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298화
65. 탱고와 비올라(4)
배도빈이 포디움에 올랐다.
솔로로 나선 찰스 브라움과 가우왕 이 각자 위치에서 마음을 다잡았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나카무라 료코는 침을 삼켰다.
‘마지막일지도 몰랐던 무대야.’
배도빈의 설득으로 탈퇴는 보류했지만, 고뇌했던 어린 비올리스트에 게 전면에 있는 세 사람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다.
찰스 브라움과 가우왕은 이미 세계 정상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한 지 오래였고.
배도빈은 말할 것도 없었다.
비단 오늘만이 아니라 저들은 항상 어떤 무대에서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재능의 차이.
어쩌면 비올라를 연주하는 내내 주 인공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카무라 료코를 괴롭혔다.
괜찮다는 말 따위 위선이었다.
모든 이가 그러한 것처럼 나카무라 료코는 조연이 되고자 지난 십 년간 노력했던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무대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그 마음이 순수했던 만큼 최선을 다했고 그렇기에 자연스러운 바람이었다.
나카무라 료코 본인은 인지하지 못 했으나 그것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정신과 맞닿아 있었다.
끝없이 나아가려는 강인한 의지와 그것이 바탕이 된 자부심.
그것을 지닌 음악가라면 결코 조연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고귀한 정신.
나카무라 료코는 무대에 오르기 직 전, 비올라 수석 데니어스 토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무대 뒤.
“오늘 연주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 요한지 다들 잘 알고 있을 거야.”
비올라 수석 데니어스 토로는 오늘 연주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상기시켰다.
배도빈이 처음으로 상임 지휘자로 서 무대에 오른 자리이자, 베를린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 암스테르담 로 얄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와의 조우.
물러설 수 없었다.
그것을 모르는 단원은 없었기에 비 올라 주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주인공은 브라움 악장과 가우왕 씨지만 우리에게도 보스가 준 역할이 있어.”
데니어스 토로가 한 명씩 시선을 교환하다 나카무라 료코에게 이르렀다.
잔뜩 굳은 얼굴이었다.
당장에라도 화낼 것만 같은 그 표정을 처음 봤을 땐 데니어스 토로도 당황했었다.
그녀가 어린 비올리스트에게 물었다.
“료코, 우리의 역할이 뭐지?”
“……제2바이올린을 돕는 거요.”
“그것뿐이야?”
“……첼로를 보조해요.”
나카무라 료코의 대답은 평범했지만 데니어스 토로가 바라던 방향은 아니었다.
지휘자로부터 나카무라 료코에게 비올라의 가치를, 나카무라 본인의 가치를 알려주라는 요청을 받았기에 데니어스 토로는 무대에 오르기 전 비올라 파트의 마음을 다잡았다.
“맞아. 오늘 연주에 박자를 맞춰줄 사람은 없어. 다들 연습 때 느꼈겠지만 보스의 지휘를 따라간다 해도 평소와 다를 거야. 오늘 다른 섹션 들은 모두 경주마처럼 달릴 테니 우 리가 중심을 잡아줘야 해.”
데니어스 토로가 단원들을 살폈다.
“하지만 그것만이 우리가 할 일의 전부는 아니야.”
데니어스 토로는 비올라 연주자들 이 겪는 갈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 하고 있었다.
역할이 뚜렷한 다른 악기에 비해 비올라는 대부분 한발씩 걸쳐 있었다.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돕는다든지 다른 악기의 연주에 반주를 한다든 지 보조적인 역할을 도맡았다.
그 태생적 차이로 인해 바이올린처 럼 오케스트라의 주인공이 될 순 없었다.
그것은 이번 연주에서도 마찬가지.
찰스 브라움의 바이올린과 가우왕 의 피아노를 부각시키는 게 비올라가 할 역할이었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관객들이 가장 오래 기억하는 소리를 연주할 거야.”
데니어스 토로 수석을 신뢰하지만 나카무라 료코는 그녀의 말이 단지 격려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연주에만 집중하자.’
나카무라 료코가 고개를 살짝 젓고 지휘자를 바라보았다.
새 시대의 선지자의 눈빛은 지휘단 에만 오르면 강렬해져 빠져들 수밖 에 없었던 평소와 달랐다.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얼굴에 미 소가 깃들어 있었다.
