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89화 (289/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289화

63. 범죄자들(3)

푸르트벵글러는 한동안 애꿎은 차 만 들이켰다.

“어쩔 수 없지. 그래. 오케스트라를 만들 생각이라고?”

“기존의 형태랑은 많이 다를 거예요. 인원도 적을 테고.”

“유동적일 수는 있어도 인원이 적 으면 그만큼 제한되는 일도 많지 않느냐.”

“실내관현악단이긴 해도 그렇게까 지 적게 가진 않을 거예요. 그럼 푸르트벵글러 생각처럼 대단위 곡은 연주 못 하게 될 테니까. 허용 범위 내에서 다양한 음악을 할 수 있게 구성하려 고요.”

“……그편이 네게 좋겠지. 하지만 해상 오케스트라라니,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야.”

“알고 있어요.”

“끄응.”

푸르트벵글러가 한숨을 내쉬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에 남아서 할 수도 있다. 기간을 정해 운영하면 돼. 어차피 1년 내내 크루즈 위에서 생 활할 수도 없는 일이지 않느냐.”

“그 생각도 했었어요. 하지만.”

“하지만?”

“제가 바라는 일을 단원 모두가 원 하길 바라는 것도 무리잖아요.”

단순히 배를 싫어하는 단원이 있을 수도 있고 고전적 형태의 오케스트라를 벗어나는 걸 꺼려할 수도 있다.

또한 클래식만을 연주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테니 말이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제 마음대로 바뀌는 게 싫을 뿐이에요. 푸르트벵글러와 단원들의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대로 남아주었으면 해요.”

“흥. 말은 잘하는구나.”

***

배도빈과 푸르트벵글러가 따로 자리를 갖은 시각.

베를린 필하모닉의 일부 단원이 잘츠부르크의 조용한 바를 빌려 모였다.

그들은 모두 적당히 취한 상태였는데 사랑해 마지않는 베를린의 마왕 이 떠난다는 소식으로 인해 우울해 하고 있었다.

“망할 꼬맹이.”

“성질 더러운 꼬맹이.”

“못된 꼬맹이.”

서운한 마음에 푸념을 늘어놓고 있자니 배도빈과 함께했던 일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이미 이승희라는 세계적 첼리스트 로 인해 보수적이었던 베를린 필하모닉도 동양인에 대한 선입견을 버렸지만, 만 다섯 살의 소년이 폭군 에게서 완벽하다는 평을 받아 입단 했을 때만 해도 그들은 의아해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연주만으로 배도빈은 베를린 필하모닉이 가장 아끼는 보물이 되었다.

짧지만 많은 일이 있었다.

특히나 배도빈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 푸르트벵글러의 배려로 신세계로 부터를 지휘했을 때는 모든 단원이 직감했다.

언젠가 이 어린 음악가를 앞에 두 고 연주를 하게 될 거라고.

결국 배도빈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때부터 긴 시 간을 기다려왔다.

10년간의 세월은 순탄치 않았다.

니아 발그레이의 은퇴는 베를린 필하모닉에 크나큰 상처로 남았고 런던과 빈 그리고 암스테르담에 치여 제국은 전에 없던 암흑기를 맞이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언젠가 돌아올 희 망을 위해 자신들의 자리를 지켰으며 그러기 위해 스스로 변화하기 시 작했다.

더 이상 변화하지 않고서는 정상의 자리에서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박물관으로 남 지 않도록 하겠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발언으로 베를린 필은 2010년대 후반부터 개 혁을 시도했다.

가장 먼저 바뀐 것은 총감독이자 베를린의 폭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였다.

철저하게 고전음악을 연주했던 베를린 필하모닉은 뉴에이지를 비롯해 레퍼토리를 늘려나갔으며 아이들을 위한 공연 등 프로그램의 다양화를 시도했다.

예전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변화였다.

다행흐!.

그러한 시도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팬층을 넓히는 데 큰 역할이 되어주었다.

