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73화 (273/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273화

59. 베를린의 마왕⑵

단원들이 연습했던 대로 잘 따라와 주었다.

드보르자크의 9번 교향곡은 언제 들어도 가슴 설레게 하였는데 준비 기간이 짧았던 만큼 새로운 시도보 다는 곡 자체의 맛을 살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템포를 조절하였는데 각 악기가 번갈아 나오는 부분이라든가 대규모 클라이맥스를 치는 부분 등은 손볼 구석이 있었다.

템포를 조절할 때 항상 주의하는 일이 있는데, 균형을 위해 감정을 배제하면 자칫 기계적이고 작위적으로 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후대, 아니,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평론가들이 내 곡을 부분들이 하 나의 점으로 모여들어 전체를 향해 편성되어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러한 평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걸 의도했다고는 생각지 않다.

그것은 그들의 인식이니까.

음악은 인식이다.

작곡가나 연주자 그리고 듣는 사람 에 따라 같은 연주라도 여러 느낌으로 달라질 수 있고 그중에서도 곡의 느낌을 결정하는 몇 가지 중요한 요 소를 꼽을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템포다.

나는 메트로놈을 무척이나 좋아하 나 그 수치를 맹신하지는 않는다.

이번 연주를 준비할 때 악보에 메 트로놈을 기입하지 않고 철저하게 연습을 통해 의도를 전달했던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살짝 추가한 3화음과 감7화음을 이루는 음표들이 가지는 박자를 박자 그대로가 아니라 선율적 착상을 통해 이해하길 바랐다.

다행히 단원들은 잦은 박자 변화를 잘 소화해냈다.

특히나 변화가 가장 심했던 제2바이올린 섹션은 나윤희가 수석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최근 조금 피곤해 보이는데 오늘의 연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마 나 모르는 곳에서 평소와 같이 노력했을 것이다.

또한 모든 단원이 마찬가지겠지.

가끔 엄살을 부리기는 해도 막상 무대 위에 서면 제 역할을 해내는 베를린 필하모닉 B.

이들과 함께한 지도 벌써 2년 가까이 되었다.

의심 많은 나라도 신뢰가 생길 수 밖에.

앞으로는 좀 더 이끌어도 되겠다 싶어 지휘하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연주를 마치자 단원들의 표정도 후련해 보였다.

쏟아지는 환호와 함께 그들의 미소를 보며 뒤 돌자 몇몇 열렬한 팬들 이 모자를 던지기도 손을 흔들어 보 이기도 했다.

이 고양된 기분.

무대가 아니고서는 절대 느낄 수 없다.

체코 필하모닉과 베를린 필하모닉 의 공연이 마무리되었다.

“으아아아.”

프란츠 페터는 놀라 기절할 지경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B의 연주를 직접 듣는 일은 처음이었기에 그 감 동이 더했다.

‘이게 배도빈 님의 공연이야.’

“알! 들었어? 이게 배도빈 님의 음악이야!”

프란츠 페터가 기쁨을 나누고자 옆 자리에 앉은 동생 알베르트를 불렀다.

그러나 알베르트 페터는 입술을 안으로 물고는 눈만 깜빡이며 프란츠 페터를 볼 뿐이었다.

“이제 말해도 돼!”

“파하!”

뽕 소리를 내며 입을 연 알베르트 페터가 재잘대기 시작했다.

“막막 춤추고 싶었어! 여기가 막 엄청 빨리 뛰어!”

“그치! 엄청 좋았지?”

“응!”

음악을 배움이 짧았던 탓에 곡의 줄기만을 알았던 프란츠 페터에게 있어 배도빈의 지휘는 미지의 영역 이었다.

아름다운 멜로디만을 생각했던 프 란츠 페터는 단순히 템포를 조절하

는 것만으로도 곡의 분위이가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음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또 듣고 싶어!”

“나도!”

그래서 동생과 함께 오두방정을 떨 며 신을 내기 바빴다.

한편 다른 관객들도 페터 형제와 마찬가지였다.

