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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284화 (284/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84화

    62. 백아절현(1)

    베를린 필하모닉은 밀려드는 기자 들을 피해 무사히 대기실로 들어올 수 있었다.

    프로그램과 독주자가 발표되었을 때의 상황을 예측한 멀핀 과장이 다른 길로 단원들을 안내한 덕이었다.

    단원들은 별 탈 없이 연주를 준비할 수 있었지만 마음만은 나윤희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여러 커뮤니티와 디지털 스트리밍 사이트에 올라오는 글을 보았기 때 문이었다.

    “나윤희 수석 괜찮을까?”

    “그러게. 반응이 생각보다도 더 안 좋던데.”

    지휘자 대기실 옆, 개인 대기실에 있던 소소도 나윤희가 걱정되긴 마 찬가지라 복도로 나왔다.

    때마침 나윤희가 걱정되어 찾아온 이승희가 소소를 불렀다.

    “윤희는 좀 어때?”

    “이제 가보려고. 언니도 같이 갈래?”

    "응."

    두 사람은 나윤희가 있을 대기실로 향하여 문을 두드렸다.

    “드, 들어오세요!”

    이승희와 소소는 서로를 본 뒤 조심스레 문을 열었는데 방 안에는 나윤희가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는데 두 사람을 확인하자 그제야 안도한 듯했다.

    ‘아직 반응을 안 봤을 수도 있는데 괜히 티낼 필요 없잖아.’

    이승희는 우선 최대한 평상시처럼 행동했다.

    “놀러왔지롱.”

    이승희가 웃으며 앉았다.

    소소는 손을 들어 인사했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멀뚱멀뚱 나윤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가락을 꼼지락대고 있었다.

    “긴장 돼?”

    이승희가 퍼뜩 고개를 돌려 소소를 보았다. 그러지 않아도 부담스러울텐데 굳이 물어봐 상기시키는 것보 단 자연스럽게 긴장을 풀어주고 싶었다.

    “으, 응. 개, 개인 대기실을 쓰는 건 처음이라서.”

    소소에게 향했던 이승희의 고개가 나윤희에게로 향했다. 예상했던 대 답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아하하. 넓고 조용한 게 좋지 않아?”

    “응. 조용해서 좋은데, 단원들이랑 같이 있는 게 더좋은것 같기도……

    “그럼 단체 대기실로 가도 돼. 응.

    네 마음이야. 시간도 많이 남았고.”

    다행히 대화가 진행되어 이승희가 안도하고 있을 때 소소가 입을 열었다.

    “댓글 봤어?”

    “야! 왕소소!”

    간신히 긴장을 풀 수 있게 일상적 인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소소가 초를 쳐버렸다.

    소소는 무슨 문제라는 듯 이승희를 보았고 이승희는 나윤희 앞에서 설 명할 수 없는 말을 삼키느라 속이 터졌다.

    그때 나윤희가 웃기 시작했다.

    이승희와 소소가 그것을 의아하게 보았다. 시선을 느낀 나윤희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응……. 봤어.”

    “괘, 괜찮아?”

    이승희의 질문에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움 악장님도 도빈이도 대단하 니까 다들 그럴 거라 생각했어. 언 니도 알잖아. 나 쓸데없는 걱정 많은 거.”

    “아, 아니야. 생각이 깊은 거지.”

    “언니가 나 거, 걱정해 주느라 와준 것만으로도 기뻐. 소소도.”

    “토는…… 안 했어?”

    나윤희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희는 코끝이 찡했다.

    한국인이 유럽에서 살기 얼마나 어려운지 이승희는 잘 알고 있었다.

    전혀 다른 문화와 환경에 적응하는 것조차 버거운데 지독하게 깊이 깔린 동양인에 대한 차별과 국내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경쟁.

    이승희도 겪은 일이었기에 마음 여린 나윤희가 항상 마음이 쓰였다.

    특히나 오늘은 이승희 본인이라도 그 부담감을 짊어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배도빈과 찰스 브라움을 대신하는 일은 세계 최고의 연주자들이 모여 있다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들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큰 공연 때마다 긴장해 토를 해대던 나윤희가 맡은 것이니 걱 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는데.

    무엇이 그녀를 강하게 했는지 너무도 의연해 보였다.

    “왜, 왜 울어.”

