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272화
59. 베를린의 마왕(1)
‘ 아아.’
관객들은 이제 엘리아후 인손과 체 코 필하모닉의 연주에 넋을 놓고 말았다.
말러의 5번 교향곡은 기존에 많은 이들에 의해 찬양과 비판을 받아왔다.
그중에서도 특히 4악장이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Morte A Vene zia, 1971)〉에서 사용되며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아다지에토(Adagietto: 천천히, 매 우 느리게)의 4악장은 103마디로 짧게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연주 시 간은 약 11〜12분에 달했다.
415마디로 구성되어 있는 1악장의 연주 시간이 약 14〜15분 정도라는 것을 4악장이 얼마나 느린지 알 수 있었다.
빠른 템포의 5악장 론도 피날레에 앞서 등장하는 만큼 그 템포 차이는 드라마틱했다.
더욱이 말러는 4악장 마지막 부분 에 아타카(attacca)를 기입하여 쉬지 않고 곧장 5악장에 돌입하라 지시했고 관객들은 이를 더욱 극적으로 받 아들일 수 있었다.
따라서 5번 교향곡의 4악장은 독 립적이라기보다는 앞뒤 악장 사이에 서 두 곳을 연결해 주는 부분이라는 데에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엘리아후 인손은 이를 과감 히 끊어냈다.
또한 4악장의 아다지에토라는 빠르 기 지시말도 모데라토 수준으로 이끌어 말러의 5번 교향곡을 훨씬 압 축되어 연주하였다.
그러면서도 체코 필하모닉은 충분 한 음량과 빼어난 음색을 자랑하는 하모니를 이루어 4악장이 가지고 있는 서정성을 충분히 전달해 주었다.
당연히, 5악장 론도 피날레는 더욱 빨라졌다.
잔잔한 물결이 이는 듯 평화로운 전개가 엘리아후 인손에 의해서는 파도가 치고 그 위로 철새가 바람과 함께 날아다니는 느낌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단순히 악장의 전체 빠르기를 변경했을 뿐만 아니라 전 영역에서 템포를 조절해가며 리듬감을 극대화하였다.
엘리아후 인손과 같은 노련한 지휘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이 체코 필하모닉이 자랑하는 템포의 미학.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엘리아후 인손의 체코 음악이었다.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주먹을 꽉 쥐었다.
평소에는 배 나온 동네아저씨일 뿐이었던 선배 단원들이 지금은 그 어 떤 오케스트라보다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동경했던 모습 그대로.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이 감동적인 연주에 다시 한번 체코 필하모닉에 매료되었고.
동시에 이제는 함께할 수 없다는 것에 더욱 더없이 깊게 좌절하였다.
한편.
‘이건 좀……
이필호 기자가 턱을 쓸었다.
엘리아후 인손과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뛰어난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과감한 시도를 해올 줄은 몰랐다.
예상 밖의 일이었고 더욱이 너무나 멋들어진 표현이었기에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쉽지 않겠는데.’
그만큼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배도빈은 지금 누가 뭐라 해도 대 한민국의 자랑이었다.
팬 투표의 영향도 있지만 대한민국 은 실시간으로 응원하기 위해 밤을 꼬박 새우는 사람으로 넘쳐났다.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 해도 팬들은 피곤조차 잊은 채 배도빈에 열광했다.
어려웠던 환경을 이겨내고 스스로 의 힘으로 성장해 세계 정상의 자리 에 우뚝 선 천재.
같은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 며 지친 삶 속에서 다시 한번 발을 옮길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다.
이필호 기자도 그러했기에 엘리아 후 인손과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선전은 다소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브라보!”
마침내 체코 필하모닉의 연주가 끝 났고 관객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신선하고 또한 완성도 높은 말러를
들려준 거장 엘리아후 인손에게 성 의를 다해 감사를 표했다.
현장 반응은 3라운드 그 어떤 연주보다도 뜨거웠다.
‘잘한다.’
차채은도 그 속에서 멋진 연주를 들려준 체코 필하모닉에 경의를 표했다.
오케스트라 대전을 통해 오케스트라에 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었던 차채은은 엘리아후 인손이 얼마나 대담하고 노련한 인물인지 느낄 수 있었다.
‘3라운드 준비 시간도 짧았는데.’
곡 전체의 템포를 완벽하게 조율 해, 재탄생시킨 엘리아후 인손.
그러한 일을 짧은 시간 내에 능숙 하게 소화한 체코 필하모닉의 저력 도 대단하긴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명문은 명문이네. 그쵸, 대 리님?”
한이슬 평론가가 입을 열었다.
“응. 한 사람 빠져서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그런 티가 전혀 안 났어. 아마 다른 악기가 조금씩 음량을 맞췄겠지.”
