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274화
59. 베를린의 마왕(3)
“3라운드 마지막 무대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사회자 자르제가 공연이 끝났음에 도 가득 찬 객석을 둘러보곤 말을 이었다.
이와 같은 대회의 사회를 맡을 수 있어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오늘, 과감한 시도를 보여준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엘리 아후 인손 그리고 완성도 있는 연주를 들려준 베를린 필하모닉 B와 지 휘자 배도빈에게 협회를 대신해 감 사 인사를 드립니다.”
사회자 자르제가 카드를 열어 보고는 진행을 이어나갔다.
“많이 기다리시는 것 같네요.”
객석에서 작은 웃음이 나왔다.
당연한 말을 하느냐와 같은 뉘앙스였다.
“그럼 오래 기다리신 만큼 곧장 심 사 위원단과 팬들의 판정을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3라운드 4차전! 정말 많은 분께서 함께해 주셨는데요. 총 3,011,574표가 집계되었습니다. 두 악단의 명성에 걸맞게 3라운 드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네요.”
곧장 발표한다는 말이 무색해질 정 도로 사회자 자르제의 말이 길어졌다.
안달 나게 하는 진행에 콘서트홀에 남아 있는 이들과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지켜보고 있던 이들은 조금씩 답답함을 느꼈다.
그것을 즐기는 듯 자르제가 한 박 자 쉬더니 크게 외쳤다.
“결과! 공개하겠습니다!”
그의 말과 동시에 콘서트홀 가운데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필하모닉의 로고가 차례로 비쳤다.
두 악단 모두 그 역사로도, 명성으로도 우열을 가리기 힘든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그러한 세간의 기대를 넘어선, 훌 륭한 연주를 들려준 두 악단에게 팬들은 다시 한번 큰 박수를 보냈다.
승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순례자 엘리아후 인손과 마왕 배도빈 모두 지금까지 그들이 들려주었던 스타일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를 완벽하게 수행했고 그랬던 만큼 관 객의 호응도 엇비슷했다.
클래식 음악 팬들은 가슴을 졸였다.
각 악단의 직접적인 팬들은 가슴이 쿵쿵대어 어쩔 줄을 몰랐다.
팽팽한 긴장감이 콘서트홀을 넘어서 세계 각지에 퍼졌고 그것은 공연을 치른 두 악단도 마찬가지였다.
‘제발. 제발.’
나윤희는 차마 스크린은 보지 못하고 두 손을 모아 간절히 바랐다.
‘다들 열심히 했는데 잘 나왔으면 좋겠다.’
나카무라 료코는 결과가 만족스럽 지 못하면 스크린을 찢어버릴 듯이 노려보았다.
‘ 배고프다.’
오늘 하루 졸린 몸을 이끌고 악장 역할을 훌륭히 소화한 소소는 저녁 식사 메뉴를 무엇으로 할지 고민했고.
진 마르코, 시엔 얀, 오오타 타카 히코 등의 다른 단원들은 주먹을 꼭 쥐고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스크 린에 집중했다.
‘4라운드. 4라운드에는 반드시 올라야 해.’
병실에서 중계를 지켜보고 있던 찰스 브라움은 그의 엉덩이만큼이나 불타오르긴 마찬가지였다.
‘괜찮았는데.’
또한 지휘자 배도빈은 차분히 결과를 기다리며 체코 필하모닉과 엘리 아후 인손이 들려준 말러 교향곡을 떠올리며 음미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스크린에 두 악단의 점수가 공개되었다.
"우오오!”
“이야!”
피셔 디스카우와 진 마르코가 가장 먼저 소리 질렀다.
베를린 필하모닉 B
심사 위원단: 30(300점) 팬 투표: 39.2(1,686,481표) 합계: 69.2(4라운드 진출)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심사 위원단: 29.7(297점) 팬 투표: 30.8(1,325,093표) 합계: 60.5
전체 3,011,574표 중 56퍼센트에 해당하는 1,686,481표를 획득한 베를린 필하모닉 B가 다음 라운드 진 출을 확정 짓는 순간이었다.
