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290화
64. 베토벤을 계승한 자(1)
세미파이널(4강)을 맞이한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은 배도빈-나윤희 의 불새로 인해 그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더욱이 세계 최고라 불리는 유력 악단 중에서도 손꼽히는 오케스트라 들의 대진에 팬들은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절묘하게 구성된 대진표로 인해 파생되는 스토리는 오케스트라 대전을 즐기는 큰 즐거움이었다.
세미파이널 1차전.
런던 심포니 대 베를린 필하모닉 A는 2010년대부터 라이벌 구도를 가져왔던 두 악단의 자존심 대결임과 동시에.
한 시대를 풍미한 것을 넘어서 음악사에 길이 남을 두 거장의 만남이 기도 했다.
ㄴ 1차전은 진짜 브루노 발터고 푸르트벵글러고 칼 갈고 나오겠는데?
ㄴ 둘이 사이 안 좋음?
ㄴ 안 좋기보다는 라이벌이라고 봐 야지. 애초에 둘이 고등학교 동창임.
ㄴ 엌 ㅋㅋㅋㅋ 뭐라고?
ㄴ 둘 다 베를린 출신이고 같은 학교 나왔음.
ㄴ 브루노 발터가 영국에 간 뒤에도 욕 안 먹은 이유가 런던 필하모닉이나 다른 데처럼 헛소리 안 해서임.
ㄴ 해먼 쇼익한테 입 좀 닫으라 했었음. ㅇㅇ
ㄴ 그럼 사이좋겠네.
ㄴ ㅋㅋㅋㅋ 넌 친구랑 게임 점수로 티격태격하면서 저 사람들은 안 그럴 거 같냐?
ㄴ 둘 다 대단한 만큼 자존심도 셈.
ㄴ 추구하는 음악도 다르지. 푸르트벵글러가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 에 있어서 탑인 반면 브루노 발터는 모차르트, 말러 음악의 권위자임. 오케스트라 대전에서는 멘델스존도 홀 륭했고.
ㄴ 브루노 발터는 꽤 여기저기 다녔네? 빈이랑 뮌헨, 뉴욕에서도 오래 있었고.
ㄴ 같은 도시 출신의 동갑이 이렇게 다르네.
ㄴ 그러니까 더 질 수 없지. 모르긴 몰라도 두 사람 다 엄청 신경 쓰고 있을걸?
ㄴ 내 생각도 그럼. 브루노 발터는 중도성향이었지만 애초에 2010년대 후반부터 런던이랑 베를린은 거의 원수지간이었으니까. 단원들부터 이를 갈고 있을 거임.
2010년대 후반은 런던의 승.
2020년대 초반은 베를린이 압도했던 만큼 이번 대진은 양국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 중 어느 쪽이 우위에
있는지 확실시하는 자리였다.
또한.
2차전에서 맞붙게 된 암스테르담 로얄 콘세르트허바우와 베를린 필하모닉 B는 과거와 미래의 경합으로 여겨졌다.
수십 년간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로 손꼽혔던 암스테르담과 최근 1년 사이 가장 많은 인기를 끈 베를린 日는 앞으로의 음악사를 결정짓는 무대가 될 거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대전의 최대 관 심사는 과연 베를린 필하모닉 A와 B가 결승전에서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여부였다.
그에 따라 세미파이널을 나흘 앞둔 저녁, 오케스트라 대전 뉴스가 관련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세계인의 사랑 속에 오케스트라 대전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오늘은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을 주최한 세계 클래식 협회 이사, 미카엘 블레하츠 씨를 모셨습니다. 반갑습니다, 블레하츠.
-반갑습니다.
-여러 이야기가 나오는데 역시 베를린 필하모닉의 두 악단이 결승에서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가 최근 가장 이슈로 오르고 있죠. 블 레하츠 씨는 세미파이널이 어떻게 진행될 거라 보고 계십니까?
-하하. 그 질문만큼은 받기 싫었는 데 처음부터 꺼내시네요.
-시청자 분들의 시간은 소중하니 까요. 하지만 곤란해하시니 질문을 바꿔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블레하츠 씨는 세미파이널에 오른 4개 악단 중 3곳과 협연을 하셨죠?
-네. 암스테르담과의 협연이 가장 최근이었습니다.
-정말 멋진 무대였죠. 그래서 어떤 곳이 가장 마음에 드셨습니까?
-출연이 후회되네요.
-짓궂다는 말은 종종 듣습니다.
-하하. 음……. 베를린 필하모닉의 경우에는 관객과 소통한다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마에스트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 가야 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지 휘자죠.
-그럼 1차전의 승자는 베를린 필하모닉에 손을 들어주시는 거네요.
-하하.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죠.
마에스트로 브루노 발터는 또 다른 면에서 관객을 감동시키죠. 푸르트벵글러가 중후함과 격정을 가졌다면 발터는 서정성과 낭만이 무기입니다. 저로서는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판단하기 어렵네요.
