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287화
63. 범죄자들(1)
“꺼어어엉헝."
“지, 진정해. 달래야.”
“끄허 억꾸읍학.”
다음 날.
나윤희가 퇴원하자 병원 앞에서 기 다리고 있던 진달래가 달려들었다.
눈물과 콧물, 침까지 흘리며 얼굴을 파묻었는데 당황하던 나윤희도 갑자기 눈물이 나와 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은 뒤에야 떨어진 진달래가 코를 들이마시고는 나윤희 의 왼손을 살폈다.
“킁! 붙어 있어? 끄으읍. 움직여?” 나윤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토록 아름다운 연주를 하는 나윤희가, 바이올린을 누구보다도 사랑 하는 그녀가 다시는 연주할 수 없게 되진 않을까.
밤새 가슴 졸였던 진달래는 그제야 안심했다.
마중 나온 다른 이들은 오열하는 진달래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배도진이 울먹이며 나윤희의 허리를 안았고 차채은도 가세하자 나윤희는 옴짝달싹 못했다.
“끄읍. 이모 아파? 많이 아파?”
“ 괜찮아.”
“정말?”
“응. 의사 선생님도 퇴원하라 하셨잖아.”
나윤희가 배도진을 달래는 한편 차채은의 등을 쓸어내렸다.
“돌아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어.”
서로를 위하는 모습을 따뜻하게 바라보던 유진희가 입을 열었다.
유진희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 옆에 서 있는 배도빈을 볼 수 있었다.
나윤희는 반가워 인사하려다가 문득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연주를 끝내자마자 달려왔던 배도빈은 무척이나 절박해 보였다. 2년 간 함께했지만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표정이었다.
그만큼 걱정을 끼쳤다는 생각에 조심스러워졌다.
“미, 미안해. 놀랐지……
배도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신경이기에 이 지경이 되고서도 사과하는 건지.
새 삶을 살면서 많이 나아졌지만.
과거 가혹했던 환경으로 인해 스스 로 보호해야 했던, 그러했기에 평생을 안하무인으로 살았던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나.
소리를 잃었던 그에게 어제의 일은 쉽게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절망감을 심히 알기에, 바이올리니스트에게서 바이올린을 빼앗았을 수도 있었던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용서할 수 없었을 거예요.”
“어?”
“연주를 못 하게 되었더라면.”
배도빈이 말 사이에 잠시 간격을 두었다.
“그런 곡을 만든 날 용서할 수 없었을 거예요.”
배도빈의 말에 나윤희는 뭐라 말해 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바이올린 협주곡 불새는 발표 하루
만에 배도빈이 만들었던 수많은 곡 중에서도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단 하룻밤 사이에 음악사가 새로 적히기 시작했다는 평을 받을 정도 로 위대한 업적이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원곡의 변 형이라고는 하지만 모티프를 따왔을 뿐, 완벽하게 배치된 불협화음과 화 성 그리고 밀도 높은 멜로디와 그를 이끄는 개성 넘치는 리듬은 나윤희 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런 곡을 연주할 수 있어 너무도 기뻤다.
그런 것을 자랑스레 여기기는커녕 용서할 수 없었을 거라니.
배도빈이 그녀의 사과를 황당하게 받아들인 만큼이나 나윤희 역시 배도빈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 그러면 못써.”
나윤희가 배도빈의 말을 잘라냈다.
눈을 깜빡이는 배도빈을 향해 나윤희가 단호히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멋진 곡 만들어야 해. 나 열심히 할 테니까. 어떤 곡 이든 연주할 수 있도록 될 테니까
그렇게 슬픈 이야기하지 마.”
나윤희는 배도빈에게 있어 음악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았다.
그의 입에서는 언제나 음악에 관한 이야기가 홀러나왔고 그의 손은 그 어떤 앨범보다 멋진 곡을 그려냈다.
본인 이상으로 노력하는 배도빈이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음악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그가 곡을 못 쓰게 된다니.
음악가 배도빈의 열렬한 팬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난 네 바이올린이니까.”
악기가 연주자를 따라가지 못하는 일 또한 어불성설이다.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의 악기.
지휘자가 추구하는 미학을 향해 나 아가는 일은 연주자의 역할이었다.
나윤희가 무엇을 말하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이승희와 소소는 그들의 동료가 더없이 자랑스러 웠다.
지난날 소극적이라 드러나지 않았던 아름다운 바이올린이 이제는 정녕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석 바이올리니스 트로서 정체성을 확립한 듯했다.
또한 나윤희의 말은 배도빈에게 있어서 너무도 소중한 시작이었다.
“고마워요.”
위대한 악성은 크게 기뻐하여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자, 자!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가자구!”
방금까지 오열하던 진달래가 어느 새 회복해 나윤희를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밖에서는 안을 조금도 들여다볼 수 없게 선팅 처리된 대형 RV 차량이었다.
일행이 탄 차는 도시 외곽을 한 바퀴 돈 뒤에 숙소의 뒤쪽으로 향했다.
나윤희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돌리며 양쪽 창밖을 확 인하자 배도빈이 입을 뗐다.
“기자들 피하는 거예요.”
“ 아.”
처음 겪는 일이라 나윤희는 잠시 놀라다가 흐 하고 웃었다. 마치 영화에 나오는 스타가 된 것만 같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멀핀 과장이 이것저것 신경 써주 더라. 퇴원 시간도 2시간 뒤로 알리고 숙소 주변에도 기자나 파파라치 안 붙게 하더라고.”
“어, 어떻게?”
“어떻게는 뭐 어떻게겠어. 가드 붙이는 거지 뭐.”
“그, 그렇게까지 안 해도 괜찮은데.”