그가 찰스 브라움에게 시선을 주 자, 현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선보에 놓인 음계가 그리는 아름다운 곡선처럼.
찰스 브라움의 파이어버드는 우아 하게 떨어진 여인의 어깨를 그렸다.
활이 치솟을 때마다 적갈색 머리칼 이 바람에 날리고 완벽한 협화음이 치명적인 입술을 내비친다.
황제 찰스 브라움과 스트라디바리 우스 파이어버드만이 낼 수 있는 고 혹의 노래.
드러내지 않아도 자연스레 주변을 녹이는 아름다움 끝에, 여인이 손에 입을 맞춰 보였다.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지휘자 배도빈이 양팔을 펼쳤다.
찰스 브라움이 연주했던 멜로디가 더욱 풍성하고 다채롭게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일부 콘트라베이스와 비올라 연주 자가 현을 뜯어 박자를 맞추는 가운 데,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 첼 로, 비올라, 콘트라베이스가 아름답 게 층을 이뤄 노래한다.
다시 한번 찰스 브라움이 나선다.
파이어버드가 발을 옮길 때마다 드 레스 끝단에 달린 레이스가 하늘거 리고.
함께 춤을 출 상대를 찾는 파이어 버드 앞에.
피아노가 손을 내민다.
가우왕이 건반을 강렬히 내려쳤다.
정열로 타오르는 순정.
바이올린이 그 손을 잡은 순간 오케스트라가 빠지고 무대 위에는 두 악기만이 남았다.
과감하게 다가서서 등을 휘감는 피아노와 그에 응하는 파이어버드.
얼굴을 맞대고 왼손을 맞잡고 발끝을 붙인 채 춤추는 찰스 브라움과 가우왕의 모습에 관객들은 넋을 잃 고 말았다.
이보다 어울릴 수 있을까.
저돌적인 피아노와 고혹적인 브}이 올린은 마치 오랜 시간 사랑을 나눈 연인과 같았다.
황홀하게 그 춤과 같은 소리에 이 끌렸던 이들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놀랍군. 정말 놀라워.’
최고 수준의 바이올리니스트와 피아니스트의 협연은 더 이상 기교의 문제가 아니었다.
간격을 두고 놓은 음계 사이마다 여운이 남았고 카를로스 가르델이 남긴 정열의 멜로디가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관객들은 이 가슴 설레는 무대가 끝나지 않길 바랐다.
기껏해야 4〜5분 정도의 짧은 곡임을 알기에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런데.
춤이 끝나지 않는다.
집요하게 이어지는 무곡(舞曲)은 끝을 모르게 절정에 절정을 거듭했다.
‘ 녀석.’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마치 운명 교향곡처럼 주 멜로디를 확장하고
압축하고 늘리고 변형시켜 전개됨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베토벤이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것 같군.’
오늘만의 감상이 아니었다.
푸르트벵글러는 배도빈이 베를린 필과 처음 E플랫장조를 연주한 날 부터 그런 생각을 해왔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생각을 달리 했다.
감히 성역을 침범하였다.
‘더욱 발전하여.’
배도빈이 더 뛰어나다고 진실로 그 리 여겼다.
그러한 생각을 공유하는 사람이 콘서트홀 안에 몇 있었다.
사카모로 료이치는 그의 오랜 친구 가 나윤희, 찰스 브라움, 가우왕과 같은 벗들과 최고의 무대를 가짐에 비로소 흡족했고.
최지훈은 가슴이 벅찬 와중에도 가우왕이 그 밀도 높은 감성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주의 깊게 살폈고.
차채은은 굳은 신뢰 이상의 연주에 감격해 애처로운 춤을 온몸으로 받 아들였다.
모두 배도빈이 이룩한 무대에서 춤 추는 연인에 깊이 매료되었다.
저보다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는 사람은 없을 거라 여겼다.
‘망할 찌질이. 그만 좀 따라붙어.’
‘무식한 놈. 대체 언제까지 뛸 작 정이야?’
그러나 막상 두 연주자은 다른 생 각을 하고 있었다.
스승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충격 적인 연주를 들은 가우왕은 곡 전체를 무너뜨리지 않는 선에서, 자신에 게 주어진 카덴차를 십분 활용하고 자 했다.
곡을 연주함에 따라 천천히 가속도를 붙이고 트릴을 넣어 결승선을 향
한 저돌적으로 대시하는 경주마와 같았다.
