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82화 (282/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82화

    61. 이 시대의 거장들(2)

    여유로운 독주 바이올린을 따라 들 판에 나선 관객들은 은은하게 퍼지는 호른과 바순을 풍경으로 삼았다.

    작은 소리가 어깨에 내려앉으니 마 음이 들떠 발이 가벼워졌다.

    가느다란 현악기의 인도에 따르자 어느덧 숲에 이르렀고 그 분위기에 도취되어 각자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때로는 고운 온천물처럼.

    때로는 시린 계곡물처럼 이어지는 심상에 저마다의 심상에 도취되어 음악을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봉이 하늘하늘 날아든다.

    여정은 계속되고.

    숲을 지나 웅대한 산 입구에 이르 러서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산길을 오르는 관객들은 반복되는 다섯 박자의 음형 사이마다 포진된 세 박자의 돌출에 의해 그때마다 마치 높은 바위를 맞이한 듯했다.

    그러나 하나의 봉우리에 올랐을 때 가려져 있던 시야가 트이고.

    밀려드는 충족감.

    가슴이 벅차오른다.

    1악장 알레그로 논 트로포(Allegro non troppo: 빠르고 지나치지 않게)가 끝나고 잠시간의 적막.

    산행 중의 잠시간 휴식을 가진 관 객들은 숨을 고를 뿐이었다.

    ‘정말 대단한 친구야.’

    객석에 앉아 있던 마리 얀스가 깊은 감동을 느끼며 감탄했다.

    비록 걸어온 길은 달랐으나 추구하는 바는 두 거장 모두 같았다.

    아름다운 음악.

    감동을 주는 음악.

    절제 속의 미를 탐구했던 마리 얀 스는 감성 짙은 연주를 하진 않았지 만, 푸르트벵글러와 같은 지휘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자네가 나오지 않다니. 암. 말이 안 되고말고.’

    마리 얀스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가 새로운 세대에게 자리를 양보하 기 위해 준비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배도빈을 데리고 있었더라면 푸르트벵글러와 같은 생 각을 했을 거라고 인정하면서도.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의 음악을 더 즐기고 싶었다.

    그렇기에 오케스트라 대전에 참가 하길 권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독일 출신의 고집스러운 지휘자는 또다시 세계를 울리고 있었다.

    ‘참으로 닮았어.’

    마리 얀스는 막 시작된 2악장에 다시금 몸을 맡기며 생각했다.

    가슴에 새겨지는 깊은 서정성과 그 것을 감추기 위한 웅장한 음량과 위 엄 있는 음색 그리고 엄숙한 박자감 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푸르트벵글러의 강점이었다.

    ‘마치 베토벤 같군.’

    푸르트벵글러의 곡과 그의 지휘는 인류가 낳은 최고의 음악가를 떠올 리게 했다.

    불굴 끝에 불멸을 이룬 위대한 자 의 정신을 이어받은 듯했다.

    마리 얀스는 자신의 최대 라이벌이 자 동료 음악가인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실로 가슴 깊이 존경했다.

    그리고 부러워했다.

    배도빈.

    감히 저 완벽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넘어 마치 한계라는 것을 부정 하듯 나아가는 천재 음악가를 후계 자로 두고 있으니 참으로 부러웠다.

    여태 남을 시기하거나 질투한 적이 없었던 라트비아의 고귀한 음악가 마리 얀스가 유일하게 부러워하는 일이었다.

    푸르트벵글러가 베토벤의 정신을 이어받았다면, 배도빈은 두 위대한 음악가의 장점을 한데 모아둔 것만 같았다.

    필시 얼마 지나지 않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브루노 발터 그리고 마리 얀스 본인에게 붙어 있는 세계 최고의 지휘자 라는 이름을 가져갈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아직.

    아직은 아니다.

    지금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이처 럼 큰 감동을 주는 것처럼 그들 세대의 음악이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자신의 음악을 더욱 발전시키고 싶었다.

    70대에 이른 마리 얀스는 그 일생 의 호적수의 완벽한 음악을 온몸으로 느끼며.

    아직 더 나아갈 수 있다고.

    늙은 육신이 버티는 한 아름다운 음악에 더 근접할 수 있다고 여겼다.

    베를린과 클리블랜드의 경합은 멋 진 대결이 될 거라는 세간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결과로 마무리되었다.

    317만 표.

    폭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98만 표를 획득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압도적인 격차로 꺾고 OOTY 오케스트라 대전 세미파이널에 진출 했다.

