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94화 (294/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294화

64. 베토벤을 계승한 자(5)

‘ 아아.’

아름답게 탄생한 세계에 감동하던 이들은 바이올린이 그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가슴 졸였다.

아니나 다를까.

관악기의 묵직한 음색이 대두되면서 거센 바람이 일었다.

파도가 일었다.

그럼에도 불꽃처럼 이는 희망의 노래.

첼로가 더해져 펼쳐진 삼엄한 전경 은 인류가 처했던 고난을 상징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감상하던 관 객들은 문뜩 벼락처럼 내리치는 팀 파니에 소스라친다.

요동치던 그들의 심장 소리에 맞춘 그 리듬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수십 번을 들었던 곡이었으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 의한 합창은 마 치 음표 사이에 관객들을 가둬놓는 듯했다.

상상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위대한 베토벤이 만든 최후의 교향 곡은 잠시도 쉬지 않고 관객들을 농 락했으며.

겁에 질린 관객.

이제 찬란했던 태양은 먹구름에 가 린 지 오래다.

어둠 속.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두려움이 뼛속 깊이 드리운다. 한 치 앞도 내 다볼 수 없는 좌절 속에 시야를 밝혀주는 건 폭력과도 같은 벼락뿐.

점멸하는 시야에 비치는 건 썩은

나무와 파도가 높이 치는 바다.

희망이란 조금도 없었다.

포기하자.

그러면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아도 될 터.

심상 속의 관객들은 생각하길 포기 하고 스스로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나 그때.

더 없는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희 망의 전조.

누군가의 노래가 들리기 시작한다.

감고 있는 눈 너머로 빛이 비치기

시작한다.

혹시나. 혹시나.

관객들의 가슴에 희망이 싹 텄고 마침내 작은 용기를 내 눈을 떴을 때 펼쳐진 위기의 세계.

아침을 여는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

오, 벗들이여. 이 소리가 아니오.

즐겁고 환희에 찬 노래를 부르지 않겠는가!

불운했던 환경과 음악가로서 그 생 명을 잃었음에도 처절하게 절벽을 기어올랐던 불멸의 음악가.

그 평생 포기하지 않았던 악성의 노래가 펼쳐졌다.

‘아아아.’

그 드라마틱한 전개에 관객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지독한 절망을 느끼며 도망칠 생각 조차 할 수 없었던 그들은 베토벤이 비추는 한줄기 빛만을 응시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희망 과 열정이 몸을 지배해 그들도 모르는 사이 응원하고 있었다.

나아가라고.

저 멀리 위치한 태양을 향해 날아 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환희여, 환희여!

일어설 수 없었던 이들이 이제 빛을 따라 걷기 시작한다.

빛이 가득한 성소로!

거룩한 정열에 의지해 함께 나아간다.

그 어떤 때보다 영혼이 충족되어 감에 관객들은 그야말로 환희의 송 가를 불렀다.

전 세계가 베를린의 노래에 전율했다.

‘잘 만들었단 말이야.’

관객들이 벅찬 만큼, 배도빈은 그의 종들이 연주하는 교향곡에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해했다.

다시 태어난 악성은 수많은 지휘자 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자신의 교향곡을 들었지만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만큼 만족한 적은 없었다.

완성도를 떠나 그가 바랐던 형태와 가장 유사했기에.

‘아마 나도 이렇게 이끌었겠지.’

마왕은 안심하고 뒷짐을 진 채 자 신이 만들어낸 세계를 천천히 음미 하였다.

이내 모든 연주가 끝나고.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를 들은 모든 이가 절정을 느꼈다.

연주가 끝난 뒤에도 객석은 전해지는 깊은 카타르시스에 환호하는 것 조차 잊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팔을 내리 고 돌아서자.

그제야 녹초가 된 관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환호하는 이는 없었지만 연주를 들 은 모두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흐아아.”

베를린 필하모닉의 압도적인 연주를 들은 프란츠 페터가 앓는 소리를 냈다.

음악을 접할 기회가 적었던 소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가장 존경하는 두 음악가 중 한 명인 베토벤의 9 번 교향곡을 처음 들었다.

그것을 완벽하게 설계된 콘서트홀 에서 최고의 오케스트라에 의해 들 으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마치 약에 취한 듯.

베를린 필의 연주에 그의 재능이 반응하여 말 그대로 쾌락의 저편으로 인도했다.

“형아, 괜찮아?”

한참이 지난 뒤에야 프란츠 페터는 동생의 부름 덕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 응.”

“이. 지지.”

알베르트 페터가 손으로 입을 훑었고 프란츠 페터는 그제야 황급히 침을 삼켰다.

무대 위는 결과 발표를 하기 위한 준비로 분주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프란츠 페터가 입을 열었다.

“알 ”

“응?”

“내가 합창 같은 곡을 만들 수 있을까?”

“무리야.”

동생의 말에 잠시 충격을 받았지만 프란츠 페터는 당연한 일이라 생각 했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치만 난 형이 해낼 거라 믿어.”

그때 알베르트 페터가 지나가듯이 말했다.

분명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동생의

응원에 프란츠 페터는 섬뜩하기까지 했던 1악장과 2악장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럼으로써 더욱 빛을 발한 4악장 에 대해서는 역시나 이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 배도빈 님한테 배울래. 그래서 언젠가는 꼭 저런 곡을 만들 거야.”

