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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288화 (288/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88화

    63. 범죄자들(2)

    배도빈이 앞으로 나섰다.

    모든 이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입을 열었다.

    “세미파이널에서 떨어지면 어쩌려 고 이런 말을 꺼내요?”

    “흥. 자신 없느냐?”

    “B팀이야 당연히 올라가죠.”

    배도빈의 말을 이해하느라 잠시간 고민하던 푸르트벵글러와 A팀 단원 들이 발끈했다.

    “뭐야!”

    “저 꼬맹이가!”

    레몽 도네크의 이야기로 심각해졌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다 같이 한 번 웃은 뒤 배도빈이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레몽 도네크에 관한 일은 저도 세 프와 같은 생각이에요. 추구하는 방향이 다르기도 했고 그의 능력 부족이 결정적이긴 했지만 니아가 은퇴한 뒤 나선 그가 결코 좋게 보이진 않아요. 인정받지 못하니 말도 없이 떠난 것도 마음에 안 들고요.”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푸르트벵글러의 폭로로 그와의 좋은 추억마저 변질되고 말았다.

    그 감정이 배신감을 넘어서 수치심이 되어갈 때, 배도빈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윤희 누나가 전에 제게 말했어요. 레몽 도네크 재수 없다고. 그런 사람에게 마음을 주느라 힘들어하는 A팀이 안쓰럽다고.”

    “말 한번 잘했다.”

    케르바 슈타인이 나섰고.

    “거참 엿 같네.”

    마누엘 노이어가 마침표를 찍었다.

    다들 그의 말에 웃고 말았다.

    쉽게 잊을 순 없겠지만 적어도 그 들을 구속하는 유일했던 일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하찮은 것이었다고 여길 수 있었다.

    “네. 게다가 우리에겐 그보다 훨씬 뛰어난 악장이 있으니까요.”

    배도빈의 말에 다들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향해 있는 것을 눈치채고는 두 팔을 번쩍 들었다.

    “뭐야! 취임 발표식이었어?”

    “지금? 지금?”

    갑작스러운 진행에 나윤희는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앞으로 나와 주세요, 나윤희 악장.”

    이승희와 소소가 당황해서 사고가 정지된 나윤희의 등을 떠밀어 주었다.

    멍하니 서 있던 나윤희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아!”

    설마 그 정도로 넘어질 줄은 몰랐던 두 사람은 화급히 나윤희가 넘어 지기 전에 붙잡았다.

    “……심장 멎을 뻔했네.”

    이승희와 소소가 놀란 가슴을 진정 했고 손을 다친 나윤희가 넘어지는 모습을 보던 단원들도 겨우 안도했다.

    나윤희는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정 리하지도 않은 채 배도빈 옆에 섰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향해 배도빈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윤희는 어렵사리 한 마디 꺼냈다.

    “모,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나윤희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아 가만히 있던 단원들은 뒤늦게 박수를 보내주어 새로운 악장을 축복했다.

    “좋은 일이 하나 더 있어요. 멀핀, 준비됐죠?”

    “네. 모셔 오겠습니다.”

    멀핀 과장이 잠시 세미나실을 벗어 났다.

    “무슨 일이지?”

    “오늘 무슨 날이야?”

    “난 또 세프 말 때문에 도빈이가 정 식 지휘자로 취임하는 줄 알았는데.”

    “ 나도.”

    단원들이 잠시간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문 근처에서 환호가 났다.

    “니아!”

    “발그레이 악장!”

    멀핀 과장과 함께 니아 발그레이가 아내 제인 에스터와 함께 세미나실 로 들어섰고 단원들은 반가워 소리 쳤다.

    “뭐야! 복귀하는 거야?”

    “괜찮은 거예요?”

    “하하하. 다들 여전하네.”

    니아 발그레이는 여전히 자신을 악장으로 불러주는 단원들과 이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는 스승, 푸르트벵글러를 보며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 했다.

