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292화
64. 베토벤을 계승한 자(3)
이번 일로 꽤 시끄러워진 듯하다.
베를린 필하모닉 공식 홈페이지라 든가 팬 카페, 히무라가 예전에 만 들어 둔 SNS 계정 등에 너무 많은 글이 올라와 핸드폰을 켜놓을 수가 없었다.
따로 하나 장만해 두길 다행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차명운, 이시하라 린, 블레하츠, 노먼, 한스 짐 같은 이들에게 온 반가운 연락을 받지 못 했을 테니 말이다.
특히 노먼은 또 한 번 함께 작업 하길 바라는 눈치였는데 이번 일로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물론 가까운 이들도 놀라긴 마찬가지다.
“악단 만든다면서 베를린 필하모닉을 인수하겠단 뜻이었어? 해상 오케스트라는? 아니, 그보다 그럼 지금 베를린 필은 어떻게 되는 건데?”
황당해 이것저것 묻는 최지훈과.
“아, 답답해. 자세히 좀 말해봐.”
가슴을 치며 일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묻는 차채은.
“이제 사장님이야?”
그리고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진달 래가 이것저것 물어오는 통에 정신 이 없다.
“나도 몰라.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베를린에 남기로 했다니까 마음대로 처리하신 일이야.”
채은이가 무엇인가를 서둘러 적는다.
“그럼 경영 쪽도 관리하는 거야?”
“사장님이네!”
“아니. 경영은 기존 사람들에게 맡길 거야. 사업가도 아니고 각자 위 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
“그래도 뭐 할 때는 편하겠다.”
“그렇지 뭐. 이따 할아버지 온다 했으니 만나서 이야기 좀 들어보려 고.”
“사장님, 나, 나 노래 부르고 싶어. 뭐든 할게! 응?”
“아직 멀었어.”
그렇게 때 아닌 폭풍을 넘기자 어 제 큰 사고를 친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할아버지!”
“어이구! 우리 도진이 많이 컸네.
껔꺼껔껔
도진이가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달려들었다.
여든이 넘어서도 도진이를 번쩍 들어 올리는 걸 보니 건강하신 듯해 안심했다.
“자, 다음은 도빈이.”
“허리 부러져요.”
내게도 팔을 펼치시기에 안아드렸다.
“어서 오세요, 장인어른.”
아버지와 어머니도 인사를 나눴고 오랜만에 가족끼리 조용히 보내기 위해 이동하는 중, 도진이는 할아버 지의 손을 잡은 채 떨어질 줄 몰랐다.
오랜만에 만난 할아버지가 무척 반가운 모양이다.
어머니께서 탓하듯 말씀하셨다.
“과했어요. 갑자기 그러면 어떡해요?”
“뭐가 말이냐?”
“베를린 필하모닉 인수했다면서요. 게다가 도빈이 이름으로.”
“도빈이가 베를린에 남기로 한다는 데 달리 방도가 있느냐. 그렇지?”
할아버지가 웃으며 물으셨다.
악단 설립에 관련해 이것저것 도움을 받았던 탓에 베를린 필하모닉에 남기로 결정하고는 곧장 말씀드렸더 니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일을 처 리하셨다.
그러나 베를린 필하모닉의 재정만 으로는 내가 바라는 일을 할 수 없었기에 초기 자본 투자를 위해서라 도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후회 없는 투자일 거예요.”
“암 그래야지. 내 손주라면 해낼 거라 믿는다.”
나와 도진이라면 뭐든 해주실 분이지만 이번 일 같은 경우에는 어디까 지나 공적인 일.
선물이 아니라 투자라 여겼기에 할아버지의 선의를 받아들였고 그와 같은 생각을 전하자 할아버지는 어렸을 적부터 그런 자립심이 참 기특 하다며 더욱 기뻐하셨다.
“그래. 자넨 진척이 있었다고?”
“네. 생활한 흔적을 발견했는데 처음 예상과 달리 도시 국가가 아닌 유랑 민족으로 밝혀졌습니다.”
“20년 만에 겨우 흔적을 찾은 거 로군.”
“네. 탐사팀이 꾸려지는 대로 이동경로를 추적해 보려 합니다.”
“또 긴 시간이 들겠어.”
“하하. 이번에 터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위험할 뻔했죠.”
“진희랑 아이들을 외롭게 두지 말게.”
“네.”
아마 아버지께서 학부생 시절부터 찾았던 테메스에 관한 이야기인 듯하다.
음악으로 영적 치료를 했다는 문화를 잠깐 들었는데 이번에 그들의 터를 발견하셨다니.
몰랐던 일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 거예요?”
“그래. 우선은 서아시아 쪽이야. 도빈이도 갈래?”
걱정스레 물었더니 잔뜩 설렌 표정을 보이신다.