“모르는 소리 마. 너 내가 얼마나 시달리는지 알면서 그래? 세프랑 도빈이가 젤 심하긴 해도 저렇게 무신 경한 둘하고 너랑 같니?”
이승희가 투덜대며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늘어놓았다.
잠시 황홀했던 나윤희는 괜한 수고를 더 하게 된 악단에 대한 미안함과 이승희에게 들은 이야기로 잔뜩 긴장하고 말았다.
“아무튼. 이제 단독 인터뷰도 막 들이댈 테니 조심해야 한단 말이야. 무조건 멀핀 과장 통해서 접하라 그래.”
"응."
상당히 불안한 상태로 숙소에 돌아 온 그녀는 일행들에게 이끌려 곧장 지하 세미나실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200 명이 넘는 단원들에게 격려와 축하를 받아 어안이 벙벙했다.
누구의 말에 먼저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나윤희는 오뚜기처럼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를 반복할 뿐이었다.
“크흠.”
적당히 인사를 나누자 푸르트벵글러가 나섰다.
단원들이 자리를 비켜주었고 푸르트벵글러는 잔을 채운 뒤 나윤희에게 주었다.
“아, 술은……
“술이면 얼마나 좋을까.”
푸르트벵글러가 멀찍이 벽에 기대어 포도 주스를 마시는 카밀라 앤더슨의 눈치를 보곤 목을 가다듬었다.
나윤희가 잔에 코를 대자 확실히 와인이 아니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모든 사람이 잔을 준비한 듯하자 푸르트벵글러가 입을 뗐다.
“오늘은 축하할 일이 많으니 한마 디 하지. 모두 잔을 들어주게.”
다들 푸르트벵글러가 연설을 짧게 끝내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길게 할 거면 말 끝내고 들어요.”
“……그럼 이따 들지.”
단원 모두 배도빈을 보며 작고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분위기를 잡은 푸르트벵글러가 입을 열었다.
“지난 몇 주간 우리는 많은 일을 겪었다. 부담 속에서 새로운 무대를 준비했고 우리의 음악을 지켜냈다.”
푸르트벵글러의 말에 단원들은 각자 오케스트라 대전을 돌이켜보았다.
사실 베를린 필하모닉을 포함한 명문 악단들에게 오케스트라 대전은 부담스러운 무대였다.
이미 그간 쌓아온 명성이 있기에 대회라는 한정된 규격 안에서 경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적었다.
패하기라도 했다가는 잃는 것이 더 많을 수밖에 없는 무대였다.
실제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마리 얀스, 브루노 발터와 함께 가장 위 대한 지휘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그가 이끌던 런던 필하모닉은 조기에 탈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베를린 필하모닉은 그들 이 해오던 연주가 아닌, 새로운 도 전을 통해 앞으로 나아갔다.
그 과정에서 겪을 압박감이 결코 가벼울 리 없었다.
“묻어두었던 과거로 인해 흔들리기도 했다.”
푸르트벵글러의 말에 단원들은 옛 동료 레몽 도네크를 떠올렸다.
사실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 B 단원들은 그에 대한 추억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었지만 사명감과 소속감 이 투철한 베를린 필하모닉 A가 겪 은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푸르트벵글러가 공식적으로 침묵하였기에 차마 꺼내지 못하고 그저 가 슴에 담아둘 수밖에 없었거늘.
오케스트라 대전에서 보인 그의 행동에 베를린 필하모닉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푸르트벵글러가 그가 가장 아끼는 악장에게 시선을 주었다.
배도빈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고는 곁에 있던 나윤희의 등을 떠밀었다.
나윤희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는데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저한테 했던 말 그대로 하면 돼요.”
“여, 여기서?”
나윤희는 잔뜩 원망하는 듯 울상이 되었지만 푸르트벵글러와 배도빈 그리고 모든 단원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기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 모두••••••
눈을 꼭 감고 외쳤다.
“다, 답답해요!”
나윤희가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던 베를린 필하모닉 A의 단원들은 갑작스러운 일침에 눈만 깜빡였다.
“마, 말도 없이 떠난 사람 잊지 못하고. 그런 거, 그런 거 베를린 필하모닉답지 않아요.”
그녀의 뜻을 이해한 A팀 단원 중 한 명이 나섰다.
“우리가 걱정을 끼친 모양이네. 하지만 우리에게 레몽은.”
“아니. 그 말이 맞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나섰다.
“지금까지 녀석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함구했지만 너희가 얼마나 마음 아파할 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못한 내 잘못이다.”
“세프?”
“녀석은 내 뒤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고 싶어 했고 발그레 이가 은퇴한 뒤 나를 찾았다.”
푸르트벵글러의 말에 단원들은 놀랐다.
공식적으로 니아 발그레이 이후 베를린 필하모닉, 아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후계자는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배도빈조차 뉘앙스를 풍겼을 뿐이었다.
니아 발그레이가 후계자로 발표된 이후 20년이 넘도록 침묵했던 레몽 도네크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녀석은 책임감이라고 하지만 나는 발그레이의 빈자리를 노린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녀석이 진정 베를린 필하모닉의 지휘자가 되고 싶었다면 발그레이와 당당히 경쟁해 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가장 아끼던 악장 중한 명의 치부를 공개하는 푸르트벵글러 의 얼굴은 담담했다.
“그런 녀석에게 베를린을 맡길 수 없었다. 더욱이 나와 발그레이가 함께 생각했던 후계자는 따로 있었으니까.”
푸르트벵글러가 고개를 돌렸다.
모두 푸르트벵글러를 따라 그들의 희망을 보았다.
“배도빈 악장, A와 B가 결승에서 만나기 전에 할 말이 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