“꺄아아!”
“미쳤어! 미쳤다고!”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이 두 팔을 번쩍 들어 환호했다.
아직 젊다는 표현보다는 어리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베를린 필하모닉 B 단원들은 주변의 시선은 신경 쓰 지 않은 채 승리를 만끽했다.
“들어! 들어!”
“하는 거야? 하는 거지?”
“하자! 하자!”
“으핳핳하하!”
몇몇 남자 단원들이 배도빈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배도빈 이 그들을 잔뜩 경계하며 눈매를 좁 혔다.
그러나 무거운 악기를 들고 다니면 서 단련된 단원들의 물리력에 저항 하기엔 그의 몸은 너무도 작고 무력 했다.
“하지 마요. 하지 마. 놔!”
“좋으면서 왜 그래. 우리 악장 비 행기 좀 태워주려는 거지!”
“비행기 싫다고!”
“자, 자! 다들 준비!”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은 크게 기 뻤다.
그 감정은 지난 며칠간 완성도 높은 연주를 위해 쥐어뜯은 머리카락과 비례했다.
“왜 이렇게 가벼워? 한 번 더!”
“놓으라니까!”
기자들은 이때를 놓칠세라 급히 셔터를 눌러댔다.
배도빈과 단원들의 친근한 모습은 일반적인 지휘자와 단원 관계로 보 이지는 않았다.
마치 친구처럼 어울리는 그 특별한 모습은 분명 베를린 필하모닉의 팬 들에게 어필될 듯했다.
한편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입을 앙 다물었다.
‘나 때문이야.’
그토록 멋진 연주를 했음에도 4라운드 진출에 실패했던 것이 마치 자신의 잘못처럼 느껴졌다.
노련한 기술로 넘겼으나 플루트가 하나 빠진 자리를 상쇄하기 위해 음량을 조절한 것도 사실이었고 그러 다 보니 자연스레 박력이 덜할 수밖 에 없었다.
경연 당일 악단의 분위기를 해친 것도 영향이 없을 리 없었다.
밀로스 발렌슈타인의 눈에 다시 한 번 눈물이 고였다.
“하하하하! 이거 떨어졌구만!”
“그러게. 별수 없지.”
“베를린 필하모닉이 잘하긴 해. 벨 리텔, 4라운드까지만 듣고 복귀하면 안 되나요?”
“껄껄. 그거 좋은 생각이네. 사무국에는 잘 말해보겠네.”
“방금 벨리텔 말씀 들었냐?”
“우! 우! 우! 우!”
“크학학하! 이거 완전 대박이잖아? 얼마만의 휴가냐?”
“내가 좋은 펍을 알아!”
“가자! 가자!”
반면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분위기는 유쾌했다.
호탕하게 웃으며 이제 마음 놓고 오케스트라 대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며 벌써부터 잘츠부르크에서 무 엇을 구경하러 다닐지 이야기했다.
“이봐, 밀로스. 왜 그렇게 있어? 휴가라고. 휴가!”
“죄송해요. 저 때문에……
그러나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웃을 수 없었다. 자신을 챙겨주는 것조차 미안해졌다.
“밀로스.”
그때 엘리아후 인손이 어린 플루티스트를 불렀다.
그는 눈물을 훔치고 조심스레 수석 지휘자에게 향했다.
위대한 지휘자는 밀로스 발렌슈타 인을 안아주고 등을 쓸어내렸다.
“다음엔 더 멋진 연주를 하자꾸나.”
“끄흐으읍. 네.”
그 상냥한 목소리에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마음을 더욱 굳세게 잡을 수 있었다.
잘못을 용서받아 안도하지 않고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졌음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가슴 깊이 새겨 넣었다.
“하하하하! 자자! 다들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고! 오늘은 내가 쏜다! 어디에 있는 펍이라고?”
“우오오! 역시 악장!”
“자, 빨리빨리 짐 챙겨 나오라고! 밀로스! 너도!”
소매로 눈물을 훔친 밀로스가 힘차 게 대답했다.
