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83화 (283/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83화

    61. 이 시대의 거장들(3)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모두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보죠.”

    “감사합니다!”

    “저, 저…… 조금만 더.”

    “네. 같이 있어요.”

    연습을 마치고, 베를린 필하모닉 B단원들은 배도빈과 나윤희를 안쓰럽 게 보았다.

    내일 당장 4차전을 치러야 하는데 도 자발적으로 연습을 더 하겠다는 나윤희와 갑작스럽게 곡을 수정해야 했던 배도빈은 그들 눈에도 무리하 고 있었다.

    매일 10시간 이상 자신을 갈고닦는 단원들이었지만 배도빈과 나윤희는 연습에 있어서는 그렇게 독할 수 없었다.

    “저러다 쓰러질 것 같아.”

    “나윤희 수석 손 봤어? 어떻게 그렇게 되고도 계속하는지.”

    “브라움 악장을 대신하는 거잖아. 부담스러울 수밖에. 난이도는 말할 것도 없고.”

    “조금 더 쉽게 해도 괜찮을 텐데.”

    “두 사람 다 그럴 사람이 아니니 까.”

    “그러게. ……나 가끔 나윤희 수석 보면 부끄러워져.”

    “나도. 매일 하는 연습만으로도 벅 찬데 저러는 거 보면 뭐랄까. 내가 게으른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나윤희 수석이 대단한 거야. 솔직 히 나 수석 아니었으면 누가 브라움 악장 대신했겠어? 저렇게 노력하니까 가능한 거겠지.”

    “……안 되겠다. 나 좀 더 할래.”

    “ 나도.”

    단 한 번의 연주를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배도빈, 나윤희에게 단 원들도 자극을 받았다.

    한편 연습실에 남은 배도빈은 나윤희의 연주를 듣고 자신이 직접 연주 해 보며 완성도를 높여 나가고 있었다.

    ‘집념이야.’

    배도빈은 무엇이 나윤희를 이렇게 까지 몰아붙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손가락이 다 터져 나가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그 집념이 고마웠다.

    그 역시 그러했기에.

    이렇게 함께 아름다운 연주를 위해 노력하는 길을 함께할 수 있기에 며 칠 밤낮을 새워도 즐거웠다.

    ‘ 대단해.’

    그러한 마음은 나윤희도 마찬가지였다.

    독주 부분을 수정하는 것도 일이었지만 완벽을 기하는 배도빈이 그것으로 그칠 리 없었다.

    카덴차 앞뒤는 물론 그로 인해 곡 전체를 손보면서도 단원들이 조금이 라도 쉽고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안배 했다.

    그럼과 동시에 연주에만 매달렸던 나윤희의 바이올린을 직접 교정해 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담은 커졌지만 그래서 바이올린을 놓을 수 없었지 만 배도빈이 함께해 줌으로써 두렵거나 외롭지 않았다.

    “잠깐 쉬어요.”

    “아, 응.”

    배도빈이 물을 마셨다.

    나윤희도 몇 시간째 연달아 연습했기에 목이 타 물병을 집으려 했다.

    그러나 무심코 뻗은 왼손에 통증이 밀려들어와 병을 놓치고 말았다.

    긴장하고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 아.”

    나윤희가 허겁지겁 닦을 것을 찾고 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배도빈이 나서서 나윤희를 앉히고 직접 휴지를 가져다 바닥을 닦 기 시작했다.

    “내, 내가 할게.”

    “앉아 있어요.”

    나윤희가 휴지를 빼앗으려 했지만 배도빈은 이미 한계에 이르러 몸이 망가지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가 그 런 행동을 하도록 허용치 않았다.

    연주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지만 다른 일로 나윤희가 고통 받는 일은 조금도 용납할 수 없었다.

    바닥을 닦은 배도빈이 손을 씻으러 나간 뒤.

    연습실에 홀로 남은 나윤희는 엉망이 된 손을 내려다보았다.

    찢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들고 있었다. 이제 더 연주를 했다간 정말 끊 어질 것만 같았다.

    활을 쥐는 오른손이 왼손의 고통을 나눠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던 중 배도빈이 돌아왔다.

    “이만 돌아가요.”

    “아, 아직.”

    “내일 무대에 오르지 못하면 모든 게 소용없어져요.”

    “……응.”

    잠시 고개를 숙인 나윤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도빈이 그녀를 대신해 악기를 정리했고 나윤희는 더 잘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했다.

