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85화 (285/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85화

    62. 백아절현(2)

    가슴 한가득 채워내는 정열의 하모니. 활을 켜는 나윤희의 팔은 더욱 힘차게 움직였다.

    빠르게 그어 낼수록 캐논의 폭발적 인 음량이 더욱 부각되었다.

    ‘더. 더. 더!’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는 캐논의 노 랫소리가 찢어지거나 뭉개지지 않도 록, 한계를 넘어선 감각으로 누르는 힘을 조절했다.

    격렬하고 화려하게 배치된 악보를 따라, 배도빈이 사력을 다해 준비한 불새가 비로소 진면목을 보인 것이다.

    동시에.

    망가질 대로 망가진 왼손에 힘을 주어 현을 눌렀다.

    튕겼다.

    ‘ 아파.’

    찰스 브라움과 배도빈마저 완벽하 게 숙달하기 어려워했던 바이올린 협주곡 불새.

    활로 주 멜로디를 연주함과 동시에 왼손의 남은 손가락을 활용해 현을 튕기니 마치 두 대의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것만 같았다.

    한 쌍의 날개처럼.

    불꽃처럼 타오르는 음표들이 인지 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들었다.

    함께 노래하던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멈추자 마치 대지를 떠나 찬란한 하늘에 이른 것만 같았다.

    연주는 계속되고.

    이윽고 불새는 저 높은 창공에서 자유로이 날개를 펴 순백으로 타오 른다.

    현이 마찰될 때마다 튀어 오르는 불꽃과 곧게 뻗어 폐부를 관통하는 듯한 빛은 단 한줌의 그림자마저 허 용치 않았다.

    관객들은 찬란한 빛 속에 놓인 것 만 같았다.

    시야가 새하얗게 되어 무엇 하나 볼 수 없게 된 듯, 캐논의 강렬하고 치열한 노랫소리만이 청중들을 감쌌다.

    밤하늘을 밝히는 유일하고 완전한 불꽃의 날개.

    배도빈과 나윤희의 카덴차가 불새 의 성스러운 날개를 그렸다.

    ‘ 맙소사.’

    ‘지금 내가 무엇을 듣고 있는 거지?’

    오케스트라 대전에 참가했던 내로라하는 거장들마저 캐논으로 전해지는 압도적 심상에 기함했다.

    디지털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베를린 필하모닉의 공연을 관람하고 있던 1,800만 명 모두 마찬가지로 넋을 잃었다.

    채팅창에는 어떠한 글도 올라오지 않았다.

    현장의 객석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모든 소리가 사라진 가운데, 세상에 단 하나의 바이올린만이 노 래하고 있었다.

    하얀 불꽃처럼 찬란히.

    사카모토 료이치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지금의 이 연주가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새 시대의 음악이 라는 것을 온몸과 영혼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네가 말했던 음악이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생전 처음 느끼는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확실히 지금까지 감히 넘보지 않았던 영역의 일이었다.

    나윤희가 연주하는 카덴차는 배도빈의 천재성이 집약된 곡으로 그러한 연주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만들 수 있는 곡이었다.

    가당치도 않은 초절기교.

    만일 직접 듣지 못했다면 푸르트벵글러는 연주가 가능한지를 먼저 의심했을 터였다.

    캐논은 그 폭발적인 음량으로 날갯 짓을 하는 와중에도 중간중간 다른 소리를 내었다.

    불새의 날갯짓을 연상시키는 주 멜로디 주변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믿을 수 없는 연주였다.

    한계 수준의 빠른 템포로 높은 음역대를 깔끔하게 연주하는 것마저 대단하게 느껴지는데, 바이올리니스 트 나윤희는 하나의 바이올린으로 두 개의 멜로디를 완벽히 연주하고 있었다.

    푸르트벵글러가 팔걸이를 꾹 쥐었다.

    이 놀라운 연주가 어디로 향하는지 단 한순간도 놓칠 수 없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카모토 료이치는 카덴차를 듣는 순간부터 생각을 그만두었다.

    잡다한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도 뛰 어난 곡이었고 연주였다.

    배도빈과 나윤희가 전달하는 있는 그대로의 감동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가슴과 영혼을 열고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고양되는 환희에 몸을 맡겼다.

    두 명의 거장과 마찬가지로.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다른 어떠한 행동과 생 각도 잊은 채, 그저 느낄 뿐이었다.

    나윤희가 현에서 활을 떼어냈다.

    1악장 프레스티시모(Prestissimo: 매우 빠르게)가 끝나고 잠시간의 정적.

    관객들은 진정할 수 없었다.

    터질 듯이 뛰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환희를 증명하고 있었다.

    배도빈은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한 단원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잠시 고개를 돌렸다.

    나윤희는 그 어떤 때보다도 밝게 웃고 있었다.

    ‘해, 해냈어.’

    ‘ 멋졌어요.’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것만으로도 서로의 감정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연주는 이제 1악장을 마쳤을 뿐.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였고.

    배도빈이 호른 주자들에게 신호를 주고선 두 팔을 힘차게 내렸다.

    호른이 부드럽고도 묵직한 소리로 노래했다.