또한 그들의 희망이 돌아와 음악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악단으로 남을 수 있는 요인이었다.

당연하다는 듯 배도빈은 다시 한번 베를린 필하모닉을 선택했다.

그리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도 와 베를린 필하모닉을 다시 한번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올려두었다.

오케스트라 대전 4강에 베를린 필하모닉 A와 B가 나란히 오른 것이 단적인 증거였다.

그 과정에서의 느꼈던 충족감과 향 상심 그리고 행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배도빈을 만난 뒤로 12년간의 시간이 베를린 필하모닉의 보물이었다.

그러하니 단원들의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스 이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다들 이러고 가만있을 겁니까?”

“그럼 어떡해.”

“지금이라도 가서 설득해야죠.”

단원들은 서로를 보다가 한숨을 내 쉬었다.

“도빈이가 그러고 싶다는데 어쩌겠어. 다른 이유도 아니고 더 배우고 싶다는데.”

“자기 악단을 만들어 돌아다니면서 공연하고 싶다잖아. 그런 걸 어떻게 말려.”

케르바 슈타인과 마누엘 노이어의 말에 다들 공감했다.

“누가 반대하자 했어요? 베를린 필만의 장점도 있잖아요. 새 악단 만드는 게 어디 쉬운 일이에요? 있는 인프라를 활용하는 게 훨씬 편하지. 남아 있으라고 말은 할 수 있잖아요.”

“그건 그러네.”

“근데 너 도빈이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아,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사족이 붙긴 했지만 한스 이안의 발언은 단원들의 반응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확실히 새 악단을 만드는 것보다 베를린 필하모닉을 활용하는 게 나은 부분이 있었다.

연주자의 질은 그 어떤 악단보다도 우수했고 베를린 필하모닉 이상의 구조적 인프라를 갖춘 악단은 전 세계를 둘러보아도 흔치 않았다.

“거봐요! 어느 악단이 전용기를 가 지고 있어요?”

“그치.”

“세계 어디든 최고 등급 호텔에 머물 수 있고.”

“ 맞아.”

“3,500석이 넘는 콘서트홀을 두 개나 가지고 있잖아요.”

“확장 공사할 때는 참 좋았지.”

“게다가 우리 같은 연주자들 어디 쉽게 구해요? 있어도 돈이 한두 푼 나가냐고요.”

“근데 도빈이 돈 많잖아.”

“게다가 지금이야 괜찮지만 도빈이 들어오기 전에는 자금 사정도 빠듯 해서 연봉 챙겨주는 것도 어려웠잖아. 세프도 도빈이도 받아야 할 만 큼은 못 받고 있을걸?”

한스 이안의 말문이 막혔다.

“ 끄으으윽.”

이내 한 단원이 울기 시작했고 잠 시 희망적이었던 분위기는 다시 침 체되었다.

그때 이승희가 술잔을 쾅 하고 내 려놓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 고 눈은 게슴츠레 뜨고 있었다.

“아니. 한스 말이 맞아.”

이승희가 단원들을 둘러보았다.

“난 도빈이 못 보내. 안 보내. 왜 보내? 다른 데 못 줘.”

이성적으로 판단해 말을 아꼈던 이 승희가 술의 힘을 빌려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설득하자는 말에는 조심스러웠던 이들도 그 마음만큼은 한스 이안, 이승희와 마찬가지였기에 고개를 끄 덕였다.

“그래. 난 그 빌어먹을 꼬맹이가 나가면 슬플 거라고. 지금도 이렇게 먹먹한데 상상도 하기 싫어.”

마누엘 노이어가 거들었다.

그 뒤로 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배도빈을 보내고 싶지 않다고 밝혀 모두 그를 얼마나 아끼는지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이렇다 할 방도가 없었다.

“맞아. 우리가 더 노력해서 도빈이가 만족할 수 있게 하면 되지.”

“이승희, 네가 좀 말려봐. 너 도빈이랑 친하잖아.”