뚝 _
그러지 않아도 배도빈이 떠나기로 마음먹었음을 확인해 심기가 불편했던 푸르트벵글러가 신경질적으로 리 모컨을 던졌다.
“괘씸한 놈. 어느 쪽이 낫다고 판 단할 수 없어?”
푸르트벵글러가 미카엘 블레하츠의 말을 반복했다.
그의 수준에 부합하는 몇 안 되는 피아니스트라 아꼈던 푸르트벵글러는 이번 기회에 일찍 은퇴한 것까지 더해 잔뜩 혼을 내줘야겠다고 생각 했다.
“빌, 나에요.”
차를 쭉 들이키자 카밀라 앤더슨이 문을 두드렸다.
그로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써 각자 다른 방을 사용하는 게 영 불편하다 여기며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이 입을 맞추었다.
카밀라가 저녁 식사를 테이블에 펼치고는 서류 하나를 꺼냈다.
“먹으면서 들어요.”
“식사는 여유롭게 하지.”
“밥 먹으면 또 악보 볼 거잖아요. 급한 일이니 빨리 처리해야 해요.”
“급한 일?”
푸르트벵글러가 카밀라 앞에 포크 와 냅킨을 두며 물었다.
“상임 지휘자직이 공석이에요.”
“음? 일단은 케르바가 맡고 있는 거 아니었나?”
“당신이 돌아온 뒤로 지휘자 일을 안 했잖아요. 규정상으로는 해임된지 오래라고요. 오케스트라 대전 준비로 바빠서 체크하지 못했는데 일 단은 현재 공석이에요.”
“이런.”
“단원들이 알려줘서 알게 되었는데 아무튼 그와 같이 들어온 건의사항이 있어요.”
카밀라가 푸르트벵글러에게 서류를 넘겨주었다.
푸르트벵글러가 그것을 받아들어 읽고는 눈썹을 좁혔다.
“임시 선거를 하자는 말은 그렇다 하고 이건 뭐야?”
“ 뭐가요?”
“상임 지휘자로서의 자격이 있는 인물이 악단 내에 있을 경우 만장일 치에 한해 즉시 선임할 수 있게 하 자는 말 말이야.”
푸르트벵글러의 말에 카밀라는 고기를 썰며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당신의 경우도 있으니까요. 다들 하루라도 빨리 당신이 재취임하길 바라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면서 푸르트벵글러의 입에 스테이크를 가져다댔는데 그가 고기와 카밀라를 번갈아 보며 눈썹을 더욱 좁혔다.
“수상한데.”
“뭐가요?”
“저번 일로 투표 관련된 일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운영국이나 사무국 에 맡기면 될 일을 녀석들이 나선 것도 이상하고.”
“다들 빌을 사랑하니까요. 빨리 먹 어요. 팔 떨어져요.”
푸르트벵글러가 카밀라의 말에 의 심을 거두고 고기를 받아먹었다.
그 순간 육즙이 혀를 감았고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육고기의 풍미에 감동하고 말았다.
“맛있어요?”
그러나 카밀라의 질문으로 인해 정신을 차린 푸르트벵글러는 확신하고 말았다.
“왜 오늘은 콩고기가 아니라 소고기지?”
“그야 그간 고생했으니까요. 도빈이 일로 상심도 했을 테고. 그, 그러고 보니 완전 채식이 도리어 몸에 안 좋대요. 이제 종종 먹어요. 담배는 안 되지만 와인 정도라면 괜찮고.”
푸르트벵글러는 갑자기 친절해지고 말이 많아진 연인을 뚫어지게 관찰 했다.
한 번 당한 실각의 상처가 그의 촉을 날카롭게 벼린 덕이었다.
“무슨 일이야?”
“……후.”
카밀라 앤더슨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털어놓았다.
“단원들이 이번 기회에 도빈이까지 상임 지휘자로 올리고 싶대요.”
“뭐?”
“당신이 총감독으로 있고 도빈이가 예술 감독으로 있으면 되지 않겠냐 고 하더라고요. 그럼 정이든 언론이 든 팬들이든 여러 이유로 도빈이도 다시 생각해 보지 않겠냐고.”
카밀라 앤더슨은 당장 폭발할 푸르트벵글러를 어떻게 달랠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정신이야!’라며 단원들을 이 잡 듯이 잡아 날뛸 그를 상상하며 잔뜩 움츠렸는데.
“……계속해 봐.”
“네?”
“계속해 보라고.”
예상 밖의 반응이었다.
카밀라는 묘하게 얌전한 푸르트벵글러의 태도를 이상히 여기면서도 설명을 이어나갔다.
“단원들은 B팀이 애초에 이벤트랑 순회공연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으니 도빈이가 바라는 걸 이뤄줄 수도 있지 않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녀석의 발을 묶자고?”
“그건 아니에요. 단지 도빈이가 베를린 필하모닉에서도 바라는 걸 이룰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 해요. 또 그러고 싶어 하고요.”
