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297화
65. 탱고와 비올라(3)
지휘자 마리 얀스와 피아니스트 크 리스티안 지메르만이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관객들은 흰 머리를 차분히 뒤로 넘긴 노신사와 머리를 땋아 한쪽으로 기품 있게 내린 마담에게 경의를 다했다.
마리 얀스.
그가 백작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 은 실제로 얀스 가문이 귀족이었던 사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1988년, 네덜란드의 왕 베아트릭스는 뛰어난 기량으로 네덜란드의 이름을 떨친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에 ‘로얄’이란 칭호를 하사했다.
마리 얀스가 수석 지휘자로 활동한 지 1년 만의 일.
팬들은 왕립 칭호를 받은 암스테르 담 로얄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 의 지휘자, 마리 얀스의 공적과 명예를 높여 백작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마침 이웃나라 독일에서 폭군이라 불리기 시작했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대항마로 비교하곤 했다.
당대 가장 뛰어난 지휘자 다섯 명 중에서도 스스로 지휘봉을 내려놓은 사카모토 료이치를 제외하고.
남은 네 명은 수 없이 많이 비교 되곤 했는데, 그중에서도 마리 얀스는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지성과 감 성을 조화롭게 다루었기에 후배 음악가들이 가장 존경하였다.
듣기 편한 음악.
듣다 보면 자연스레 포근해지는 연주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십수 년.
마리 얀스는 2000년대, 베를린 필하모닉과 빈 필하모닉을 제치고 마침내 암스테르담 로얄 콘세르트헤바 우를 세계 최고의 자리에 등극시켰다.
그 과정에서 암스테르담은 온전히 마리 얀스의 음악적 세계관을 펼쳐 냈다.
짙은 음색과 즉각적이면서도 유연 한 변화를 통해 팬들의 영혼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팬들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연주회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이라 면, 마리 얀스의 앨범은 가장 곁에 오래 두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런 그와 피아니스트로서 정상에 군림하고 있는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과 함께하니 오케스트라 대전을 관 람하는 모든 이가 설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메르만과 마리 얀스라니. 대체 몇 년 만이야?’
‘빨리 듣고 싶다.’
관객들은 이제 오케스트라를 향해 돌아선 마리 얀스를 보곤 조용히 기 다렸다.
모차르트가 남긴 후기 피아노 협주 곡 중에서도 찬사를 받는 26번, 대 관식이란 별명이 붙은 곡을 과연 어떻게 들려줄지 가슴 졸였다.
한편 대기실에 있던 가우왕은 모니터를 뚫어낼 듯 지켜보았다.
‘마귀 할망구.’
안하무인에 관심받길 좋아하는 가우왕에게 스승 지메르만은 오를 수 없는 산과 같았다.
배도빈과의 경연 이후 자신만의 세 계관을 확립한 그였지만 지메르만은
단 한 번도 제자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것은 오케스트라 대전 2라운드에 서도 마찬가지. 그렇기에 가우왕은 이번 경합을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봐주지 마.’
과거 어린 가우왕의 눈에 크리스티 안 지메르만은 사람이 아닌 듯했다.
인간 같지 않은 연주에 질린 뒤로 그녀를 마귀라 불렀던 가우왕은 강제로 제자가 된 뒤에 더욱 적의를 태웠다.
‘다 넘어줄 테니까.’
그렇게 다짐한 가우왕은 주먹을 꽉 쥐었다.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그의 손은 땀으로 흥건했다.
무대 위.
마리 얀스와 지메르만이 시선을 교환했다.
흰 정장을 차려입은 백작이 그의 악기를 가볍게 터치하자, 암스테르 담이 작게 희망의 노래를 읊었다.
♪♫♬
현악기들의 우아한 노랫소리가 화음을 이루며 층을 이루자 호른이 포 문을 열었고.
암스테르담 왕립 오케스트라가 마 침내 그들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과시했다.
힘차게 나아가는 마리 얀스의 주변으로 바이올린이 꽃잎을 뿌렸고 콘 트라베이스와 첼로가 융단을 깔아주었다.