"음..."

소년이 미래를 다짐한 순간.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의 사회를 맡은 자르제가 무대 위에 올라섰다.

“정말 멋진 연주였습니다. 큰 감동을 준 런던 심포니와 베를린 필하모닉 A에 다시 한번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자르제의 말에 넋이 나갔던 관객들 은 그제야 환호로 두 악단을 칭송했다.

“결과를 발표해야 하는 입장으로서 정말 난감하네요. 그러나 결승전에 오를 악단은 가려야겠죠. OOTY 오케스트라 대전 세미파이널! 런던 심 포니와 베를린 필하모닉!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브루노 발터의 경합 결과를 공개합니다!”

자르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베를린 필하모닉은 입을 꽉 닫았다.

오늘 연주한 베토벤의 9번 교향곡 은 그들의 역사와 같았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집권하고 40년.

베를린 필하모닉이 송년 연주회마 다 연주하는 합창은 그야말로 그들 의 아이덴티티와 같았다.

그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포기하 지 않고 나아가 빛을 쟁취하는 불멸 의 정신.

위대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유지를 이어받은 이들의 노래였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하모닉의 단원들은 단 한순간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루트비히가 평생을 걸쳐 노래했던 대로.

후계자를 잃고 강력한 지지자가 떠 나고 외세에 밀려 잠시 움츠렸어도, 희망이 떠나려 했음에도 결국에는 그들의 품으로 돌아왔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가 최고다.’

콘서트홀 중앙에 위치한 대형 스크 린에 OOTY 오케스트라 대전 세미 파이널 1차전의 결과가 비쳤다.

베를린 필하모닉 A

심사 위원단: 30(300점) 팬 투표: 37.8(3,246,537표) 합계: 67.8(파이널라운드 진출)

런던 심포니

심사 위원단: 30(300점) 팬 투표: 32.2(2,765,570표) 합계: 62.2

“총투표수 6,012,107표! 그중 54퍼 센트의 지지를 획득한 베를린 필하

모닉 A가 파이널라운드 진출을 확 정 짓습니다!”

“그렇지!”

사회자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베를린 필하모닉 B의 단원들이 일어나 소리쳤다.

언제나 품위를 지켰던 베를린 필하모닉 A단원들도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주먹을 불끈 쥔 그들의 얼굴은 성 취감으로 가득했다.

최고의 연주를 해냈다는 만족감에.

“들어. 들어!”

“무슨 짓이냐!”

“빨리. 빨리!”

평균 연령 45세의 연주자들이 빌 헬름 푸르트벵글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늙은 그들의 지휘자와 본인 들의 허리를 의식하고는 그들이 되 찾았던 희망을 향해 달려갔다.

배도빈은 영문을 모른 채 달려오는 단원들을 반갑게 맞이하다 또다시 끌려 나가고 말았다.

“만세!”

“이거 놔!”

“만세!”

“놓으라국헙

“배도빈 악단주 만세!”

“베를린 만세!”

“결승에 못 올라오면 해임이야 해임!”

“갈 테니갑.”

“우리가 최고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모든 이가 결승 진출을 자축하고 있을 무렵, 세계는 여전히 두 악단이 남긴 감동을 음미하고 있었다.

백작 마리 얀스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하모닉의 합창을 두고, 베토벤이 다시 태어난다면 이 와 같은 연주를 했을 거라 평했고.

제르바 루빈스타인은 오늘의 연주를 두고 베를린 필하모닉이 쌓아온 유구한 역사의 응집체라 표현했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드물게 좋은 연주라는 짧은 코멘트를 남겼다.

차채은은 인터넷 창을 새로 고칠 때마다 새로운 글이 수십 개씩 올라 오는 모습을 보며 차가운 커피를 마셨다.

‘정말 대단했어.’

어린 평론가에게 오늘,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는 자신의 글 솜씨를 탓할 정도로 벅찬 경험이었다.

어떤 표현을 쓰더라도 현장에서 느 꼈던 감동을 표현할 순 없었다.

‘오빠가 선택한 이유가 있었던 거 야.’

찬 커피를 다시 한번 마셔 진정한 차채은은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월간 잡지 관중석과 약속 한 원고가 작성 중에 있었다.

부모님을 설득해 학교 출석이 위태로울 지경까지 이르면서도 잘츠부르크에 온 이유는 모두 이것을 완성하 기 위함이었다.

이필호 편집장 역시 차채은의 초고 에 감동받아, 두 달 이상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을 관람시켜줄 정도 로 공을 들인 원고는 이제 막 완성 직전이었다.

‘슬슬 제목도 지어야 하는데. …… 뭐라고 하지?’

이런저런 단어를 떠올려도 좋은 제 목이 생각나지 않았기에 잔뜩 인상을 쓰고 있기를 한참.

차채은이 조심스럽게 키보드를 눌렀다.

“오반가?”

백스페이스키를 쭉 누른 뒤, 처음 평론을 쓰게 된 계기를 줄글로 적었다.

‘모차르트는 무슨.’

문장을 한 번 다듬자 이거다 싶은 제목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무난한 문구가 완성되었다.

배도빈 음악의 철학

-베토벤을 계승한 자

큰 고민을 해결한 차채은은 사람들 이 배도빈의 음악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길 바라며 다시금 원고 작 성에 집중했다.

늦은 밤까지 타이핑 소리가 방을 채워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