    그가 악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시절 과 현재의 베를린 필하모닉은 여러 모로 달라졌지만, 니아 발그레이는 은퇴 후에도 베를린의 정신을 이어나가고 있는 후배들을 자랑스레 지 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마침내.

    의학의 도움을 받아 청력을 회복한 그가 복귀하는 날이었다.

    니아 발그레이가 단상으로 오르자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니아 발그레이 악장이 베를린 필하모닉에 고문으로 취임할 예정이에요. 또, 나윤희 악장이 악장으로서의 역할이나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도 와줄 거고요.”

    배도빈의 말에 나윤희가 황급히 니 아 발그레이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직각을 넘어서 거의 접힌 수준이라 니아 발그레이가 그녀를 일으키려 할 때 단원들이 소리쳤다.

    “그래야지!”

    “진짜? 진짜?”

    “우오오오!”

    마누엘 노이어와 한스 이안, 피셔 디스카우를 중심으로 단원들이 포효 했다.

    그 사이에 억지로 낀 나카무라 료 코는 질색을 하다 어쩔 수 없이 분 위기에 휩쓸려 두 팔을 들었다.

    니아 발그레이가 배도빈에게서 마 이크를 넘겨받았다. 환호하던 단원 들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영원한 악 장을 벅찬 가슴으로 대했다.

    “우선 그간 베를린 필하모닉을 더 멋진 악단으로 만들어준 모든 분들 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니아 발그레이가 단원들과 사무직 원들을 향해 깊이 고개 숙였다.

    “이제 몸은 괜찮은 거예요?”

    한스 이안이 물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고 니아 발그레 이가 긍정하자 세미나실이 기쁨으로 가득 찼다.

    “몇 달 전에 도빈이가 좋은 의료진을 소개해 주었는데 덕분에 지금은 마비가 왔던 손도 괜찮아졌어. 제약 이 많지만.”

    니아 발그레이가 편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때 도빈이가 복귀할 걸 제안해 줬는데 그게 용기가 되었던 것 같아. 악장으로서는 힘들겠지만 나도 아직 베를린과 함께하고 싶었으니 까. 앞으로는 세프와 단원들 사이에 서 악장들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아. 잘 부탁해.”

    니아 발그레이가 말을 마치자 아내 제인 에스터가 감격해 눈물을 훔쳤다.

    몸의 마비가 오면서 청력을 잃어가는 니아 발그레이를 곁에서 지켜보는 일은 그 어떤 고문보다 잔인한 일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으로 활동 하는 것에 누구보다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남편의 고통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오늘의 기적에 그 저 감사할 뿐이었다.

    또한 단원들은 이 기쁜 소식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우 우! 우 우!”

    분위기가 진정되지 않을 듯했다.

    그럴 생각도 없는지 다들 있는 대로 기쁨을 표현하며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때 니아 발그레이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아쉬운 소식과 함께해 안 타까울 뿐이야.”

    니아 발그레이의 심상치 않은 말에 단원들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아직 단상 위에 있는 배도빈을 보았다.

    “뭔데?”

    “무슨 일인데?”

    두 번의 좋은 소식 뒤에 닥친 불 안감에 단원들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그들은 잠시 눈을 감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악장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배도빈이 눈을 뜨고 니아 발그레이 에게서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악장직을 내려놓으려 해요.”

    정적이 흘렀다.

    “아하하하! 이제야 지휘자로 취임 한다는 말이네!”

    한스 이안이 과장해 웃었다.

    그러나 다들 푸르트벵글러의 심상 치 않은 태도와 니아 발그레이의 발 언 그리고 배도빈의 표정을 통해 조 금도 웃을 수 없었다.

    “아뇨. 베를린 필하모닉을 떠나려 해요.”

    배도빈이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 고 베를린 필하모닉은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았던 일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공식적으로는 객원 연주자였지만, 만 다섯 살에 제2바이올린 부 수석으로 입단한 그는 지난 13년간 베를린 필하모닉의 자랑이자 희망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어린 배도빈이 장성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그가 남긴 씨앗을 가꿔 스스로 변화했다.