    영웅의 등장이었다.

    호른에 뒤이어, 오보에와 바순이 영 웅의 당당한 걸음소리를 표현했고.

    불새가 날아든다.

    목관 악기의 소리가 잦아든다.

    아름답고 성스러운 불새를 본 영웅 은 자신도 모르게 발을 옮긴다. 아주 조심스럽게, 아주 작은 소리만 낼 뿐이다.

    배도빈이 나카무라 료코를 향해 지 휘봉을 휘둘렀다.

    비올라가 수풀처럼 노래했고.

    오보에와 바순이 다시금 모습을 드 러낸 순간 캐논이 나섰다.

    걷어낸 수풀 너머로 고고하게 서 있는 불새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사과를 보고 있다.

    다시 한번 호른이 당당히 나선다.

    영웅은 저도 모르게 그 아름다움에 이끌려 황금사과에 눈이 먼 불새를 잡아내고 만다.

    캐논이 비명을 지른다.

    깜짝 놀란 불새가 영웅에게 살려달 라고 간절히 애원한다.

    나윤희의 카덴차가 다시금 시작되었다.

    또다시 시작된 한계를 넘어선 연주는 1악장 때와는 달리 애절하고 서 정성이 짙었다.

    갑작스레 잡혀 당황한 불새의 감정 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주 멜로디와 동시에 진행되는 가냘 픈 울음.

    나윤희가 왼손만으로 연주할 때는 마치 불새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신이시여.’

    마리 얀스는 신을 찾았다.

    이토록 아름다운 멜로디는 생전 처음이었다.

    완벽한 불협화음 사용이 불새의 불안감을 표현했고 바람보다도 부드러운 전개는 그의 감수성을 자극했다.

    또한 그것을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의 기량에도 다시 한번 놀라고 있었다.

    ‘올라섰구나.’

    병실에 있는 찰스 브라움도 주먹을 꽉 쥐었다.

    저 무대에 오르지 못해 분했으나 자신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불새를 연주하는 후배를 보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윤희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이제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올라섰다고,

    유수의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 고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이가 배도빈이 만들어낸 아름 다운 세계에서 노래하는 캐논에 매 료되었다.

    그 순간.

    배도빈의 눈썹이 꿈틀했다.

    ‘소리가 달라졌어.’

    아주 작은 차이였으나 캐논의 소리가 연습 때와 달라졌다.

    단순한 실수인가.

    아니면 한계를 맞이한 것인가.

    배도빈이 나윤희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돌렸고, 그의 시야에 눈을 질끈 감고 괴로워하는 바이올리니스트 가 들어왔다.

    ‘ 아파.’

    나윤희는 손가락이 끊어질 것만 같은 고통을 필사적으로 참아내며 연주를 이어나갔다.

    짧은 시간 동안 혹사당한 그녀의 몸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고통이 한계에 치닫고.

    ‘ 아.’

    손끝이 찢어지고 말았다.

    손가락 끝에서 피가 흘러 현을 타고 내렸다.

    캐논의 소리가 바뀌었다.

    벌어진 상처를 파고든 바이올린 현 이 그녀의 손가락 끝을 헤집어 놓았다.

    그러나 연주를 그만둘 순 없었다.

    ‘안 돼.’

    나윤희는 피가 더 이상 현을 타고 연주를 방해하지 않도록 왼팔을 내렸다.

    자연스레 몸을 웅크리게 되었다.

    애절함이 점층 될 때마다.

    불새가 눈물을 떨어뜨릴 때마다 핏방울이 무대 위에 뚝뚝 떨어졌다.

    뒤늦게 그 광경을 눈치챈 관객과 시청자들은 입을 가렸다.

    ‘윤희야.’

    객석에서 두 손을 모으고 가슴 졸 이며 연주를 듣던 이승희는 이를 꽉 물었다.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단 한 번의 연주를 위해 몸과 영 혼을 불사르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방해할 순 없었다.

    ‘그만……. 그만해.’

    연주가 격렬해질 때마다 작은 핏방 울들이 부서져 내렸다.

    이승희와 마찬가지로.

    관객들은 자신들의 이중성을 저주 했다.

    애절한 연주와 함께 무대 위에서 피 흘리는 연주자를 보고 있으니, 그 열정과 처절함에 눈물을 흘렸으나 아름다운 연주를 계속 듣고 싶다는 생각이 함께했다.

    2악장 알레그로 논 몰토(Allegro non molto: 너무 빠르지 않게)가 끝났다.

    객석이 웅성거렸고.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은 무대 위 에서의 법을 지키느라 필사적으로 인내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당장 그들의 수석 연주자에게 달려갔을 것이었다.

    배도빈이 몸을 웅그린 채 간신히 서 있는 나윤희에게 다가갔다.

    ‘도빈 군……

    사카모토 료이치는 그의 오랜 친구를 안타깝게 보았다.

    만일 충분한 여유가 주어졌다면 베를린 필하모닉 B는 역사상 가장 충 격적인 연주를 해냈을 터였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도 부족했다.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를 하다 손 에서 피를 흘리는 경우는 수많은 일을 경험했던 그에게도 처음이었다.

