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295화
65. 탱고와 비올라(1)
세미파이널에 진출했다.
어떻게 표현해야 좋은지 몰라 쿵쿵 대는 가슴만 달래고 있는데 피셔 디 스카우 아저씨가 왼손을, 마르코 씨 가 오른손을 잡고 들었다.
단원 모두 소리를 질러서 나도 모 르게 따라하고 말았다.
그런 적은 처음인데.
의외로 시원했다.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 멀다.’
언젠가부터 벅차기 시작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에 입단할 때만 해 도 꿈을 이뤘다는 생각에 최선을 다 할 뿐이었는데 돌이켜보면 내겐 너 무 이르지 않았나 싶다.
독일로 온 이후에는 부족함을 느낄 뿐이었다.
비올라를 잘 연주하는 사람은 너무 많았고, 그마저도 바이올린 전공자 가 더 잘 켜곤 했다.
일본에서는 어떻게든 했지만 유럽 에서의 나는 그냥 흔한 전공자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이런 내가 찰스 브라움, 왕소소, 나윤희, 진 마르코와 같은 세계적 연주자들과 같은 악단에 속해 있으니, 힘에 부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힘들어.’
게다가 내게 부족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입단한 진 마르코 씨는 벌써 오보에 수석이 되었고 단원들과도 잘 어울린다.
처음에는 실력 차이라고 생각했다.
마르코 씨는 빈 필하모닉의 부수석 이었던 만큼 연주자로서의 실력도, 오케스트라에 대한 이해도 나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마르코 씨의 오보에는 정말 대단해 서 한없이 상냥하다가도 필요할 때는 용감하게 나선다.
도빈 군이 마르코 씨를 신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확실한 건 내가 마르코 씨를 부러 워한다는 거다. 또 같은 시기에 입 단한 그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
질투다.
이런 내가 싫다.
마르코 씨를 부러워하는 게 실력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기에 그렇다.
그 재능 넘치는 마르코 씨가 얼마 나 노력하는지 알고, 우중충한 나랑 다르게 악단의 분위기를 위해 항상 웃는 걸 알아서 더 그렇다.
쉬는 시간이나 연습 시간 전후로 마르코 씨 주변에서 즐겁게 웃는 단원들을 보면 함께하고 싶단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다가갈 용기도 없는 주제에, 그들 과 어울릴 만한 실력조차 없으면서 그저 부러워 바라볼 뿐이다.
그렇게 재능의 차이와 서투른 인간 관계를 절감하여 지쳐갈 때.
내 생각을 바꾼 사람이 있었다.
나윤희 악장에게서 느낀 첫인상은 동질감이었다.
다른 단원들보다 한발 뒤에 있었고 나 역시 그러했기에 비슷한 사람이 라 착각했다.
하지만 의견을 내야 할 때는 당당히 생각을 전했고 바이올린 연주는 정말 멋졌다.
어느새 나윤희 악장은 단원들이 가 장 신뢰하는 사람이 되었고 지금은 전 세계가 그녀의 바이올린을 칭송 하고 있다.
그런 사람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다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렇게 예쁜 연주를 하면서도,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무 대 위에서 손끝이 터질 정도로 연습 했다니.
“료코.”
나는 용기도, 바뀔 의지도, 재능도 없는 지지부진한 부적응자일 뿐이다.
나 같은 건.
“료코!”
아빠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이런 생각,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딸이 이렇게 한심하다고 아빠를 슬프게 할 순 없다.
고개를 젓자 아빠가 한참을 바라보 다 휠체어를 움직여 다가오셨다.
“준결승전이 다가오니 부담되지? 료코는 잘하고 있어.”
아빠는 모른다.
“응. 고마워.”
“그래. 푹 쉬고 엄마한테 전화도 해줘. 아빤 가볼게.”
“같이 가.”
“괜찮아. 히무라 아저씨가 아래 와 있거든. 내일도 파이팅!”
“……응.”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마르코 씨랑 나윤희 악장처럼 되려 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격 탓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도빈 군이 만든 악보를 반복해 읽는 것과 비올 라를 켜는 것뿐.
하지만 더 이상 잘할 자신이 없다.
단원들과 함께하고 싶으면서도 그 들과 같은 수준에 이를 수 없고, 저 녁을 먹자는 말조차 못 한다.
여기까지인 걸까.
하물며 재능이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이들을 따라 가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 걸까.
그들이 노력까지 한다면 나로서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닿을 수는 있을까.
내겐 도빈 군과 함께 음악을 하고 싶단 바람마저 과분한 걸까.