원곡보다 확대편성 된 관악부는 근 위병처럼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관객들의 기대감은 잔뜩 고조된다.
그 순간.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카덴차가 시작되었다.
상냥하고 아름다운 기존의 연주를 기다리고 있었던 관객들은 얼이 빠지고 말았다.
‘이게 뭐야.’
가우왕은 스승의 펼치는 연주를 믿을 수 없었다.
완벽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그녀는 감정마저 절제하는 것으로 연주의 깊이를 더하는 피아니스트였다.
그런 스승의 연주라고 하기에 지금 의 무대는 마치 지중해의 태양과 같이 정열적이었다.
‘이게 할망구의 연주라고?’
가우왕은 믿을 수 없었다.
한편 오케스트라 대전을 누구보다 도 즐기고 있는 또 한 명의 거장 사카모토 료이치는 기쁘기 그지없었다.
‘얀스와 크리스티안이 대관식을 완 성시 켰구만.’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6번에는 의아한 점이 있었는데, 1악장의 독주 부분과 2악장 전체에서 피아노의 왼손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점이 그 러했다.
후대에 이르러 몇몇 인물이 그것을 대신 채워 넣었지만 그에 대한 평은 조악하다는 말뿐.
그렇기에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6번은 피아노를 어떻게 연주하느냐에 따라 무한히 향상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한 곡을 마리 얀스와 크리스티 안 지메르만이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을 상대하기 위해 철저히 준 비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피아노는 상냥했던 기존의 풍을 과감히 버리고 위풍당당한 분 위기를 그대로 이끌었다.
사카모토 료이치는 물론, 관객들은 더할 수 없이 벅차올랐다.
이내.
암스테르담이 지메르만의 연주에 어울리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대신해 바이올린과 첼로 가 원곡의 멜로디를 가져갔고 은은하게 퍼지는 온기가 생명력이 넘치는 태양과 어울리니.
관객들은 마리 얀스의 충격적인 재 해석에 놀라면서도 그들이 기억하고 있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6번 의 향수를 느낄 수 있었다.
백사장에서 펼쳐진 정오의 대관식.
넘치는 위엄이 따랐고 주인공이 된 피아노를 따라 온갖 아름다운 것들이 날갯짓을 했다.
오케스트라는 마침내 긴 복도를 지 나 왕 앞에 부복하고.
바이올린이 창밖으로 붉게 지는 석 양을 그린다.
피아노는 엄숙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 묵직한 멜로디를 풀어낸다.
‘완벽해.’
배도빈은 마리 얀스와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그리고 암스테르담 로얄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연주 에 빠져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길을 찾을 순 있겠지만 이 이상 훌륭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 곡 26번은 없을 거라 여겼다.
과연 이 시대가 사랑하는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의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유럽을 양분했던 거장과 그 악 단다운 연주에.
베를린의 마왕은 무대에 오르기 전 더 없이 좋은 컨디션을 가질 수 있었다.
“브라보!”
연주가 끝나자 전 세계가 열광했다.
차분하게 정리된 연주를 기대했던 팬들에게 암스테르담의 무대는 너무도 충격적이었고 동시에 파격적이었다.
특히나 지메르만의 수준 높은 연주는 그가 왜 완벽한 피아니스트라 불 리는지 새삼 다시 말해주었다.
무대를 지켜본 피아니스트는 정도를 넘어선 트릴을 소화해내는 지메 르만의 기교에 감탄하기 바빴다.
‘저런 연주도 가능하구나.’
지메르만의 연주를 인상 깊게 받아 들인 최지훈은 손가락을 움직이며 감동의 무대를 복기했다.
배도빈과의 협연 이후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 잘츠부르크 광장 에서 연주하며 생각을 정리하던 그는 지메르만의 연주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트릴을 이렇게 많이 넣는데도 멜 로디가 선명할 수 있다니.’
트릴은 연주의 액세서리와 같아서 포인트가 되었을 때 빛을 발한다.
미숙한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기교를 뽐내기 위해 트릴을 과도하게 사용해 연주 전체를 망가뜨리곤 하는 데.
지메르만의 연주는 마치 모든 소리 가 잘 세공된 하나의 거대한 다이아몬드와 같이 들렸다.