    저 지경이 될 때까지 자신을 몰아 붙이고 피부가 찢어지고도 5분 이상 연주를 한 정신력은 타인이 감히 넘 겨짚을 수 없었다.

    배도빈에게 선택의 시간이 온 것이다.

    이대로 연주를 포기할지.

    강행할지.

    ‘괴로울 테지.’

    사카모토 료이치는 지휘자로서의 선택에 기로에 선 오랜 친구가 부디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길 바랐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역시 같은 마음으로 입을 굳게 다문 채 그저 지 켜볼 뿐이었다.

    모든 사람이 안타까워했다.

    이미 1분 이상 경과했다.

    마지막 3악장을 앞두고 긴 간격이 이어지고 있을 때, 나윤희의 상태를 확인한 배도빈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입이 막 떨어진 순간.

    배도빈의 목소리 대신 잔뜩 떨리는 목소리가 적막함을 꿰뚫었다.

    “하, 할 거야”

    한국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 필사적인 모습에, 놀라운 연주를 들려준 바이올리니스트가 어 떤 심정인지 넘겨짚을 수 있었다.

    이승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푸르트벵글러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푸르트벵글러는 눈물이 가득한 이승희를 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할 거야……

    나윤희가 그녀의 지휘자에게 다시 한번 청했다.

    배도빈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돌아 섰다. 나윤희와 단원들을 둘러본 뒤 입을 열었다.

    “멋진 연주였어요. 다들 정말 고마 워요.”

    그리고 나윤희의 손등에 손을 포개었다.

    “정말 고마워요.”

    “싫어!”

    나윤희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눈과 입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른 모든 이야기를 차치하고.

    연주를 강행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었다. 폭력이었다.

    무리를 해서 손에 이상이라도 생겼 다가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생명 이 끝일 수 있었다.

    배도빈은 이제 막 꽃을 피워 자신을 드러낸 아름다운 바이올리니스트 의 생명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에 비하면 오케스트라 대전의 즐 거움과 우승의 영광 따위 조금도 중 요치 않았다.

    “우승보다 누나가 더.”

    “우승이 아니야.”

    나윤희가 배도빈의 말을 가로막았다.

    “가, 가르쳐 줬잖아.”

    배도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심하여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고 무대 위의 압박에 못 이겨 구토 가 일상이었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가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윤희의 목소리가 분명히 전달되었다.

    “내 바이올린에 예쁘다고, 내 덕분 에 그런 거라고 했잖아.”

    나윤희는 연주를 하는 도중에도 자 신과 베를린 필하모닉이 함께 만드는 아름다운 하모니에 취했다.

    이 아름다움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것으로 자신이 인정받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알아준 위대 한 음악가에 대한 보답이라 여겼다.

    더 이상 우승은 중요치 않았다.

    “끄, 끝까지 할 거야.”

    한참을 서로 마주하다 나윤희가 고개를 돌려 본래 자기가 있던 자리로 향했다.

    당장에라도 다시 연주를 시작할 것 처럼 자세를 잡았다.

    ‘하게 해줘. 제발.’

    단 한 번의 연주를 위해 며칠 밤낮을 새우며 준비하는 배도빈은, 나윤희에게 있어 스승이자 지침이었다.

    나이 차이가 10살 가까이 났지만 나윤희는 천재라고 불리는 배도빈이 그 어떤 사람보다도 노력하고 있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진심으로 본받고 싶었다.

    배도빈이 직접 가르친 적은 없었지만 음악을 대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바뀌었다.

    무대를 너무나 간절히 바랐기에.

    그곳에서 연주하는 음악가의 자세를 곁에서 지켜봤기에 이대로 그만둘 수 없었다.

    그때까지 잠잠했던 객석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배도빈이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 다 지휘대에 올랐다.

    단원들이 다시금 자세를 잡았다.

    소소는 자신을 향한 지휘봉의 움직 임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도빈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본래 3악장과 달리.

    매우 느린 템포로 연주가 시작되었다.

    배도빈이 지휘 아래 악기들이 기교 보다는 서정적인 멜로디를 강조하는 데 힘썼고 그에 따라 음색은 더욱 풍부해졌다.

    나윤희가 눈을 질끈 감고 연주를 시작했다.

    그러나 통증은 앞선 연주는커녕 일 반적인 연주조차 허용치 않았다.

    ‘튕겨야 하는데.’

    찾아올 고통을 알기에 나윤희가 손을 벌벌 떨었다. 잘될 리가 없었다.

    충분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 손가락을 튕겼지만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소리만은 분명히 콘서트홀에 남았다.

    ‘ 아.’

    악장 왕소소가 불새의 눈물을 표현 했다.

    왼손의 부담을 덜어준 것이었다.

    나윤희가 배도빈을 보았다.

    그 뒷모습이 무척이나 크게 느껴졌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는 차분히 이어져 대단원의 끝에 이르렀고.

    배도빈이 주먹을 꽉 쥐어 연주를 마치자.

    “브라보!”

    객석으로부터 환호와 박수 그리고 그들의 감사와 경의가 해일처럼 밀 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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