그러나 피아노와 맞춰 연주하고 있는 찰스 브라움으로서는 자꾸만 앞 서가려는 가우왕이 한심해 보일 뿐 이었다.
‘둘 다 아직 멀었어.’
연습 때도 이러한 모습을 보였기에 배도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예측 범위 안에서 마음껏 날뛰는 말은 활용하기 더없이 좋은 도구였다.
배도빈이 제1바이올린을 향해 지휘 봉을 들었다.
찰스 브라움을 따라 제1바이올린 주자들이 나서자, 가우왕은 기세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고집을 부렸다간 연주 자체를 망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우왕이 한풀 수그러들자 이제는 찰스 브라움이 물을 만난 고기처럼 헤엄쳤다.
파이어버드는 아름다운 소리로 울 며 하늘 높이 솟았다. 구름과 맞닿 은 곳에서 느긋하게 날갯짓하는 불 새는 자신을 우러러보는 이들의 시 선을 잔뜩 느낄 뿐, 내려올 생각이 없었다.
지휘봉이 비올라 수석 데니어스 토 로에게 향했다.
저돌적이고 정열이 넘치는 피아노 와 가늘고 도도한 바이올린 소리에 익숙했던 콘서트홀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노래가 깔 리기 시작했다.
애수 어린 그 소리는 등불과 같이 낮게 깔렸다. 눈앞에서 어른대는 비올라의 깊은 소리는 하늘 높이 나는 바이올린에 가슴 졸였던 관객들을 안심 시켰다.
‘달려.’
배도빈이 고개를 돌려 가우왕을 보자 그간 잠잠했던 황태자가 신이나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찰스 브라움도 더는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피아노에 따라붙지 않으면, 연주를 망칠 수 있다는 걸 잘 알기에 날개를 펴고 활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에서 빛이 나는 건 가운데에서 중심을 잡고 있던 비올라였다.
유럽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이 들의 고된 삶과 애환으로 탄생한 정열의 음악 탱고.
그것에 가장 어울리는 악기는 바이올린도 피아노도 첼로도 아닌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수수한 비올라였다.
음량 차이로 바이올린과 첼로에 소 리가 묻히거나, 저음은 콘트라베이 스에 밀려날 수밖에 없는 비올라는 고전 시대 때부터 소외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배도빈은 일찌감치 찰스 브라움과 가우왕이 협력하는 걸 포기해 그들이 마음껏 놀도록 고삐를 놓아 버렸다.
그리하여 생긴 빈자리를 비올라로 채우니 메조소프라노의 드라마틱한 중저음이 주선율을 이끌게 되었다.
비로소 비올라 본연의 색채가 드러 난 것이었다.
‘ 아아.’
영문도 모른 채 지휘자와 수석을 따라 연주하던 나카무라 료코의 눈 에 관객들이 들어왔다.
너무나 큰 재능 차이로 오직 가우왕과 찰스 브라움만이 보였던 나카 무라 료코에겐 신선한 경험이었다.
견고했던 벽이 허물어지고.
피아노 사이로, 팔 사이로 보이는 관객들의 얼굴.
조명으로 인해 자세히 확인할 순 없었지만 언뜻언뜻 보이는 그들의 입가에는 행복이 묻어나 있었다.
‘더 연주하고 싶다.’
나카무라 료코는 다른 악기를 제치 고 뻗어나가는 비올라 소리에 자신을 투영했다.
비올라 소리가 감동이 되는 그 순 간이 마치 관객들에게서 인정받은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 연주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남은 악보가 몇 안 남았다.
곧 찾아올 끝을 알기에 나카무라 료코는 한 음, 한 음에 마음을 담아 연주했다.
마침내 배도빈이 두 팔을 들어 주 먹을 꽉 쥐었다.
모든 연주가 끝나자.
관객들은 간신히 참고 있던 비명을 내질렀다.
“브으라보!”
마치 경주마와 같이 정열적인 연주를 들려준 가우왕과 치명적인 매력을 뽐낸 찰스 브라움.
그리고 애수 어린 멜로디로 감동을 준 비올라와 이 모든 것을 안배한 위대한 배도빈에게 경의를 다했다.
클래식 음악과 오케스트라에 익숙 한 그들에게 탱고는 신선한 자극이었으며.
동시에 평소 잘 들을 수 없었던 비올라 역시 새로운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