답은 알고 있다.
‘여기까지인 거야.’
갑자기 그만둔다 하면 곤란하실 테 니, 미리 말씀드리자.
* * *
푸르트벵글러와 A팀이 파이널라운드 진출을 확정한 밤.
기쁜 마음으로 악보를 검토하고 있는데 이자벨 멀핀이 잠깐 시간을 내 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숙소 라운지로 내려가니 멀핀뿐만 아니라 카밀라도 함께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멀핀이 카밀라의 눈치를 봤다.
카밀라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자 멀핀이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실은 계속 말씀드려야 하나 고민 하다가 국장님께 상의 드렸어요. 본 인도 중요한 때에 방해가 되는 게 싫다고 해서 비밀로 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보스에게 숨기는 게 마음 에 걸려서요.”
“귄터 씨라면 모를까, 도빈이가 몰 라선 말이 안 되니까.”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멀핀 과장이 잠시 뜸을 들인 뒤 입을 열었다.
“나카무라 료코 씨가 탈퇴 의사를 밝혔어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지만 카밀라와 멀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활발하진 않지만 악단 내에서 료코를 싫어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료코의 차가운 표정 뒤에 있는 성 실함을 모르지 않기에 도리어 갑자 기 입단하고도 제 역할을 다하는 녀 석을 기특하게 여겼다.
나 또한 몇 년 뒤를 기대하고 있고 말이다.
“이유는요?”
“본인이 베를린 필하모닉에 어울리 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정 확히 말하진 않았지만 자기가 부족 하다는 말을 했어요.”
머리가 아프다.
“료코를 불러주세요.”
“그게……
료코와 이야기를 해보려는데 멀핀 과장이 말끝을 흐리다 힘겹게 상황을 전했다.
“본인이 오케스트라 대전이 끝날 때 까지는 숨겨 달라고 했어요. 미리 말을 꺼낸 것도 갑작스럽게 알리면 폐 가 될까 봐 미리 이야기한 거라고.”
그렇게까지 베를린 필하모닉을 신 경 쓰면서 나가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부족해서 라니.
더더욱 말이 안 된다.
“껄끄러운 일 남겨두고 무대에 오를 순 없죠. 료코가 남든, 나가든 이야기는 들어야겠어요. 멀핀의 입 장은 충분히 전달할게요. 카밀라, 부 탁해요.”
“응.”
카밀라가 료코에게 연락하자 잠시 뒤 그녀가 평소보다도 더 험악한 표 정으로 들어왔다.
멀핀은 아직 료코를 몰라 그 얼굴을 보곤 눈을 꼭 감았지만 녀석이 멀핀을 탓하지 않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악단주로서, 지휘자로서 알고 있어
야 하는 상황을 언급하니 역시나 고 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테이블만 보고 있다.
“탈퇴하고 싶다고 들었어.”
"응."
“못 보내.”
료코가 고개를 들었다.
잔뜩 화난 표정인데 대화해 봐야 알겠지만 참 주인 말 안 듣는 얼굴 인 건 알겠다.
“내 지휘가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격하게 부정해 주니 안심이다.
“연봉이 부족한 건 알아. 작년까지 만 해도 재정 상태가 안 좋았으니 까.”
“……충분해.”
“싫은 사람 있어?”
고개를 젓는다.
“그럼 못 보내.”
“그,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이유조차 모르고 단원을 떠나보낼 지휘자는 어디 있고?”
나카무라 료코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레몽 도네크의 일을 떠올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감추고 싶었던 이유도 있을 테니 최대한 배려해 주고 싶다.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보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넌 몰라”
“모르니까 묻잖아.”
료코가 잠깐 눈을 굴리다가 인상을 썼다. 할 말이 없는 모양이다.
“그냥 말하기 싫어.”
“나카무라에게 물어야 해?”
“아빠는 상관없잖아!”
대충 이야기를 나눠 보니 속내를 털어놓을 생각은 조금도 없는 듯하다.
이 고집 센 녀석을 어떻게 설득해 야 할지 고민하다가 멀핀 과장이 남긴 힌트를 언급했다.
“부족하다고 말했다며?”
대답이 없다.
예전 같았으면 답답해서 화라도 냈을 텐데 신기하게도 그런 생각은 조 금도 들지 않았다.
내가 변하긴 한 모양이다.
아니면, 료코가 어렸을 적 함께했던 나카무라의 딸이라는 점이 걸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뭘 부족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실력 문제야?”
움찔 하는 게 뭔가 말하려다 삼킨 듯하다. 반응을 보인 만큼 아마 그런 모양이다.