“네!”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시끌 벅적하게 퇴장했다.
배도빈은 그 모습을 쭉 지켜보고 있었다.
‘떨어지고도 저렇게 기뻐할 수 있는 건 분명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겠지.’
굳이 다른 걸 생각지 않더라도 그들의 연주만 해도 세계 정상을 논하 기에 충분했었다.
실제로 팬 투표 결과는 56 대 44 로 지금까지 압도적인 점수 차를 보였던 베를린 필하모닉 B의 점수 중 가장 낮은 득표율에 속했다.
배도빈은 엘리아후 인손과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라는 또 다른 거 장을 알게 되었음에 기뻤다.
또한.
‘루트비히 오케스트라도 저렇게 유 대감을 가질 수 있을까.’
저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체코 필하모닉의 모습은 무척 따뜻해 보였다.
서로를 위하는 것이 진심으로 느껴 져 앞으로 자신만의 악단을 만들고자 하는 그는 분명 부러워하고 있었다.
“도빈, 나 배고파.”
“에잇! 기분이다! 오늘 먹고 뻗을 사람 붙어라!”
“과, 과음은 좋지 않아요.”
“디스카우가 사는 거예요?”
“그럼! 말을 꺼냈으니 오늘 술은 내가 책임진다! 이야! 나카무라, 좋은 기세잖아? 잔뜩 마실 거지?”
“난……
단원들의 대화에 배도빈은 싱긋 웃었다.
여전히 시끄러웠다.
취향이나 성격이 맞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러면서도 잘 어울리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뭘 걱정하는 거야.’
배도빈은 이들과 함께라면 분명 멋 진 오케스트라를 운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미소를 띤 채 말했다.
“1시간 뒤에 반성회 할 테니 연습실로 모이세요.”
“뭐!”
60명의 단원들이 동시에 한 목소리로 놀랐다.
한편 공연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 에 따로 챙길 짐이 없었던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단원들이 나오기를 기 다리고 있었다.
바람을 쐬니 마음도 추슬러졌고 자연스레 그간 한심하게 보았던 선배 단원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컸어.’
전에는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던 악단 분위기가 무척 마음에 안 들었었다.
비록 경합에서는 패배했으나 밀로 스 발렌슈타인은 체코 필하모닉이 얼마나 대단한 연주를 들려주었는지 알았기에, 겸허히 결과를 받아들이는 선배들의 자세를 존경하게 되었다.
넓고 큰마음.
어른이란 느낌이었다.
‘조금 늦네.’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대기실로 향했다.
지금까지의 태도를 분명 고치고 선배들을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며 지내겠다고 마음먹으며 문을 살짝 열었을 때.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입을 열 수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호쾌하게 웃어댔던 그들이 대기실에서 소리 죽여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차마 악기를 정리하는 손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분하지 않을 리 없었다.
저들은 밀로스 발렌슈타인이 오랜 시간 준비했던 것 이상으로 체코 필하모닉을 위해 힘써왔다.
오늘의 그 더 없이 멋진 연주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리 없었다.
평소 웃음이 분위기가 밝다 해서 그 과정이 힘들지 않을 리 없었다.
아무리 음악이 좋다고 해도 같은 행위를 수백, 수천 번 반복하는 일 이 쉬울 리 없었다.
저들도 사람이니까.
타인을 인식하기 시작한 밀로스 발 렌슈타인은 그제야 선배 단원들이 그만큼 또는 그 이상 노력했음을 인지 했고.
그렇기에 탈락이 아무렇지 않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아직도 멀었어.’
그렇게 생각하는 그의 어깨에 엘리 아후 인손이 손을 얹었다.
밀로스가 고개를 돌리자 엘리아후 인손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조용 히 대기실 문을 닫고는 뒷문으로 향했다.
잠시 뒤, 평소와 같이 웃으며 나온 선배들은 갑작스레 허리를 숙여 인 사한 후배를 보고 잠시 놀랐다.
그러고는 다시 웃으며 어깨동무를 한 채 잘츠부르크의 거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