푹신한 침대와 에어컨이 있는 현대 문명과 음악을 포기하면서 갈 리가 없다.
“이이는? 갈 거면 혼자 가요. 도빈이가 그런 데를 어떻게 가요?”
“하하하하. 농담이야.”
저렇게 좋아하시니 어쩔 수 없지만 떨어져 있다 보니 도진이도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하기도 하고.
그것을 떠나 어머니도 나도 아버지 가 힘든 환경에서 일하는 게 그리 달갑지 않다.
대학과 협회에서 받는 지원이 넉넉 지 않아 조건도 열악한데다, 시가지를 크게 벗어난 야외에서 활동하시 는지라 불편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니 말이다.
“음. 그런데 보아하니 너희 지내는 곳이 마땅치 않더구나. 옮기는 게 어떠냐.”
그에 반면 할아버지는 지나치게 좋은 환경을 바라신다.
내 기준에도 그리 좋은 호텔은 아니지만 그래도 두 개의 레스토랑이 있고 연회장과 같은 부대시설도 있으니 적당히 묵기엔 나쁘지 않은데 할아버지 눈에는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는 딸 가족이 안쓰러운 듯하다.
“안녕하세요.”
“아, 아, 안녕하세요.”
다음 날.
연습을 하기 위해 모였더니 단원들이 슬금슬금 피하거나 인사를 해도 무척 어색하게 행동했다.
“무슨 일 있어요?”
소소에게 물었더니 고개를 젓는다.
무슨 일인가 고민하다 문득 연습실에 소소가 있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소소는 오늘 연습 없잖아요.”
“윤희가 놀러가자고 했어.”
소소가 연습실 구석에 있는 나윤희를 가리켰다.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으로 돌아보 곤 웃는다.
‘쉬면 좋을 텐데.’
숙소에서 쉬면 좋을 것을 감이 떨 어지면 안 된다는 이유로 나왔을 게 뻔하다.
“너무 오래 있진 말아요. 소소도 결승 준비로 바쁠 테니 무리 말고요.”
"응."
소소가 나윤희에게로 향하자 찰스 브라움이 다가왔다.
어제 퇴원했다고 들었는데 엉덩이를 걷어차 주려다가 말았다. 이번에 야말로 제 역할을 해줘야 한다.
아파선 곤란하다.
“무슨 일 있었어요?”
단원들이 이상한 걸 묻자 찰스 브라움이 주변을 둘러본 뒤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한 거 아니겠어?”
“뭐가요?”
“고용주가 앞에 있으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떠들고 놀던 네가 갑자기 악단주가 되었잖아. 다들 놀라는 것 도 무리는 아니지.”
“ 아.”
이런저런 직책과 직위가 붙는 걸 떠나 악단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단원들이 어려워할 수도 있겠다.
연습 전에 확실히 해둬야겠다.
“다들 주목해 주세요.”
평소에는 왁자지껄해도 연습과 실 연 때는 진지했던 분위기가 좋았는데 지금은 다소 과하게 경직되었다.
“소식을 들어서 알겠지만 베를린 필하모닉을 인수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관계가 달라지는 건 아니에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지내요.”
“……커흠.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모두 가만히 눈치만 살피는 도중 피셔 디스카우가 나섰는데 그마저도 몹시 불편해 보였다.
“쓸데없는 일에 낭비할 시간 없어요. 다음 상대는 암스테르담이니 지금 당장 예전으로 돌아가세요.”
“그렇게 말해도……
“감봉할 거예요.”
“그게 말이 되냐!”
“말도 안 돼!”
역시 급여는 좋은 협박 수단이다.
단원들이 금세 전과 같아졌다.
누군가 푸르트벵글러보다 폭군이잖아 하고 중얼거렸고 덕분에 한 번 크게 웃을 수 있었다.
“좋아요.”
마음을 다잡고 브리핑을 시작했다.
“우리는 30분 이상의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해요. 가능하다면 시간이 부족하니 레퍼토리를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 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 럼 우린 또 멋진 연주를 완성할 거 예요.”
단원들이 고개를 굳게 끄덕였다.
팬들이 새로운 음악을 바라는 마음 만큼이나 단원들도 만만치 않다. 쉬 운 길만 걸어서는 발전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남은 시간은 3일. 촉박합니다. 다 들 그제 나눠준 악보로 확인했죠?”
개인 연습을 할 시간을 이틀 주었기 때문에 다들 어느 정도 곡을 소 화한 상태일 거다.
역시나 다들 긍정했고 디스카우가 손을 들었다.
“네. 디스카우.”
“우리 타악기 섹션은 정말 세미파 이널에서 빠지는 거야?”
“네. 교향적 무곡에서 타악기는 정 말 중요해요. 디스카우를 믿고 맡기는 거니 결승전까지 완벽하게 준비 해 주세요.”