    만약 처음부터 불새를 완벽히 연주할 수 있었다면 누구도 고생하지 않았을 거란 멍청한 생각이 아직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때 배도빈이 입을 열었다.

    “아까 보니 오늘 암스테르담이 올 라갔대요.”

    악보를 챙긴 뒤 그것을 품에 안고 서 나윤희를 보았다.

    “대단했나 봐요. 사카모토가 칭찬을 잘하는 편이긴 하지만 그렇게 말 하는 건 처음 봤어요.”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요.”

    두 사람이 연습실을 나섰고 배도빈 이 입을 열었다.

    “4라운드 뒤에는 쉬어요.”

    “어?”

    “반드시 결승 무대에 서게 해줄 테 니까.”

    나윤희는 놀랐다.

    ‘이길 거라 생각하고 있어.’

    그녀는 아직 본인의 연주에 만족하 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연습을 통해 찰스 브라움이 연주하는 불새를 들어왔던 것이 가 장 큰 요인이었다.

    그의 연주는 신성하게 느껴질 정도 로 고상하고 아름다웠고 나윤희는 그 연주를 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북미 최고의 악단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2라운드 전체 4위를 차지할 정도 로 뛰어난 기량을 자랑하며, 지휘자 제르바 루빈스타인은 거장 중의 거 장이었다.

    그럼에도 배도빈은 승리를 확신하 고 있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나윤희가 고개를 돌렸다. 배도빈은 그 시선을 올곧이 대했다.

    “바이올린 소리가 예뻐서 힘껏 연주할 수 있다고 했죠?”

    “……응.”

    “저는 다르게 생각해요.”

    “뭐, 뭘?”

    “누나의 바이올린이 예쁜 건 그걸 연주하는 사람이 아름답기 때문이에요. 악기는 악기일 뿐 연주자를 대 신할 순 없어요.”

    배도빈이 연습실 주변을 둘러싼 경비에게 캐논을 넘기며 말했다.

    나윤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그녀 평생 에 있어, 단호한 목소리와 곧은 눈 빛으로 틀리지 않았다고, 아름답다는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너는 애가 왜 이렇게 굼뜨니?’

    ‘밥을 대체 언제까지 먹을 거야? 그럴 거면 먹지 마!’

    유치원에서도.

    ‘쟤 좀 음침하지 않아?’

    ‘저번에 말 걸었는데 대답도 안 하던데.’

    ‘말더듬이잖아. 킥킥.’

    중학교에서도.

    ‘야, 이번 콩쿠르 진짜 중요해서 그런데 나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넌 3년이나 남았잖아.’

    ‘그래. 내년에 1등하면 되잖아. 양 보 좀 해.’

    대학에서도.

    ‘언니, 대체 공연할 생각이 있긴 한 거야? 요즘 누가 모차르트를  어. 자극적이고 센 걸 해도 시원찮을 판에 왜 자꾸 그래?’

    ‘윤희 너 의상 컨셉 좀 바꿔야겠다. 치마에 슬릿 좀 넣고 머리도 올려보고. 응?’

    ‘아, 답답해. 할 말이 있으면 똑바 로 좀 해. 더듬지 말고. 그래서 뭐, 계약 조건이 이상하다고? 야, 너 무 대에 서게 해준 나한테 그게 할 소 리냐?’

    첫 직장에서도 소심하고 순하게 생 긴 나윤희는 쉬운 사람 취급을 받았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어린 나윤희는 그것을 차마 어머니, 아버지 께 말할 수 없었다.

    착한 딸이고 싶었다.

    힘들게 일하는 부모에게 딸이 멍청 이 취급 받고 있다는 걸 말할 수 없었다.

    구박은 계속되었고 그럴수록 나윤희는 말수가 적어졌다.

    말을 더 심하게 더듬었고 혼날 것을 걱정해 생각이 많아져 행동은 더 느려졌다.

    착한 아이에서 이용하기 쉬운 사람으로.

    편한 사람에서 막 대해도 되는 사람으로 되면서 나윤희에게는 바이올린만이 유일한 안식처였다.

    무대에서 연주할 수만 있다면 어떤 것도 참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아무리 많이 연습하고 작은 무대에 올라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나 이거 조금 좋아진 거 같은데.’

    ‘오늘은 연주 잘한 거 같아.’

    ‘이거 연습했는데. 눈치 못 챈 걸까?’

    평생을 무시당하고 살아와 본인조 차 타인에 대한 기대는 없을 거라 생각했거늘.

    그렇지 않았다.