    “끄흐응윽. 끅. 기특해. 기특흡해.”

    “오늘 언니 좀 이상해. 상한 거 먹었어?”

    “넌 좀 끄으읍. 가만있어. 흑.”

    이승희가 진정하고 소소와 함께 나가자 나윤희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조심스레 배려하려던 이승희도.

    와서 과자만 먹고 간 소소도 모두 힘을 주고 싶어서 왔다는 걸 잘 알았기에 두 사람이 찾아오기 전까지 떨리던 몸이 조금은 안정되었다.

    나윤희에게 있어 이승희와 소소는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첫 번째 사람 이었던 만큼 더 위로가 되었다.

    “하, 하나 더 먹을까.”

    나윤희가 가방에서 청심환을 꺼냈다. 포장지를 벗겨 입안에 넣고 꼭 꼭 씹는데 예전에는 그렇게 썼던 그 것도 이제는 쓴지 몰랐다.

    대기실 모니터를 트니 무대 위에 오른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비쳐지고 있었다.

    ‘ 멋있다.’

    청심환을 반쯤 씹자 지휘자 제르바 루빈스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관을 전부 가린 턱수염과 강렬한 눈빛이 카메라에 잡혔고 TV와 벽 너머 복도를 통해 관객들의 환호가 전해졌다.

    ‘차이코프스키 D장조 협주곡이었지.’

    나윤희가 직원이 챙겨준 팸플릿을 열었다.

    ‘아, 다니엘 이반 씨가 하시는구나. 재밌겠다.’

    기왕이면 대회 참가자들에게 따로 마련된 객석에서 직접 듣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만큼은 밖이 부담 스러워 그럴 수 없었다.

    시카고 심포니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나윤희는 눈을 감고 아름다운 선율을 들으며 가슴을 달랬다.

    단원들이 무대 위에서 마지막 조율을 마치고 기다리고 있다.

    객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전해져 온다.

    아직 시카고 심포니가 남긴 여운을 잊지 못한다는 뜻이다.

    내 생각에도 정말 멋진 공연이었다.

    ‘제르바 루빈스타인.’

    칼 에케르트와 함께 푸르트벵글러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지휘자가 지휘한 곡은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차이코프스키는 단 한 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만들었을 뿐인데, 그 뛰어난 작품성이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던 것 같다.

    대학에서 듣자하니 한 멍청한 비평가가 ‘악취가 난다’라는 말을 했다 던데 예나 지금이나 비평가란 인간 들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제르바 루빈스타인과 시카고 심포니의 연주는 내가 들었던 그 어떤 바이올린 협주곡보다 훌륭했다.

    그러나.

    “주, 준비됐어.”

    이 바이올리니스트를 데리고 이기지 못할 리 없다.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다.

    이미 며칠간 함께 밤을 지새우면서 보냈던 시간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단지 조금 전부터 떨기 시작한 나윤희의 손을 잡아주었다.

    아프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쥐었다.

    이것으로도 내 신뢰가 충분히 전해질 것이다.

    “도, 도빈아 놔줘……

    아닌가 보다.

    멀쩡했던 나윤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고 몸은 더 떨기 시작했다.

    손을 놓자 한두 번 크게 숨을 쉬더니 허탈하게 한 번 웃는다. 그러고는 입을 앙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계단에 올라섰다.

    평소보다 천천히 올라서 무대에 오르자 언제나와 같이 환호와 박수가 전신을 때렸다.

    돌아보진 않았다.

    소소가 단원들을 일으켰고 나윤희와 나란히 서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저들 중 대부분이 이 연주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에로이카와 함께 이번 대회를 위해 가장 많은 준비를 했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불새에 대한 확신이 있다.

    현대 음악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 쳤다는 러시아 출신의 음악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특유의 대담한 화성과 강렬한 리듬 은 가히 충격적이었고 초기 그의 음악은 내게 새로운 영감을 안겨주어 덩케르크 철수 작전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작업할 때 반영되었다.

    오늘은 위대한 후배를 기리며 그의 음악을 더욱 발전시킨 연주를 하는 날이다.

    고개를 돌렸다.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팔을 높이 들자 캐논이 비상했다.

    창공을 향해 날아오른 불새가 날개를 펼쳤고, 캐논의 노래는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케 했다.