“내가 무슨 수로 막아? 소소, 넌 방법 없어?”

“……도빈 치사해.”

소소는 이승희의 질문에 답하는 대신 입을 잔뜩 내밀었다.

솔로 얼후 연주자였던 그녀가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베를린 필하모닉 에 입단한 이유는 순전히 배도빈 때문이었다.

지금은 베를린 필하모닉에 애착을 느끼고 있지만 배도빈이 없는 베를린 필하모닉은 개인 활동을 포기하 면서까지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도빈이 나가면 나도 나갈 거야.”

“뭐!”

단원들이 깜짝 놀랐다.

배도빈이 나간다는 소식만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데 악단에서 가장 인 기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나간다고 하니 패닉에 빠져버렸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 ……나도 실 은 도빈이 때문에 들어온 거니까.”

피셔 디스카우와.

“그러네요. 도빈이가 없다면……

진 마르코.

그리고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어렸을 적부터 배도빈과 함께 악단 생활을 꿈꿔 마침내 꿈을 이루었던 나 카무라 료코.

그리고 베를린 필하모닉 B의 대부 분이 같은 생각이었다.

이제 막 프로 연주자로서 그들이 세계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배도빈이란 위대한 지휘자가 있었던 덕이었다.

그것을 너무나도 절실히 알고 있는 단원들로서는 배도빈과 헤어져야 한 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엇보다 배도빈을 만족시킬 수 없는 본인을 자책하기 시작했다.

“내가 못 해서 그래.”

“……아니야. 내가 칠칠맞지 못해 서 도빈이가 매번 봐줬어야 했는데 그거 때문일 거야.”

“끄으윽. 생각해 보니 도빈이 너무 고생만 했잖아. 내가 더 잘했으면 그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흡.”

B팀 단원들은 좀 더 완벽하지 못 했음을 탓했다.

매일 10시간 이상 연습하면서 2020년대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오케스트라를 이뤘으면서도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그만큼 배도빈이 얼마나 많은 일을 처리해 왔는지 알고 있던 탓이었다.

“이거 큰일인데.”

케르바 슈타인이 담배에 불을 붙이며 중얼거렸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배도빈에게 의 지하고 있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후배들의 반응을 보니 이미 구심점 이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특히나 배도빈이 도맡아 관리한 베를린 필하모닉 B는 상황이 심각해 보였다.

아쉬움을 넘어서 자책까지 이어지 니 이대로라면 B팀이 해산될 위기까 지 겪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울, 이거 아쉬워하고 있을 만한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 의존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되면……. 헨리, 좋은 방법 없을까?”

“우선 한스 말처럼 대화는 해봐야겠지. 어떻게 합의점을 찾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 너도 도빈이가 나가는 건 반대인 거네?”

“물론이지.”

베를린 필하모닉 A의 악장들 케르바 슈타인, 파울 리히터, 헨리 빈프 스키가 대화하던 도중 문득 공통된 생각이 떠올랐다.

“윤희, 혹시 좋은 생각 없어?”

“맞아! 이럴 땐 윤희지.”

갑자기 주목을 받은 나윤희는 고개를 저었다.

“저, 저는……

"으음..."

“아쉽긴 하지만 도, 도빈이가 그러길 바란다면 응원하고 싶어요.”

“안 돼. 안 돼!”

“누가 응원하고 싶지 않대?”

“공부하고 싶으면 기다릴 수 있고 돌아다니면서 연주회하고 싶으면 따 라갈 거야. 세프든 악단주든 누가 반대해도 난 도빈이 편이야. 떠나는 건 싫어.”

“맞아. 맞아. B팀이 왜 있는데? 애 초에 돌아다니면서 공연하려고 만든 거잖아. 도빈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나도 도울 거야. 근데 나가는 건 안 돼. 못 보내.”

다 큰 어른들의 고집은 논리가 먹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마음만큼은 나윤희도 모두와 같았다.

“그, 그럼 대화를 해보는 걸로.”