    조금씩 발전하고 있는 바이올린만큼은 누군가 알아주길 바랐다.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든든한 버팀 목이었지만 바이올린을 이해할 순 없었다.

    다른 이들은 애초에 말 더듬고 굼뜬 나윤희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베를린 필하모닉에 들어와서는 누구보다도 진짜 자신의 모습을 알아 주는 사람이 생겼다.

    오디션 때부터.

    부수석, 수석 임명 모두 배도빈이 나섰던 걸 모를 리 없었다.

    홀로 연습할 때도.

    작은 의견이 있을 때도.

    언제나 알아봐 주었던 배도빈은 지 금도 흔들림 없이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을 알아봐 준 유일한 사람의 말이라면, 믿어도 될 것 같았다.

    나윤희가 입을 앙다물었다.

    OOTY 오케스트라 대전 4라운드

    4차전 당일, 오전 9시 30분.

    베를린 필하모닉과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프로그램이 발표되었다.

    시카고 심포니는 악장 다니엘 이반을 독주자로 내세워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를 연주한다 밝혔고.

    베를린 필하모닉은 제2바이올린 수 석 나윤희를 독주자로, 배도빈이 편 곡한 이고르 차이코프스키의 발레곡 불새를 연주한다고 밝혔다.

    그간 배도빈이 파가니니의 캐논을 연주한다고 알려졌던 만큼 팬들의 반응은 거셌다.

    ㄴ 뭐야. 배도빈이 연주하는 거 아니었어?

    ㄴ 나윤희가 누구야;;

    ㄴ 바이올린 켜면서 지휘한다던 건 뭔데?

    ㄴ 캐논이 아무나 연주하는 악기냐? 푸르트벵글러랑 니아 발그레이, 배도빈까지 이어진 전통성은 어쩌고?

    ㄴ 아 진짜 암 걸릴 것 같다.

    ㄴ 입단한 지 2년밖에 안 되는 색깔 없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캐논을, 그것 도 오케스트라 대전에서 연주한다고?

    ㄴ 사이다 좀;;

    ㄴ 이거 배도빈의 결정이면 단단히 잘못 생각한 듯. 무리수야.

    국가, 지역을 가릴 것 없이 배도빈 의 연주를 기대했던 이들은 크게 실 망했다.

    그나마 베를린 필하모닉의 팬이었던 이들도 캐논이 가지는 역사적, 전통적 의미를 근거로 베를린 필하모닉의 선택을 맹비난하였다.

    한편, 사무실에 남아 오케스트라 대전을 시청하고 있던 네이즈의 이 재은은 코웃음을 쳤다.

    “하? 미쳤나 봐. 진짜.”

    그때 옆 테이블에서 네이즈 기획운 영3팀장이 모니터 너머로 고개를 들었다.

    “이 대리, 오케스트라 대전 발표 봤어?”

    “네, 팀장님.”

    “내가 잡으라고 했어, 안 했어?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수석이 되질 않나, 독주까지 하질 않나. 어쩔 거야?”

    “아이 참. 그 정도 인간 아니라니 까요? 아마 떨어서 연주도 제대로 못 할걸요?”

    대수롭지 않게 여긴 이재은은 다시 한번 모니터를 보고 웃었다.

    ‘찰스 브라움이랑 배도빈을 대신해서 나윤희라고? 진짜 어이가 없네. 아니, 대체 어떻게 자리를 얻었대? 얹혀산다더니 배도빈이랑 무슨 사이 인 거 아냐?’

    이재은은 입술을 씰룩이고선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나윤희를 떠올렸다.

    당시 네이즈에서 나윤희에게 제안한 맥시멈은 재계약비 2억 원에 4 년 계약, 2:8의 비율(아티스트:네이즈) 이었다.

    천천히 높게 부를 생각에 1억을 불렀던 이재은은 당시 나윤희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 나. 마, 말 더듬고 그래도 바 보는 아니야. ……갈게.’

    나윤희를 답답하고 멍청하게 생각 했던 여겼기에 자리를 박차고 나간 그때를 잊을 수 없었다.

    이재은은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몇 시간 뒤 자신에게 물을 먹인 나윤희가 전 세계적으로 망신당할 것을 떠올렸다.

    ‘안 봐도 뻔하지. 지금쯤 토하고 난리도 아닐 텐데 독주는 뭔 독주야.’

    그러고는 담배 연기를 깊게 마시고 내뱉은 뒤 밀린 일을 처리하기 위해 사무실로 복귀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