“어머. 그 정도까지 들려요? 우리 대리님 편집장 말고 평론해야겠네.”
“하하. 뭘 또 그렇게까지 띄워주고 그래. 정 기자는 어땠어?”
“불쾌하네요.”
“어? 어떤 부분이?”
“몰라요.”
잔뜩 화가 난 정세윤 기자의 태도 에 이필호 편집장은 다소 당황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차채은 은 이필호를 한심하게 여겼다.
관중석을 통해 기자로서의 그를 존 경했지만 한 달 가까이 함께해 본 결과 13세 이용가의 러브 코미디물 주인공처럼 눈치가 없었다.
‘정 기자님 불쌍해.’
그러나 그렇다고 나서서 해결할 문 제도 아니라 차채은은 체코 필하모닉으로 인해 달아오른 기분을 달래 며 다음 순서를 기다렸다.
‘드보르자크 9번이었지.’
신세계로부터는 배도빈의 주 레퍼 토리였던 만큼 큰 걱정은 없었다.
그러나 앞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말러 교향곡이 나왔기에 해왔던 대로라면 상대적으로 차이가 생길 듯했다.
그것이 이필호와 다른 여러 사람이 걱정하는 바였지만.
‘또 어떤 연주를 들려줄까?’
차채은은 배도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다정하 면서도 음악에 관한 일만큼은 지독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어떠한 환경이나 조건도 음악보다 앞에 두지 않았다.
차채은은 그런 배도빈이 또 어떤 음악을 들려줄지 궁금했다.
매 연주회마다 그러했다.
‘오늘부터 결승까지는 다 인용해야 해.’
막 초안을 완성한 배도빈과 베토벤을 대조한 기사에 탄력이 붙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30분이 흐르고.
사회자의 소개 뒤에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OOTY 오케스트라 대전에 워낙 대단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했기에 초기만 해도 베를린 필하모닉 B는 다소 가벼운 느낌이었다.
배도빈이라는 압도적인 천재에 의 해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로 인정 받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인상이었다.
주로 20대의 젊고 어린 음악가로 구성된 베를린 필하모닉 B 에서는 형제인 베를린 필하모닉 A가 내뿜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나 암스테르담 로열 콘세르트헤바우가 보이는 고결 함, 런던 심포니가 보이는 절제미와 같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배도빈이라는 불세출의 천재에 맞춰져 있었다.
지금도 그리 다르지는 않지만 어린 평론가 차채은의 눈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인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세계적인 얼후 연주자 소소는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트라베이스,
클래식 기타에 이르기까지 현악기를 폭넓고 깊게 다루는, 베를린 필하모닉 B의 에이스 중의 에이스였다.
찰스 브라움과 소소만이 배도빈이 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단원이었다.
그러나 차채은이 현재 가장 주목하 고 있는 사람은 그 반대편에 앉아 있는 인물이었다.
‘윤희 언니 오늘도 예쁘다.’
나윤희.
네이즈 소속으로 데뷔하여 한국 무 대는 단 한 번도 밟아보지 못했으며 북유럽에서 싼 공연에 이용당해 이름은 쌓지 못했지만.
배도빈은 항상 나윤희의 바이올린을 칭찬했다.
처음에는 차채은도 그녀를 이상하 게 보았다.
공연 전에 긴장해서 구토를 한다거 나 말을 심하게 더듬는다거나 하는 일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윤희의 연주를 들을 때마 다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의 바이올린은 놀랍도록 오케스트라에 어울리면서도 자신의 색을 잃지 않았다.
차채은은 수많은 오케스트라를 접 하면서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남과 어울리면서도 줏대를 잃지 않는 연주자.
그것이야말로 오케스트라에 진정 필요한 인재가 아닐까 생각했다.
‘때려눕혀!’
배도빈과 나윤희.
두 사람의 격렬한 팬인 차채은은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지배한 콘서트홀 분위기를 바꿔주길 바랐다.
차채은의 응원이 전해졌을까.
배도빈이 무대 위에 올랐다.
작은 몸집이 무대에만 서면 무척이나 크게 느껴졌다. 평소 짜증 섞인 눈빛은 깊은 심연과 같아졌다.
무대에 오른 순간부터 배도빈은 다른 것은 일절 보지 않았다.
오직 단원과 함께 더욱 아름다운 연주를 하기 위해 마음가짐부터 전 투적으로 바뀌었다.
고도로 집중한 그의 표정은 차갑고 생기가 없어 보일 정도였다.
“오오.”
“역시 존재감이 다르네.”
장내 분위기가 달라졌다.
아직 체코 필하모닉이 남긴 여운에 휩싸여 있던 관객들은 이제 베를린 의 마왕이 어떤 연주를 들려줄지만을 생각했다.
‘또 어떻게 편곡했을까?’