“그게 무슨 문젠데?”
“그러니까 모를 거라 했잖아.”
“뭘 모른다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실력이 부족해서 떠나고 싶다는 거면 너 정말 멍청한 거야.”
료코의 매서운 눈에 눈물이 차오르 기 시작했다.
“이제 고작 17살이면서 찰스처럼 연주하길 바란 거야? 소소랑 윤희 누나처럼 하길 바란다면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노력하면 돼. 지금은 부족한 게 당연한 거야.”
“……알면서.”
료코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알면서 왜 입단시킨 건데? 내가 아빠 딸이니까?”
“내가 단원 심사를 사적으로 봤다는 말이야?”
내 말에 대답하지 못한 료코는 결 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2006년생.
한국 나이로 고작 18살인 녀석은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데 아직 미 숙하다.
지훈이와 채은이가 드물게 어른스러울 뿐.
그 나이에 성숙한 게 이상한 일이다.
나카무라가 입원했던 병실에서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탓인지, 분명 이 상황을 답답하게 여기면서도 오 랜 친구의 딸을 미워할 수 없었다.
여태 제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했던 단원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반드시 해결해 주고 싶다.
“나만. 나만 못 하잖아.”
나카무라 료코가 눈물을 흠치며 말 했다.
“나라고 못 하고 싶겠냐고. 부족한 거 알면서 왜 함께하자고 한 건데? 나중에, 나중이었으면 좋았잖아!”
“무슨 말이야?”
“뭐!”
“난 네가 베를린 필하모닉의 비올 리스트로서 부족하다고 말한 적 없어.”
“대체 뭐가 널 힘들어 하는 거야?”
나카무라 료코가 이젠 콧물까지 흘 리기에 손수건을 꺼내주었더니 고개를 세차게 흔들면서 거부했다.
그러더니 자기 걸 꺼내 닦는다.
“끅. 끄으윽. 진짜 싫어.”
조금 상처받는다.
조카 칼이 대들었을 때의 기분과 미묘하게 비슷하다.
생각해 보니 망할 녀석, 기껏 못된 부모에게서 데려와 입혀주고 재워주고 먹여주고 유산까지 물려줬더니 끝까지 말을 안 들었다.
양육권을 가져오느라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죽기 전에 불러 한 대 쥐 어박아줄 것을 그랬다.
“네가 어떻게 알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료코가 드디어 속내를 털어놓는다.
“끄윽. 연주 때마다 겨우 따라가는 내 마음을 알아? 다들 잘해내는데 실수라도 할까 봐 매일 피 말리는 내심정을 아냐고.”
“그래! 나 못해! 그래서 나간다
고. 근데 왜 못 나가게 해. 왜애애. 흐어어엉.”
그간 말을 잘 안 해서 몰랐던 건 지 알고 있던 성격과 좀 다르다.
드러내지 않았을 뿐, 그간 쌓인 게 많은 듯. 혹은 단순히 무리한 일정으로 지친 걸지도 모른다.
료코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을 흐느끼더니 눈물을 닦곤 언 제 그랬냐는 듯 또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다.
조금 재밌다.
“웃지 마!”
말문이 트이니 이렇게 편한 것을.
이제 대화가 좀 진행될 것 같다.
“잘하고 있어. 네가 부족하다고 생 각했다면 애초에 입단조차 허락하지 않았을 거야.”
처음 연주를 들었을 때도 제법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 아이가 단순히 본 인의 실력을 탓하는 게 아님을 알기 에 물었다.
“너는 모르겠지만 다들 너랑 같아. 한 번의 연주를 위해 매일 한계를 느끼며 연습하고 있어.”
“네가 어떻게 알아.”
“나도 그러니까.”
"..."
“나도 공연마다 최선을 다해. 때론 답을 찾을 수 없어서 악보를 찢어버 리기도 하고 오케스트라 대전에서 에로이카를 준비할 땐 울기도 했어. 억울해서.”
내 말을 듣던 료코가 고개를 저었다.
“너랑 다른 분들이 노력하는 거 알 아. ……다들 대단한 사람들인데, 그 런데 노력까지 하면 난 대체 어떻게 따라가야 해? 넌 내 기분 몰라.”
이제야 그녀의 진짜 고민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매일 연습하는데, 더 이상 할 수 없을 만큼 하는데도 벅차단 말이야. 네가 이런 기분을 알아?”
료코는 지금 음악가라면 한 번쯤, 아니, 평생을 고민하게 될 문제를 처음 접했다.
재능의 차이.
평생을 괴롭히는 그 벽을 느끼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