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281화
61. 이 시대의 거장들(2)
시끌벅적하던 분위기가 다소 가라 앉았다.
배도빈과 최지훈, 프란츠는 여전히 피아노를 주제로 열띤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고.
차채은, 배도진은 알베르트와 함께 진달래의 방으로 향했다.
소소와 나윤희, 료코는 각자의 방 에서 피곤한 몸을 달랬으며.
유진희와 이승희는 차를 마시며 그 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 도중 푸르트벵글러, 사카모토 료이치, 나카무라, 히무라는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
배도빈을 보고 있던 사카모토 료이치가 입을 뗐다.
“도빈 군이 또 멋진 친구를 사귄 모양이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히무라가 페터 형제를 데려오기까지의 이야기를 풀어내자 푸르트벵글러가 콧김을 뿜었다.
“욕심 많은 녀석이 착해서 문제지.”
“그 덕을 본 사람이 꽤 많죠. 마르코라든지 니나라든지.”
나카무라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샛별 엔터테인먼트의 음악가는 대부분 배도빈의 후원을 통해 성장했고 지금은 한 사람의 음악가로서 자 립했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자네는 이제 그만 쉬어야 하지 않나?”
“브랜드 한 잔에 취할 내가 아니지.”
푸르트벵글러의 허세에 사카모토가 껄껄 웃었다.
“클리블랜드를 상대로 여유부리는 사람은 자네뿐일 거야. 인터뷰를 보 니 프란츠 미스트도 칼을 간 듯하네 만.”
“그 친구의 실력은 잘 알고 있어.”
사카모토 료이치는 대수롭지 않게 술잔을 기울이는 푸르트벵글러를 보 며 작게 웃었다.
고집스럽고 거만하지만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한 그가 프란츠 미스트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실 력을 모를 리 없었다.
지금의 작은 여유도 그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베를린 필하모닉을 믿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이제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구만.”
“무엇을?”
“도빈 군에게 오케스트라 대전에서 우승하지 못하면 나가라고 하지 않았나.”
너무나 궁금했지만 차마 직접 물어 보지 못했던 이야기를 사카모토가 대신 해주자, 히무라와 나카무라가 관심을 보였다.
푸르트벵글러가 굳게 닫은 입을 내 밀고 턱을 당겼다.
“어쩌겠나. 녀석이 그러고 싶어 하 는데. 히무라, 자네는 알고 있겠지? 녀석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게••••••
“됐네. 때가 되면 직접 말할 테지. ……료이치, 나는 베를린 필하모닉 이 녀석의 걸림돌이 되는 걸 용납할 수 없어. 그뿐이야.”
“껄껄. 하지만 베를린 필하모닉이 부족해서 나가는 것도 아님을 증명하고 싶겠지. 안 그런가?”
“흥.”
사카모토 료이치의 말대로 푸르트벵글러로서는 배도빈도 베를린 필하모닉도 소중했다.
배도빈이 원하는 일이 있다면 무엇 이든 밀어주고 싶었고 동시에 팬과 배도빈을 위해서라도 베를린 필하모닉이 건재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나저나 자네와 도빈 군이 결승에서 만난다면 참으로 좋겠지만, 쉽 지 않을 것 같군. 발터 그 친구도 그렇고 마리 얀스를 상대해야 하는 도빈 군은 더더욱.”
“그 정도도 넘어서지 못하면 남아서 더 배워야지.”
“하핫. 도빈 군이 떠나는 건 역시 싫은가 보군?”
“자네는 말이 너무 많아.”
정곡을 찔린 푸르트벵글러가 심술 궂게 답했다.
“선생님은 도빈이가 암스테르담을 넘어서기 힘들다고 보시나요?”
나카무라가 사카모토에게 물었다.
“어려운 일이지.”
사카모토 료이치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선생님은 도빈이를 응원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히무라의 질문에 사카모토가 이야 기를 풀어냈다.
“물론이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 지. 하지만 마리 얀스가 수십 년간 빚어낸 암스테르담을 넘어서기에 베를린 필하모닉 B는 이른 감이 있네.”
“나와 녀석이 뽑은 단원들이다. 그 런 녀석에게 질 리가 없어.”
푸르트벵글러가 불쾌하다는 듯 사카모토의 말을 끊어냈다.
“빌헬름 자네와 베를린 A조차 몇 년간 고생했던 그들일세.”
“판세는 작년부터 바뀌었잖습니까?”
나카무라가 물었다.
그의 말대로 평단과 매출을 근거로 판단했을 때 2000년대는 암스테르 담과 베를린, 빈의 삼파전이었다.
그러나 2010년대에 이르러서는 런던과 암스테르담, 베를린의 순이었고 2021년까지만 해도 런던발 4대 오케스트라의 독주무대였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정상의 자리를 되찾은 건 고작해야 최근 1〜2년뿐 이었다.
“그렇지. 나도 베를린 필하모닉이 변화하면서 다시금 정상에 오른 걸 알고 있네. 모두 이 친구가 고집을 접고 변화를 택한 덕이고 또한.”
“도빈이 덕이지.”
푸르트벵글러가 사카모토의 말을 대신했다.
사카모토는 슬며시 미소 지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빈 군이 열쇠라는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네만 알다시피 오케스트라는 조화와 균형의 음악이라네. 홀 로 뛰어나서는 완전한 악단이 될 수 없지.”
푸르트벵글러가 빈 잔을 채웠다.
“그래서 아직은 힘들다고 생각하네. 마리 얀스와 암스테르담이 오랜 세월 연마한 성을 넘어서기 쉽지 않을 거라고.”
사카모토가 시선을 돌려 늦은 시간까지 열띤 토론을 하고 있는 배도빈 과 최지훈, 프란츠 페터를 보았다.