“음. 맡겨 둬!”
본래대로라면 세미파이널에서 연주 할 ‘머리 하나 차이로(Por una Cab eza)’가 결승 무대를 장식할 예정이었지만, 라운드를 하나 더 치르게 되면서 그간 연습만 해온 라흐마니 노프의 ‘교향적 무곡’을 더하게 되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윤희 의 투혼이 단원들을 더욱 자극했고 세미파이널과 함께 연습하면서도 어느 정도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나 중요하게 여긴 타악기에 있어서도 베테랑인 디스카우에게 잘 전달해 두었으니 마무리 준비를 잘 해줄 거라 믿는다.
“질문 있어!”
“네, 마르코.”
“피아노는 누가 연주해?”
“아.”
솔로 바이올린과 솔로 피아노가 필요한 곡인데 아직 피아니스트가 누군지 알려주지 않았다.
시간을 확인하니 딱 약속한 시각.
눈썹을 좁히니 마침 연습실 문을 열고 가우왕이 들어왔다.
선거와 취임식 등으로 정신이 없었는데 이제 보니 소소가 가우왕을 보러 온 듯하다.
다들 가우왕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가우왕 씨 이미지랑 좀 다르지 않아?”
“응. 다른 데랑은 협연 거의 안 해서 거만한 줄 알았는데.”
“도빈이가 부르면 금방 오는구나.”
그런 이미지인 줄은 몰랐다.
내가 보기엔 찰스 브라움이랑 같이 그런 푼수도 없는데 말이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못 올 데라도 온 거야?”
“아뇨. 들어와요.”
가우왕이 못마땅하게 들어왔고 찰스 브라움을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찰스 브라움도 마찬가지다.
“잠깐. 이 녀석이랑 한다는 말은 없었잖아?”
“이런. 천박한 피아니스트와 함께 할 줄 알았다면 소소 악장에게 맡겼을 텐데.”
“천박? 야, 꼬맹이, 저 찌질한 놈 이 성질 긁는데.”
예전에 가우왕과 협연할 때는 소소 가 악장을 맡아서 몰랐는데 이제 보니 둘 사이가 좋아 보인다.
“아는 사이에요?”
“흥.”
두 사람이 대답은 않고 고개를 돌렸는데 마르코가 다가와 귓속말을 해주었다.
요약하자면, 지금은 얌전해졌지만 두 사람 다 예전에는 튀고 싶은 마 음에 퍼포먼스라는 명목으로 갖은 기행을 다 했는데, 이미지가 겹쳐 악기가 다름에도 드물게 라이벌처럼 여겨졌다 한다.
피아노의 황태자 가우왕.
바이올린의 황태자 찰스 브라움.
여성 팬들에게도 인기가 많아 서로가 없었다면 더 큰 인기를 누렸을 거라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두 사람 다 애처럼 굴지 말고 빨리 앉아요.”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겠어. 그래, 2라운드에서 함께했던 최 군은 어때? 실력 괜찮던데.”
“저런 머저리에게 세미파이널을 맡기다니 너도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 네. 나윤희란 바이올리니스트가 좋겠어.”
“지훈이는 따로 연습하는 게 있고 나윤희 악장은 한동안 쉬어야 해요. 불만이면 두 사람 다 나가요. 다른 사람 구하게.”
이제야 말을 듣는다.
가우왕은 내가 약속한 헌정곡 때문에라도 억지로 피아노 앞에 앉았고 찰스 브라움도 마찬가지.
결국에는 할 거면서 칭얼댄다.
“자, 그럼 시작해 보죠.”
타악기 주자들이 따로 연습하기 위해 연습실을 떠났고 찰스 브라움에게 신호를 주었다.
현악기의 아름다운 음률이 귀를 간지럽 힌다.
프랑스 태생의 작곡가 카를로스 가 르델이 1935년에 만든 ‘머리 하나 차이로’는 정열의 음악 탱고를 유행 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곡이다.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어릴 적 사카모토의 자택에서 여러 영화를 볼 때 우연히 접했었다.
그의 서재에 놓인 ‘여인의 향기(1993)’라는 영화는 무척 인상적이었는 데 특히나 ‘머리 하나 차이로’가 반 주로 나오는 장면은 오랫동안 가슴 에 남았다.
그런 만큼 언젠가 다루고 싶었고 오케스트라 대전의 결승을 장식할 곡으로 준비했었다.
‘아쉽게 되었지만 암스테르담이 상대라면 아깝지 않지.’
본래 4〜5분 정도로 짧은 곡이었기에 불새 협주곡과 같이 처음부터 다 시 작업해야 했으나 명곡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퍽 즐거웠다.
나와 베를린의 연주로 이 아름다운 선율이 다시 한번 조명 받는다면 그 것으로 만족한다.
“자, 한 번 더 가죠. 모데라토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