    지휘를 받은 목관 악기들이 따라붙어 지면을 깔고.

    소소와 제1바이올린이 세찬 바람을 연주해대나, 불새의 위용은 흔들림 없다.

    창공에 이르러 곧게 뻗어 나오는 캐논의 청명한 연주가 콘서트홀을 가득 메우고.

    마음껏 날갯짓하며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멈춘다.

    이제 온전히 캐논의 독무대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날카롭게 무대 위를 지켜보았다.

    배도빈과 단원들을 믿으나 분명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나 소심한 나윤희가 캐논이 가진 무게를 짊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 서는 푸르트벵글러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베를린 필하모닉 B가 어떤 상황인지 전해 듣고는 그들이 베를린 필하모닉의 정신을 지녔음을 알 수 있었다.

    최고의 연주를 한다.

    어떠한 조건에서도 무대 위에 오른 이상 최고의 연주를 한다는 고귀한 정신이 저 젊은이들을 이끌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나윤희가 첫 연주를 시작한 순간 푸르트벵글러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거침없이 뿜어내는 강렬한 열기.

    찰스 브라움의 불새와는 달랐으나 태양을 집어삼킨 듯이 터져 나오는 맑고 큰 소리에 나윤희가 자신을 이겨냈음을 알 수 있었다.

    ‘성장했구나.’

    악장 오디션 때만 해도 벌벌 떨었고 부수석이 되고 나서도 공연 때마 다 구토를 하던 녀석이 저렇게 열정 적인 연주를 할 수 있다니.

    푸르트벵글러는 진심으로 나윤희를 기특하게 여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가 카덴차를 시작했을 때.

    푸르트벵글러는 무심코 입을 벌리고는 닫을 수 없었다.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을 시청하는 음악 팬들은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에 대해 여전히 우려를 표했다.

    ㄴ 진짜냐고 ㅠㅠ

    ㄴ 도빈이 지금이라도 바이올린 잡았으면 좋겠다.

    배도빈과 나윤희가 무대 위에 오르 자 채팅창이 올라가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1,800만 명이 시청 중인만큼 방금 입력된 글조차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요란스러웠으나 그 내용은 모두 배도빈이 나서지 않음에 대한 슬픔 또는 분노였다.

    그러나 연주의 시작을 알린 캐논의 날갯짓에 팬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글이 올라오는 속도가 현저히 줄어 이제는 어느 정도 읽을 수도 있었다.

    ㄴ 뭐야. 좋잖아?

    ㄴ 박력 봐. 시작부터 치고나오는구나.

    ㄴ 빼액! 배도빈 연주 들려주라!

    ㄴ 배도빈은 배도빈이네. 원래 첼로 랑 콘트라베이스가 나오고 바이올린 이 나오는데,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바꾸면서 구조 자체가 바뀌었는데?

    ㄴ 진짜 과감한 편곡이다. 배도빈 아니면 욕먹을까 봐 이런 거 못 하지.

    ㄴ 나윤희? 연주 좋은데? 힘차고.

    ㄴ 생각보다 좋긴 한데.

    ㄴ 그래도 배도빈 듣고 싶은 거야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같은 생각이지. 근데 확실히 캐논이라 그런지 음량이 엄청나네. 다른 악기를 뚫고 들림.

    ㄴ 진짜 악기 때문인가? 저렇게고 음역대를 빠르게 연주하는데 저만한 음량에 소리가 안 찢어진다고?

    과감한 편곡으로 시작을 강렬히 알린 배도빈과 의외의 실력을 보여주는 나윤희를 향한 팬들의 반응이 점차 호전되었다.

    연주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아쉬움마저 잊게 할 정도로 흡입력 있는 연주가 이어졌다.

    한계 수준의 빠르기로 연주되면서도 비브라토가 유지되었을 때는 현장의 관객도 스트리밍으로 관람하는 시청자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ㄴ 와앀 ㅋㅋㅋㅋ 뭐냨ㅋㅋㅋ

    ㄴ 소름 돋는닼ㅋㅋㅋㅋ

    ㄴ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야?

    그러한 반응이 올라오던 채팅창은 나윤희의 카덴차가 시작된 순간 일 순간 멈추고 말았다.

    가슴을 관통해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연주에 객석과 모니터 앞에 앉은 수많은 이들이 넋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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