    런던 심포니가 250만 표의 지지를 받아 최다 투표수 부문에서 신기록을 수립한 지 단 하루 만의 일이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ㄴ 야, 이 개미쳤다 진짜.

    ㄴ 말 좀 곱게 쓰세요.

    ㄴ 아니 진짜 너무 좋은데 표현할 길이 없어서 그럼.

    ㄴ 듣다가 숨 쉬는 거 까먹었다.

    ㄴ 40분 동안 숨 안 쉬면 죽어ㅋㅋ

    ㄴ 이분이 취미로 지휘자하신다는 분인가요?

    ㄴ ???

    ㄴ 이건 또 신선하게 미친 자네.

    ㄴ ㅋㅋㅋ 저거 드립임 머리카락 없는 최강 캐릭터가 주인공인 만화 가 있는데 그 캐릭터 대사가 ‘취미로 히어로를 하는 사람입니다’임ㅋㅋㅋ

    ㄴ ㅇㅇ. 걘 머리카락 대신 힘을 얻었고 푸벵옹은 머리카락을 잃고 음악을 얻었지.

    팬들은 이 시대 최고의 지휘자라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세계 정상의 베를린 필하모닉이 들려준 대여정에 깊이 감동했다.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연주였던 만 큼 언론과 평단 그리고 팬들도 각자의 방법을 통해 그때의 감동을 되짚었다.

    유력 음악 잡지에서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며 호평을 쏟아냈고.

    언론에서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하모닉에 대한 짧은 영상을 올려, 그들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하고 싶은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 켜 주었다.

    ㄴ 인생 자체가 음악이네;;

    ㄴ 한 악단에서 41년간 재임 cc

    ㄴ 정확히는 48년임.

    ㄴ 기사에는 지휘자로 41년간 있었다고 하던데?

    ㄴ 7 년간 악장으로 있었음. 당시 지휘자가 그 유명한 카라얀이고.

    ㄴ ㅋㅋㅋㅋ 그둘이 사이 진짜 더럽 게 안 좋았는데 신기하지.

    ㄴ 푸르트벵글러가 베를린 필하모닉 에 처음 입단한 게 70년대 후반이었는데 당시부터 주목받았음.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10대 때부터 야 샤 하이페츠의 재림이라 불렸으니 까.

    ㄴ 여기 대체 나이대가 어떻게 되는 거야;; 70년대 이야기를 어태 아는 거임?

    ㄴ 아조씨 드립 치기에도 미안해질 연배시겠다.

    ㄴ 푸르트벵글러가 왜 최고의 지휘 자인지 오늘에서야 알았다. 70대인 그는 지금도 발전하고 있다.

    ㄴ 준결승전 진짜 너무 기대된다.

    ㄴ 미쳤어 진짜.

    ㄴ 같은 생각.

    깊은 밤이 되어서도 그러한 분위기는 사그라질 줄 몰랐는데, 그러한 감정은 과연 이토록 멋진 경험을 선 사해 준 베를린 필하모닉과 런던 심 포니의 세미파이널이 어떨지에 대한

    기대감으로 번졌다.

    언론도 팬들의 이러한 생각을 눈치 채고 곧장 런던과 베를린 두 도시의 스토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고전의 런던과 혁신의 베를린.

    양쪽 모두 위대한 지휘자를 둔 정 상급 오케스트라였기에 팬들의 관심은 끊어질 줄 몰랐다.

    ㄴ 아무튼 정말 세대를 넘어선 지휘 자임.

    ㄴ 진짜 드라마틱하지 않냐? 30년 간 정점을 유지했던 사람이 점차 쇠퇴기를 맞이했는데 근 10년 만에 부활했음.

    ㄴ 시퇴기?

    ㄴ 런던이랑 암스테르담에 밀렸던 건 사실이잖아.

    ㄴ 글쎄. 암스테르담은 몰라도 런던 이랑은 비교하기 애매한 거 같은데.

    ㄴ 2010년부터 2021년까지의 관객 수를 보면 런던 심포니랑 런던 필하모닉이 베를린보다 훨씬 많았음.

    ㄴ 그거 인터플레이 덕분이잖아. 서 비스 개판으로 해서 악단들이 인터 플레이랑 계약 끊으니까 귀신같이 내려오던데?