‘트레몰로랑 병행해서 그런 걸까.’
최지훈은 지메르만의 연주를 다시 금 떠올렸다.
인접 음계로 장식하는 트릴만이 아 니라 한 옥타브 차이의 음을 반복해 연주하는 트레몰로를 적절히 섞었는 데 그 때문에 연주가 더욱 풍성히 들렸다.
마치 여러 대의 피아노가 하나의 노래를 부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볍게 터치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 음이 번지지 않게 튕기듯이.’
이미 최지훈에게 암스테르담을 향한 환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악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OOTY 오케스트라 대전에 참가한 수많은 악단 중 그 역사가 가장 짧 은 그들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베를린 필하모닉 B를 무시할 수 없었다.
대회 개최가 발표되고.
수많은 지휘자와 악단이 그들을 목 표로 삼는다고 밝혔었다.
평균 연령 31세.
지극히 젊은 연주자들이 수십 년간 무대 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 사이에서 유독 빛나 보이는 이유는 단 하나의 희망.
새 시대의 선지자.
베를린의 마왕 때문이었다.
“마에스트로!”
“세뇨르!”
“꺄!”
“아미고!”
“미스터 배! 이쪽 좀 봐줘요!”
배도빈이 모습을 드러내자 객석은 전에 없는 수준으로 흥분했다. 손수건을 흔들어대거나 모자를 들어 올 리거나 하면서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에 이어 음악사를 새롭게 쓰고 있는 인물을 맞이했다.
“아아아.”
그중에는 배도빈의 연주를 듣기 위 해 몇 년간 노력했던 이도 있었다.
배도빈이 지휘하는 연주회는 그 티 켓을 구하는 일이 여간한 일이 아니 라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방도가 없었다.
그저 인내하고 인내하여 여러 번 시도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간 절히 바란 끝에 이곳, 잘츠부르크에 당도한 이들은 배도빈을 보자마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배도빈을 깊이 존경하는 프란츠 페 터 역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부여잡고 있지 않으면 심장이 가슴을 찢고 나올 것 같아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길 반복했다.
“세상에……
그 모습을 확인한 정세윤 기자는 얼이 빠지고 말았다.
배도빈이 인기가 많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격 있는 자리 에서 관객들이 열광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마치 라이브 무대 위에선 록 스 타를 보는 것만 같았다.
“도빈이 진짜 장난 아니구나?”
“당연하죠.”
정세윤 기자의 말에 차채은이 콧김을 뿜으며 팔짱을 꼈다.
“정말 이례적인 일이지. 지금까지 어떤 음악가도 도빈 군만큼 사랑받은 적은 없었잖아.”
이필호 편집장도 나서 차채은을 거 들었다.
“대단한 거야 알고 있지만 이유가 뭘까요? 푸르트벵글러나 마리 얀스도 도빈 군에게 밀리는 지휘자는 아니잖아요.”
“으으음. 글쎄.”
확실히 정세윤 기자의 말대로 지휘 자로서의 음악성에 대해서는 사실 현재 거장이라 불리는 이들이 배도빈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었다.
“이 무대로 좀 더 명확해지지 않을 까요? 다른 음악가와 배도빈의 차이 가 무엇인지, 상대가 마리 얀스와 지메르만이 니까.”
“그럴지도.”
이필호가 한이슬 평론가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클래식 업계에서 오랜 세월 경력을 쌓은 세 사람이 내놓지 못한 답을 차채은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배도빈 은 단 한 번도 자신이 한계에 달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음악과 미식 이외의 일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주어진 시간과 역량을 다하여 단지 탐미할 뿐인 배도빈의 음악은 지극히 본인에게 솔직했고.
자신을 틀 안에 속박하지 않음으로 써 그의 음악을 듣는 순간만큼은 스스로 솔직해질 수 있게 했다.
마성과도 같은 그 매력은.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사회에 적 응하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가면을 써야만 했던 현대인들에게.
단 한순간의 자유를 선사했다.
그것이 배도빈의 음악이 사랑받는 이유라고 차채은은 확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