‘아 진짜 기대된다.’
관객들은 언제나 파격적인 편곡을 들려주었던 배도빈이 이번에는 어떤 충격을 전해줄지 기대했다.
앞서 엘리아후 인손의 대담한 편곡을 들었던 터라 더욱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설렘이 잦아들어 관객의 가 슴속에서만 자리할 때.
배도빈이 지휘봉을 들고 두 팔을 양 옆으로 뻗었다.
잠시간의 정적.
배도빈이 두 팔을 모아 들어 올리 며 드보르자크의 9번 교향곡, 신세계로부터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잔잔하게 깔리는 현악기.
이어 나오는 호른.
플루트와 바순, 오보에가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주다 이내 분위기를 잔잔하게 이끌었다.
그때였다.
배도빈이 양팔을 넓게 벌려 끌어안았다. 베이스가 묵중하게 깔리며 팀파니가 힘을 더해 긴장감을 조성했다.
관악기가 위험을 알리는 듯하다.
템포가 짧아지더니 다시금 현악기 의 저음부가 분위기를 깔고 관악기 가 달래자 다시금 돌출.
장대한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완벽해.’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지만 사카모토 료이치는 배도빈의 지휘를 완벽 하다고 느꼈다.
인상적인 도입부를 이토록 능숙하 고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악단은 몇 없었다.
그러나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다.
일반적인 연주와 다르지 않다는 점.
처음부터 특징을 잡아낼 수 있었던 배도빈의 평소 스타일과는 달리 마 치 재단한 듯이 악보에 충실한 연주였다.
‘무슨 생각일까.’
사카모토 료이치는 얼굴 가득 미소를 보이며 소리에 집중했다.
그러나 색다른 연주를 기대했던 관 객들은 다소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어?’
‘좋긴 한데, 오늘은 무슨 일이지.’
‘준비할 시간이 없었나?’
‘기간이 짧아 준비하기 어려웠겠지. 그래도 작년 겨울에 했던 편곡을 그 대로 들려줘도 좋았을 텐데.’
충분히 좋은 연주였지만 그들이 기 대했던 연주는 아니었다.
지금까지 많이 들어왔던 신세계로 부터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1악장의 중 반부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
‘왜 이렇게 듣기 편하지?’
‘뭐가 다른 거야?’
전문 지식이 없는 팬들은 조금씩 벅차오르는 가슴이 무엇 때문에 그러한지 혼란스러워졌다.
분명 특별할 것 없는 연주였는데 묘하게 보다 듣기 편했고 조금씩 고조되었다.
‘녀석.’
푸르트벵글러가 씩 하고 웃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사카모토 료이치와 마리 얀스 등 여러 지휘자가 배도빈의 의도를 알아챘다.
‘재밌는 시도를 했구나.’
사카모토 료이치가 천천히 박자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러 거장과 함께 베를린 필하모닉 B의 의도를 눈치챈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드보르자크의 열렬 한 팬이자 누구보다도 많이 들었던 밀로스 발렌슈타인이었다.
‘.달라.’
처음에는 그도 몰랐다.
완벽하게 조율된 연주를 듣고는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 B도 제법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곡을 들으면 들을수록 자꾸 만 꿈틀대는 가슴을 속일 수는 없었다.
‘템포 조절이야.’
극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드보르자크의 9번 교향 곡은 여러 악기가 주고받는 형식으로 이어나간다.
절정으로 치달아 장대해지기도 하 지만 한 악기와 또 다른 악기, 섹션 과 섹션끼리의 대화가 즐거운 곡이었다.
배도빈은 그러한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각 악기의 템포를 미세하게 조율했다.
그 과정은 베를린 필하모닉 B의 단원들에게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시간 이었다.
‘별다를 거 없죠?’라는 배도빈의 말과는 달리 그 미세한 템포를 조절하 기 위해, 귀신같이 지적해대는 지휘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인간 메트로 놈이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빈틈없이, 멜로디에 따라 때로는 적절한 틈이 추가된 신세계로 부터는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었지만 더욱 긴밀하게 작용해 관객들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 과정에서 소외되는 악기는 단 하나도 없었다.
유기적으로 얽힌 완벽한 생물체.
배도빈에 의해 신세계로부터는 생명을 부여받은 듯 콘서트홀 안을 휘 저었다.
‘이게…… 베를린 필하모닉.’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거대하고 힘찬 생명을 느끼며 의자에 등을 파묻었다.
이러한 연주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각 연주자의 기량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오케스트라 전체를 통제하고 완벽한 길로 인도해야 할 지휘자의 능력이 가장 우선시되었다.
그 어떤 지휘자가 이런 연주를 해낼 수 있을까.
‘이것이…… 배도빈.’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압도되어.
그가 생전 듣지 못했던 드보르자크를 받아들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