“설득할 방법이 있는 거야?”

“••••••아뇨.”

배도빈의 소고집은 폭군으로 불리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도 고개를 저을 정도였다.

“일단 시간을 버는 게 우선이겠네.”

“그래. 이대로면 오케스트라 대전 끝나고 바로 떠날 거라고.”

다들 고심에 빠졌다.

‘도빈이가 떠나면.’

나윤희 역시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 했다. 바이올린 협주곡 불새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나윤희는 다 시 태어난 듯했다.

앞으로도 그런 연주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더 없이 행복했다.

그러나 배도빈이 없이 그러한 연주를 할 수 없었다.

‘도빈이가 새 오케스트라를 만들면 역시 그쪽으로 가야겠지?’

그러나 어떤 곳에서도 알아주지 않았던 본인을 받아들여준 베를린 필하모닉을 떠나고 싶진 않았다.

결국 그녀도 천사의 설득과 악마의 유혹 사이에서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

나윤희가 입을 떼자 단원들이 새로 운 악장을 향해 시선을 모았다.

“시, 시간을 끄는 정도라면 바, 방 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닌데……

“ 진짜?”

“뭔데! 뭔데!”

“빨리 말해봐!”

나윤희의 말에 단원들이 눈을 화등 잔만 하게 뜨고 달려들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긴 뭐가 안 돼. 다 돼!”

“그래. 그래.”

모차르트 초콜릿처럼 달콤한 말들 이 나윤희를 유혹했다.

그녀는 눈을 꽉 감은 채 갈등하다 개미만 한 목소리를 냈다.

“실은…… 지, 지금 상임 지휘자 자리가 공석이잖아요.”

“어?”

“ 그랬나?”

나윤희의 말에 다들 잊고 있던 사 실이 떠올랐다.

공식적으로 현재 베를린 필하모닉 은 상임 지휘자가 없는 상태였다.

가장 최근 선출되었던 케르바 슈타 인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복귀하 면서 사실상 지휘자 역할을 중단하였다.

때문에 공식 상임 지휘자였으나 규 정상으로는 의무를 다하지 않은 기 간이 1달을 넘겼으므로 강제 해임된 상태였다.

그 외에도 규정상의 문제가 많았지 만 푸르트벵글러의 복귀 후 곧장 오케스트라 대전에 돌입했기에 따로 투표와 식을 진행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근데 그게 뭐 어떻다는 거야?”

나윤희가 안절부절못하다가 내질렀다 .

“가, 강제로 선임해 버리면 나, 나가고 싶어도 못 나가요!”

순간 모든 단원들이 행동을 멈췄고 바 안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자, 잠깐. 그럼 세프는?”

파울 리히터가 나서서 물었다.

“사, 상임 지휘자가 두 명이면 안 될 이유는 없어요. 세, 세프가 전처 럼 총감독으로 있고 도빈이가 예, 예술 감독으로 취임하면……

나윤희의 설명을 듣고 있던 단원들은 각자 옆 사람을 쳐다보다가 이내 소리쳤다.

“그거다!”

“당장 하자!”

단원들이 흥분하고 있을 때 마누엘 노이어가 눈썹을 좁히며 케르바 슈 타인에게 물었다.

“괜찮은 거야?”

“어……. 문제없을 거 같은데. 어차 피 B팀은 도빈이한테 넘긴 상태잖아. 지휘자가 둘인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고.”

“베를린에서 정기 연주회를 하면서 출장 다닐 곳이 필요해 만든 곳이니 도빈이가 원하는 형태를 갖추고 있네.”

케르바 슈타인의 대답을 헨리 빈프스키가 거들었다.

“그럼, 하는 거야?”

파울 리히터가 물었고.

그 순간 단원들이 악장들이 모인 테이블로 달려들면서 한목소리로 외쳤다.

“당장 하자!”

과거 선거관리법을 위반했던 범죄자들이 다시 한번 작당질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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