팬 투표가 진행되는 동안에 오늘의 공연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그중 과거 유명 음악가였던 이들의 모임에서 진지한 대화가 오갔다.

“이야, 배도빈이 대단한지는 알았지만 이렇게 노련할 줄은 몰랐는 데.”

“그러니까 말이야. 브루노 발터나 마리 얀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같은 느낌이었어.”

“템포 조절이 기가 막혔지. 완벽하 게 가지고 노는 게 진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마술을 보는 듯했지.”

“으음.”

“자네는 어땠나? 왜 말이 없어.”

“뭐랄까. 조금 당황스러워서.”

“뭐가?”

“자네들은 놀랍지도 않은가? 배도빈을 상징하는 단어는 지금까지 과감함, 격렬함, 폭력, 혁신이었는데 이제 보니 난 그가 인간처럼 느껴지 지 않네.”

“음?”

“자네들도 말하지 않았나. 마술사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지휘처럼 들릴 정도였다고. 자네는 토스카니니 가 배도빈과 같은 지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어……

“못 하지. 토스카니니의 위대함은 그와 함께했던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아네. 그러나 토스카니니는 배도빈 처럼 폭력처럼 느껴질 음악은 할 수 없어. 그러나 배도빈은 토스카니니 처럼 지휘할 수 있지. 이게 무슨 뜻 인지 진정 모르겠나?”

“자네 말을 들으니 알 것 같네.”

“그래. 젊은 친구들이 그를 마왕이 라 부른다고 하던데 나는 정말 그가 그렇게 느껴질 정도야. 변화무쌍하 여 이토록 빠져들게 하는데 이 어찌 악마의 속삭임이 아닌가.”

“크학하하! 이 친구, 오버하는 건 여전하구만! 좋다면 좋다고 하면 되 지 길게도 말하네!”

“하하하하! 좋은 연주를 들으니 오랜만에 신나서 이야기 좀 늘어놓았네.”

“껄껄. 하지만 나도 자네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네. 이렇게 멋들어진 드보르자크라니. 배도빈보다 그를 잘 이해하는 사람도 없을 것 같으이.”

체코의 말이었다.

그 대화를 들은 밀로스 발렌슈타인 은 그간 자신이 했던 생각과 말이 떠올랐다.

부끄러워 당장에라도 어딘가 숨고 싶었다.

동양인이라고 무시했던 이가 그 누 구보다도 드보르자크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과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 로 저 아득한 곳에 있는 음악가.

그러나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단지 자신보다 뛰어난 이를 무시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

배도빈은 절정의 환희에 도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관객들이 그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폭 넓게 심상을 이끌어 나갔다.

그 증거로 그의 지휘는 각 악기가 모두 살아 있어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그것이 거대한 무엇인가가 되어 정점을 향해 나아감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새로운 심상으로 도약하는 수천 개 의 음표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요소는 단 하나도 없었다.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엘리아후 인 손의 조언을 떠올렸다.

앞만 보고 달려서는 보지 못하는 것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말을 배도빈의 연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번을 곱씹어도 좋았다.

‘……벨리텔은 이걸 말해주고 싶었던 거야.’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해서는 안 될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을 절절히 느꼈다.

‘하나라도 필요하지 않은 건 없어. 그런 걸 인정하지 못하면 난 평생이 걸려도 배도빈과 같은 음악을 하지 못할 거야. 그런데, 그런데……

후회되었지만.

이미 돌이킬 방법은 없었다.

꿈에 그리던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제명되었고 이제 다시는 그와 같은 음악은 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저 멀리, 높은 곳에 위치한 음악가 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그마저도 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느끼는 수치심보다도 큰 자기혐오를 평생 짊어질 것 같았다.

밀로스 발렌슈타인이 고개를 들자 베를린 필하모닉 B가 무대 앞 첫 번째 좌석부터 자리를 채워나갔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겠지.’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자신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는 배도빈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 여겼다.

그러자 없던 용기가 생겼다.

도망치고 싶은 수치심을 이겨내야만 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걸어 내려가 무대 위를 보고 있는, 배도빈 앞에 섰다.

