 아빠도 엄마도 네가 그러길 바라지 않을 거야.’

그날 이후.

아리엘 얀스는 음악에만 몰두했다.

음악 외에는 머릿속에 두고 싶지 않다는 듯 매진했다.

다행히 위대한 지휘자 마리 얀스는 무섭게 발전하는 천재를 충분히 감 당할 수 있었다.

스승이자 부모로서 그리고 꿈으로.

언젠가 할아버지를 뛰어넘어, 신이 그에게 부여한 사명을 다하여 그 영광을 부모에게 돌리고 싶었다.

아리엘의 집착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해갔다. 날로 발전하는 실력과 비례해 방에서 나오는 일이 적어졌다.

스승은 그의 조부로도 충분했다.

마리 얀스와 모차르트 그리고 성경만이 그의 삶의 전부였다.

아리엘에게 다른 것은 하찮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 그가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진 것은 처음이었다.

‘할아버지, 베를린에 마왕이 있대요.’

‘아. 도빈 군을 말하는 거구나.’

‘네. 저보다 어린데 대단한 음악가예요.’

‘껄껄. 드문 일이구나. 네가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지금으로서는 사실이니까요. …… 그 애는 여섯 살 때부터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연주자 생활을 했대요.’

‘그렇지. 푸르트벵글러가 자랑하곤 했어.’

‘최근엔 가우왕이란 피아니스트와 경연을 했대요.’

‘음. 좋은 대결이었지.’

그날 이후 아리엘은 배도빈에 관한 기사와 영상을 찾아보았다.

과연 악마의 유혹이라 불릴 정도로 과감하고 고혹적인 연주에, 아리엘은 비로소 하찮게 여기던 ‘밖’에 관심을 두었다.

‘미국으로 갈래요.’

‘미국? 음악이라면 유럽에서도 할 수 있지 않느냐.’

‘유럽에서 할아버지보다 나은 음악가는 없잖아요.’

‘껄껄. 아리엘, 그건 네가 아직 세 상을 몰라서 그런 거란다.’

‘그럼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할게요.’

마리 얀스는 손자를 좀 더 곁에 두 고 싶었지만 십 년 만에 밖으로 나 서려는 아리엘을 잡을 수 없었다.

도리어 손자에게 자극을 준 배도빈 에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미국으로 넘어간 아리엘 얀 스는 클리블랜드, 시카고를 거쳐 로 스앤젤레스 필하모닉에 정착.

OOTY 오케스트라 대전에서는 구 스타프 하나엘을 대신해 놀라운 실 력을 과시했으며 LA필 역사상 최단 기간 감독직에 올라 천재성을 인정 받았다.

그런 그에게 할아버지의 패배는 크 나큰 충격이었다.

사회성이 부족한 폐쇄적 천재에게 그것은 마치 그의 인생을 부정당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은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배도빈이라는 천재가 뛰어났을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신성한 결투에 의문을 가진다는 것은 귀족으로서의 명예와 할아버지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짓이었다.

“결국 먼저 올랐구나.”

신에게 사랑받는 천재는.

자신을 뛰어넘는 천재에게 뒤쳐진 채 있을 수 없었다.

“ 라이든샤프트.”

아리엘 얀스는 모니터에 비치는 배도빈을 보며 혼잣말을 이어나갔다.

“이 시대를 너만의 것이 되도록 두 진 않겠다.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아리엘은 테이블 위에 둔 흰 장미를 뜯으며 의지를 태웠다.

오후의 태양이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 * *

일본 삿포로. 오전 6시.

“히로시〜 설마 안 잤니?”

“좋은 아침이에요.”

“그러다 몸 상해. 어서 아침 먹고 자.”

“아침은 괜찮아요. 이것만 정리하고 잘게요.”

어머니의 타박을 웃음으로 넘긴 타마키 히로시는 TV 볼륨을 키웠다.

화면에는 오케스트라 대전 결승 전, 지금까지의 대회 과정을 요약한 프로그램이 한창이었다.

그 과정에서 배도빈이 지휘하는 모습이 여러 번 화면에 비쳤다.

‘결국 해냈구나.’

타마키 히로시는 살짝 웃고는 TV를 껐다.

펜을 들고 그 앞에 놓인 악보에 집 중하면서 책상을 두드리기도 했다.

한때 일본 피아니스트계의 유망주 로 불렸던 타마키 히로시는 불의의 사고로 재능을 피어보지도 못하고 은퇴해야 했다.

어른들의 사정으로 제1회 크리크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배도빈의 대항마로 부추겨진 그는 주변의 기대에 부응해야 했다.

천재가 되어야 했고 그 부담을, 약 한 자신을 감추기 위해 허세를 부렸지만.

‘쓸모없어진’ 뒤에야 자신이 이용당 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차라리 욕이라도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미디어와 대중은 타마키 히로시란 인물을 철저히 무시했다. 사고 이후 작곡가로 전향한 그에 대해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렸을 적의 자신을 생각하면 무리는 아니라 여겼다.

그럴수록 타마키 히로시에게 배도빈은 우상이었다.

본인이 해내지 못한 일을 실현시키는 천재 음악가를 보며, 그에게 했던 무례한 행동을 후회하기도 또 따라 가고 싶기도 했다.

‘ 아.’

악보에 집중하길 얼마간.

피로를 느낀 타마키 히로시는 시계를 확인하고서야 오후가 지났음을 깨달았다.

‘이러면 안 되지.’

비록 인기 없는 작곡가지만.

언젠가는 분명, 베를린 필하모닉에 서 연주해 주길 바라며 타마키 히로 시는 남들보다 좀 더 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체 정체가 뭐야.’

아침부터 중계된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을 보던 엘리자베타 툭타미 셰바는 점심쯤 이르러 결국 결승에 진출한 베를린 필하모닉을 보고 경악했다.

크리크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 했을 때만 해도 배도빈은 너무도 먼 존재였지만.

세대를 넘어서 시대를 아우르는 모 습에 마치 괴물을 보는 듯했다.

‘한국인은 다들 저런 거야?’

크리크 이후 리빙 레전드 사카모토 료이치에게 강의 제안을 받았을 때 만 해도 그녀는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배도빈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승부욕이 강한 그녀는 수년간 철저 히 연습했고 사카모토 료이치도 그 런 제자를 어엿한 한 사람의 피아니스트로 인정했다.

그러고 나섰던 오케스트라 대전.

그곳은 그야말로 괴물 천지였다.

배도빈은 말할 것도 없었고 심지어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최지훈은, 크 리크 콩쿠르에서 자신보다 아래였던 그마저 엘리자베타의 눈을 튀어나오 게 하였다.

‘마리 얀스라고. 그 거장이라고. 이긴다는 게 말이 돼?’

그리고 끝내.

이 시대 최고의 지휘자라는 마리 얀스를 꺾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 만 배도빈.

설명할 길이 없는 속도로 성장하는 최지훈.

엘리자베타는 한가로이 점심을 먹을 수 없었다.

“어디 가? 중계 보고 밥 먹으러 가기로 했잖아.”

“안 먹에”

미국, 일본, 러시아, 체코 등 세계 모든 나라의 인재들이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의 결과에 집중했다.

대부분의 이들은 경탄하거나 좌절할 뿐이었지만, 일부는 배도빈이 그 들 마음에 지른 불길에 스스로 기름을 끼얹었다.

그 현상은 마치 화마와 같이 번져.

그야말로 격정의 이름을 연상케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