    그러면서도 정상의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세기의 천재가 돌아오려 할 때 그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에 호응하듯 배도빈은 일절의 망 설임 없이 베를린의 품으로 돌아왔다.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와 더욱 성 장한 천재의 재결합.

    십 년간의 공백이 단지 이를 위한 준비 기간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듯 대단한 시너지를 보여주었다.

    다소 경직되어가던 베를린 필하모닉의 활력소였고 B 팀에 있어서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보다 의지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배도빈이 베를린 필하모닉을 떠나다니.

    믿을 수 없었다.

    너무도 큰 충격에 아무도 입을 열 지 못하고 있는데 배도빈이 담담하 게 말을 이어나갔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제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곳이에요.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고 함께해 주었어요.”

    배도빈은 실로 그렇게 생각했다.

    다시 태어난 뒤 그가 자신의 음악을 아낌없이 펼칠 수 있었던 유일한 곳이었고 그런 만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엑스톤이 사라지고 음악을 할 기반을 잃었던 배도빈에게 이승희의 제 안은 너무도 기쁜 일이었다.

    모든 것이 변화한 현대에서.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에게 과거의 향수와 미래를 향한 진취적 가능성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 보물이었다.

    “하지만 역시 욕심이 나요. 오케스트라 대전을 겪으면서 세상에 아직 제가 모르던 음악이 많다는 걸 느꼈 어요.”

    그러나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한자 리에 남아 있으면 안주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배도빈은 오케스트라 대전에 참가 한 여러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를 접하며 충족할 수 없는 갈증을 느꼈다.

    더욱 아름다운 음악을 향한 의지.

    그 오래된 욕구를 더는 참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이곳저곳 다니며 공부하려 해요.”

    “그러고 돌아오는 거야?”

    파울 리히터가 물었다.

    그러나 그와 단원들의 바람과 달리 배도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뒤에는 오케스트라를 만들 거예요. 세계를 여행하며 음악이 필 요한 곳으로 향하는 악단을 만들고 싶어요.”

    배도빈이 말을 마쳤다.

    이해를 바라지는 않았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단원들도 차마 반대할 순 없었다.

    한 음악가의 미래를, 향상심을 막 아설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음악을 향한 배도빈의 순수한 욕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깊은 슬픔 속에 연회가 마무리되었다.

    * * *

    연회 뒤에 푸르트벵글러와 단둘이 오렌지 주스를 마셨다.

    내가 그런 것처럼 푸르트벵글러도 알콜에 대한 그리움을 당분으로 채우는 듯하다.

    “못된 놈.”

    “알고 있었잖아요.”

    사실 니아 발그레이의 복귀는 푸르트벵글러와 함께 올해 초부터 준비 했던 일이었지만 나윤희에 대한 일은 즉흥적이었다.

    루트비히 오케스트라를 준비하는 도중.

    오케스트라 대전을 통해 아직 내가 모르는 음악이 많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고 동시에 나윤희의 부상으로 리더로서의 내게 부족함이 있음을 절감했기에 어제 푸르트벵글러에게 이야기를 꺼냈더니.

    푸르트벵글러는 의외로 담담히 받아들였다.

    최근 들어 칼 에케르트를 자주 언급했던 것도 내가 떠날 생각을 가지 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했던 행동이었다고 한다.

    나로서는 푸르트벵글러의 사려 깊음에 감사할 뿐이었다.

    그리고 머리를 맞대어 내 빈자리를 니아 발그레이와 나윤희로 대체하자는 말이 나왔다.

    두 사람이라면 악단 내에서의 신임도 탁월하니 어떻게든 잘 풀어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네 입으로 구체적인 말은 안 했잖느냐!”

    “그래서 대체자도 빨리 구했잖아요.”

    “지휘자가 아니라 고문이야! 윤희는 악장으로 제몫을 하려면 몇 년은 걸릴 테고!”

    그럼에도 푸르트벵글러가 이렇게 성을 내는 건 섭섭하기 때문일 것이다.

    욕심에 따라 결정한 일이라 뭐라 위로해 줘야 할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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