배도빈은 인상을 쓰며 밀로스 발렌 슈타인을 살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기분 나쁘겠지. 당연한 일이야.’

밀로스 발렌슈타인이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마음을 다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자질구레한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뭐야, 이거.”

배도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진심을 다해 자신의 어 리고 못난 행동을 빌었다.

“비켜. 안 보이잖아.”

“누구?”

“몰라요.”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깊이 반성 하는 그 모습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어? 체코 필하모닉 플루티스트 아니야?”

“마르코가 아는 사람이에요?”

“아니. 기사로만. 밀로스 발렌슈타인이라고 했던가……. 근데 왜 이러는 거야?”

“이겨서 미안하다는 뜻인가?”

피셔 디스카우의 말에 배도빈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다.

처음 보는 인간이 갑자기 다가와 무대를 가리는 것도 불쾌한데 다짜 고짜 고개를 숙이는데 뭐라 말해도 대꾸조차 없으니 심기가 불편했다.

설마하니 피셔 디스카우의 말처럼 행동했겠냐만은 그리 기분 좋은 일 은 아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연습실 앞에 있던 녀석이구만.”

때마침 피셔 디스카우가 손뼉을 쳤다. 기억이 없던 배도빈은 그런 일 도 있었나, 싶다가 그때의 일을 겨 우 떠올렸다.

연습 도중 화장실이 급해 휴식 시간을 주고 나왔더니 문 앞을 가로막 고 있던 녀석이었다.

“밀로스 발렌슈타인.”

배도빈이 밀로스 발렌슈타인을 불렀다.

이름을 불리자 밀로스가 그제야 고 개를 들었다.

배도빈은 손을 휘휘 저었다.

“돌아봐. ……턴. 턴.”

영어를 알아들은 밀로스 발렌슈타 인은 왜 돌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시키는 대로 뒤돌았다.

그렇게라도 해서 배도빈의 마음이 풀린다면 이상하긴 해도 어려운 일 도 아니었다.

그때 배도빈이 밀로스 발렌슈타인 의 엉덩이를 발로 밀었다.

“엇. 엇.”

당황한 베를린 필하모닉 B의 단원 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의 지 휘자를 보았다.

그러나 배도빈이 그러한 시선을 신 경 쓸 리가 없었다.

“네 자리로 돌아가. 한 번만 더 내 앞을 가로막으면 혼내줄 거다.”

밀로스 발렌슈타인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영어로 말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턴(turn) 이상의 영어를 이해 할 순 없었다.

그저 이유도 알 수 없이 밀려나가 객석 가운데로 향했다.

그리고 겨우 자세를 잡은 뒤 고개를 드니 엘리아후 인손이 그를 보고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렇게 다시 보고 싶었거늘.

가장 존경하는 지휘자를 막상 눈앞 에 다시 보니 스스로가 부끄러워 차 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 계단을 올랐다.

엘리아후 인손이 입을 열었다.

“어딜 가느냐.”

잘못 들은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혹시나 갈대라도 잡는 심정으로 고개를 돌린 밀로스 발렌슈타인을.

체코 필하모닉의 모든 단원이 따듯 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배도빈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본 엘 리아후 인손은 비록 잘못을 저질렀으나 수천 명이 보는 자리에서 용기를 내 사죄한 밀로스 발렌슈타인이 너무도 기특했다.

더는 모질어질 수 없었다.

“어서 앉지 않고.”

그 따뜻한 말에 밀로스 발렌슈타인의 목이 잠겼다.

“하, 하지만.”

“어허.”

“전 이제 체코 필하모닉이……

“뭐 해! 벨리텔 마음 바꾸시기 전에 빨리 앉지 않고!”

“그래! 빨리빨리!”

체코 필하모닉 단원들은 밀로스 발렌슈타인의 손을 끌어다 어디 가지 못하도록 그들 사이에 껴 넣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이 없으면서도 그는 백발이 성성한 엘리아후 인손의 뒷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잠시 뒤 사회자가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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