배도빈은 독보적이었다.
단 한시도 그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본인 또한 그러했기에 사카모토 료이치는 천재가 겪는 고독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걱정했거늘.
배도빈은 어느새 베를린 필하모닉 B라는 젊은 음악가들을 이끄는 훌 륭한 지휘자가 되어 있었고, 그 곁 에는 최지훈과 같은 재기발랄한 피아니스트를 비롯해 장래가 유망한 이들이 모여 있었다.
‘다행이야.’
사카모토가 다시금 고개를 돌려 히무라와 나카무라를 보았다.
“그래서 더 응원하게 되지 않나?”
“보고 있으면 응원하게 되죠.”
히무라는 진실로 사카모토 료이치의 말에 공감했다.
“듣자하니 게르트 카리우스란 사람이 도빈이를 두고 새로운 시대의 선 구자라 했다더군.”
“라이든샤프트라 하죠.”
나카무라가 독일의 문화평론가 게르트 카리우스가 명명한 새로운 세 대, 라이든샤프트 (Leidenschaft: 격 정, 격앙)를 언급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 마리 얀스를 넘어서는 격정의 세대. 무척 어려운 일이겠지만 어서 빨리 저 어 린 음악가들이 도빈 군과 함께 걷는 모습을 보고 싶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푸르트벵글러가 새로 채운 술을 쭉 들이켜곤 말했다.
“어쩌면 이미 함께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필하모닉의 4라운드 2차전이 다가 왔다.
지금까지 가장 많은 사람이 관람했던 어제, 4라운드 1차전의 기록이 무색해질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주목 하고 있었다.
프란츠 미스트가 이끄는 클리블랜 드 오케스트라도 기대 받았으나 폭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없었더라 면 이렇게까지 큰 관심을 받진 못했을 것이었다.
공연을 앞두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단원들을 둘러보았다.
의식처럼 해오던 말을 해주기 위함 이었다.
“실수는 용납할 수 없다. 완벽하지 못한 것은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
푸르트벵글러의 목소리가 단원들의 가슴을 굳게 붙들었다.
“우리가 최고다.”
악장 헨리 빈프스키를 비롯한 120 명의 단원이 그 말을 당연하게 받아 들였다.
흔들리지 않는 눈빛과 당당히 벌어진 가슴.
그 거만한 태도는 스스로를 향한 자부심과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 대한 무한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폭군 아래 세계 최고의 연주자들이 수십 년간 땀 흘려 이룩한 거대한 제국.
베를린 필하모닉의 기사들이 차례 로 무대에 올라섰다.
타악기 수석 에인 레비오사를 따라 타악기 주자들이 당당히 걸어 나왔고 그 위풍 넘치는 모습 뒤에는 세 계 최고의 첼리스트 이승희가 있었다.
검은 정장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그녀 뒤에 첼로 주자들이 함께했다.
유독 크게 들리는 구두 소리가 그 녀의 존재감을 더하는 듯했다.
관악부가 들어섰다.
이마와 그 아래 떨어지는 굵은 선 뒤에 피어오르는 카리스마.
바순 수석 마누엘 노이어와 튜바 수석 지오 마틴에게서는 스산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관객들은 단원들이 무대에 올랐을 뿐인데 압도되어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회는 항상 이러했다.
“정말 엄청난 카리스마네.”
“한 명, 한 명이 정상급 연주자들 이니까. 저런 이들이 한 악단에 머물러 있는 게 신기할 정도야.”
“모두 폭군 때문이겠지.”
비올라 수석 에리히 피크가 무대에 올라섰다.
그때까지 감탄하고 있던 관객들은 다시금 세계적 비올리스트 에리히 피크에 시선을 빼앗겼다.
마지막으로.
깊고 긴 눈을 가진 헨리 빈프스키 뒤로 한스 이안을 비롯한 제1바이올린 주자들이 함께했다.
마치 사자가 누워 있는 듯.
당장에라도 일어나 초원을 가로지를 듯한 분위기에 콘서트홀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잠시 뒤.
20세기와 21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지휘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기사들이 일어나 그들의 왕을 맞이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30대 때 이미 유력 세 오케스트라를 동시에 지휘했던 그는 세계 최고의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 권위자였다.
아홉 개의 교향곡과 다섯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성공시킨 천재적인 작곡가였으며, 열정적인 바이올리니 스트로 제자 니아 발그레이 이전에는 야샤 하이페츠와 비교되곤 했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직접 접했던 이도 그의 공연을 처음 경험하는 이들도 모두 마음속 깊이 경의를 표 했다.
지난 수십 년간 클래식 음악 팬들 의 가슴을 뒤흔들었던 폭군은 관객 들을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돌아서 단원들을 앞에 둔 그가 양 팔을 크게 벌렸다.
숨 쉬는 것조차 두려워지는 긴장감 이 콘서트홀을 가득 채웠고, 그것이 그가 폭군이라 불리는 이유였다.
푸르트벵글러가 천천히 지휘봉을 움직여 현악기를 이끌었다.
요하네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D 단조.
베토벤, 멘델스존과 함께 현재까지 가장 위대한 걸작으로 사랑받고 있는 곡이었다.
은은한 서주 뒤에 분위기를 확장시 키는 마누엘 노이어의 오보에.
창문을 활짝 열고 펼쳐진 찬란한 도시가 그려지는 듯했다.
이른 새벽 사람이 다니기 전의 거 리는 이슬이 내려 있고 견고한 성벽을 넘어서는 웅대한 산이 자리한다.
그곳으로 향하는 모험가.
악장 헨리 빈프스키의 독주 바이올린이 관객들을 이끌고 여정에 나섰다.
관객들은 비장한 선율과 함께 시작 된 긴 여정에 대한 설렘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