푸르트벵글러는 포크를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러더니 창가로 향했다.
해가 저문 잘츠부르크의 야경은 낮과 달리 차분했다.
“고집 센 녀석이 받아들일 리 없어. 명분도 부족하고. 게다가 상임 지휘자직을 바라지도 않은 이에게 준다니. 베를린 필하모닉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당치 않은 일이야.”
푸르트벵글러의 말에 카밀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못 할 것도 없지.”
“……네?”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
‘무슨 일이지?’
푸르트벵글러의 호출을 받아 A팀이 머무는 호텔을 찾았다.
알릴 이야기는 어제 모두 했다고 생각했는데 케르바 슈타인이나 다른 악장들에게 물어도 이유를 모르는 눈치다.
‘묘하게 피하는 것 같고.’
나윤희는 특히 내 눈을 마주하지 못했는데 무슨 일인가 싶다.
“오늘 상임 지휘자직이 공석인 것을 이유로 임시 선거를 서두르자는 건의를 받았다.”
단원들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란 눈치다.
몇몇은 덜덜 떨기까지 했는데 누군가 옷을 잡아 돌아보니 나윤희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울어?’
“너희가 도빈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기에 이번 일은 넘어가겠다. 그러 나 다시는 상임 지휘자를 선출하는 일의 가치를 퇴색시키지 않았으면 한다. 할 말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모두 풀어내도록.”
상갓집이 따로 없다.
단원들이 하나둘 끅끅 곡을 해대더 니 갑자기 달려들었다.
“가지 마아아.”
“연습 열심히 할게. 잘할게. 이젠 안 틀릴게.”
“ 끄으으윽.”
“여기서도 할 수 있잖아. 가고 싶은 데 가면 되잖아.”
이들의 반응을 보고나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푸르트벵글러를 강제로 쉬게 했던 것처럼 날 선임해 베를린 필하모닉에 남도록 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잠깐만요. 잠깐.”
일단 진정시키기 위해 달랬지만 막 무가내로 달려드는 통에 어쩔 수 없이 한동안 그들의 눈물과 반성을 받 아줘야 했다.
간신히 떼어낸 뒤에야 제대로 대화 할 수 있었다.
“우선 오해부터 풀고 가요. 베를린 필하모닉이 부족하단 생각 단 한 번도 한 적 없어요. 그러니 그런 생각 은 하지 마요. 진짜 화낼 거예요.”
다들 착하게도 고개를 끄덕인다.
“떠나는 건 정말 더 넓은 세상을 알고 싶기 때문이에요. 이기기는 했지만 우리가 상대했던 악단들 모두 그만의 장점을 가지고 있었잖아요. 그렇게 다양한 오케스트라가 있는 데, 다른 음악은 더욱 많을 텐데 안 주하고 싶지 않아요.”
다 큰 녀석들이 또 운다.
하지만 그 얼굴들을 보니 나도 모 르게 목 아래가 묵직해졌다.
“또 베를린 필하모닉의 정체성을 바꾸고 싶진 않아요. 푸르트벵글러 와 여러분이 쌓아온 걸 제 손으로 바꿀 순 없어요.”
“아니.”
푸르트벵글러가 다가왔다.
“네가 나와 단원들을 위하는 마음 은 안다. 하지만 그것이 네가 떠나려는 이유라면 우리 모두를 기만하는 일이다.”
그의 강직한 눈이 나를 온전히 바 라보고 있다.
“난 베를린 필하모닉이 박물관으로 남길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단원 모두가 그러하다. 네가 베를린 필하모닉에 들어온 순 간부터 우리는 변하고 있었다.”
푸르트벵글러가 단원들을 둘러보았다 .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눈시울이 붉어진 단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케르바 슈타인은 이제 머리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고 마누엘 노이어는 잔주름이 생겼다.
부활을 녹음할 때만 해도 정신 사납던 이승희는 이제 단원들이 가장 의지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
철딱서니 없었던 한스 이안은 수염이 제법 어울려졌고.
그 외 단원들 모두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의 말대로 이러한 겉모습만이 아니다.
선 굵은 음악, 나를 닮았던 베를린 필하모닉은 내가 이 세계에 적응해 나가며 변화한 것처럼 달라져왔다.
내가 남겼던 곡을 비롯해 브람스, 바그너, 부르크너 등의 곡을 주로 연주하던 예전과 다르게 지금은 여 러 방면의 곡을 다양하게 접근하고 있었다.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위대한 베토벤이 말했지. 음악이 아름답기 위해.”
“범하지 못할 규칙 따윈 없다.”
“그래.”
푸르트벵글러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럴 용기가 없는 건 네 가 아니더냐.”
내가 남긴 말을 인용하는 푸르트벵글러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의 말대로.
나는 멍청하게도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오케스트라가 바뀌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원들을 둘러보니 다들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나를 따를 거라 말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