    ㄴ 인터플레이가 망하고 런던 쪽 악단들 수입이 크게 준 건 사실인데, 그렇다고 베를린 필하모닉이 그 영 향을 받은 건 아니지. 배도빈이 복 귀하면서부터 진짜 악단 전체를 뜯 어고쳤잖아.

    ㄴ 근데 그러고 보니 요즘 인터플레 이 안 들어간 지 오래됐네.

    ㄴ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가. 서 비스 종료됨.

    ㄴ 엥? 그렇게 큰 회사가? 이렇게 빨리?

    ㄴ JH에 시장 다 빼앗기고 거덜 났 음. 그렇게 벌려놓았던 사업들 원금 회수도 못 했다고 하던데. 하여튼 영국은 브렉시트 이후로 삽질만 해 대는 듯.

    그렇게 밤이 지나고.

    음악 팬들은 피로조차 느끼지 못한 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동등하게 평가받는 또 다른 거장, 마리 얀스의 지휘를 기대했다.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이 4차전을 준비하기 위해 연습에 몰두하고 있을 때, 배영준도 잘츠부르크에 도착했다.

    크리크 국제 콩쿠르, OOTY 오케스트라 대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로 이어지는 대규모 행사로 인해 수 백만 명의 관광객이 군집한 잘츠부르크는 더없이 북적이고 있었다.

    “아빠 !”

    “어이구, 우리 아들. 그새 많이 컸 네?”

    배도진은 배영준을 보자마자 뛰어 가 안겼다. 발굴 작업을 하느라 결 혼기념일 이후로는 몇 달간 집에 돌 아오지 않았기에 특히 더 애틋했다.

    “살 탄 것 좀 봐.”

    유진희가 배영준의 얼굴을 어루만 졌다. 잔뜩 그을려 얼굴이고 목이고 팔이고 까매진 남편을 보니 갑자기 화가 났다.

    “그러니까 선크림 좀 바르라고 했잖아요.”

    “그게 아침에 바르긴 하는데.”

    “계속 바르래두.”

    “아하하. 그럴게.”

    그러나 드디어 하고 싶은 일을 마 음껏 하게 되어 밝게 웃는 것을 보 자 유진희도 마냥 화를 낼 수 없었다.

    유적 탐사에 미친 남편과 음악에 미친 첫째, 엔지니어가 되겠다는 둘 째도 벌써부터 기계만 보면 눈이 돌 아가니 집안 내력인가 싶기도 했다.

    “여기.”

    배영준이 팔찌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에요?”

    “자제 조달하려고 갔는데 당신 생각이 나서. 여기 보면 메디치 가문 의 문양이 새겨져 있지? 진품이라 구.”

    유진희는 어이가 없었다.

    연애시절 배영준에게 맞춰주기 위해 관심에도 없는 역사 이야기를 하 다가 대학 시절 들은 메디치 가문의 이야기를 꺼냈던 적이 있는데.

    그걸 기억하고 이 낡은 팔찌를 사왔다니.

    “당신 진짜.”

    유진희가 뭐라 말하려다가 싱글벙글 웃고 있는 배영준을 보았다.

    ‘그렇게 바빴으면서.’

    작게 한숨을 쉬고 끌어안아주었다.

    “우읍읍!”

    두 사람 사이에 낀 배도진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차에 오른 가족은 못다 한 이야기를 차근히 풀어냈다.

    “도빈이는?”

    “내일이 공연이잖아요. 연습하느라 바쁜 모양이에요.”

    “브라움 씨가 치질 수술을 받았다 며?”

    “네. 그래서 윤희가 대신하기로 했는데 여러 모로 어려운가 봐요. 도 진아, 초콜릿 그만 먹어. 당신은 올 때 괜찮았어요?”

    “밀릴 것 같아서 일찍 왔지. 우리 왕비님이랑 왕자님들도 보고 싶고.”

    “말은 잘해.”

    “하하하.”

    “아빠, 아빠. 집에 갈 때는 헬리콥터 타고 가면 안 돼?”

    “헬리콥터?”

    “올 때 보고서는 계속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도진아, 아빠는 헬리콥터 싫어해.”

    “왜요?”

    기계라면 사족을 못 쓰는 배도진은 헬리콥터를 싫어한다는 아빠를 이해 할 수 없었다.

    아들의 질문을 받은 배영준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정확히는 기관총이 달린 헬리콥터를 싫어하지……

    “기관총?”

    배도진은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는 배영준을 보다가 이내 관심을 끊고 초콜릿에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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