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69화 (269/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69화

    58. 드보르자크(8)

    OOTY 오케스트라 3라운드는 큰 이변 없이 흘러갔다.

    1차전과 2차전에서 런던 심포니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가 진출, 4강 대진의 절반이 완성되었다.

    최지훈은 객석에 앉은 채 대진표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빈 필하모닉과 런던 심포니, 베를린 필하모닉 A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다들 대단한 곳이야.’

    최지훈의 생각대로 네 개 악단의 이름에 세계 최고라는 이름을 붙여 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각 악단이 추구하고 있는 지향점이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 완성도에 있어 흠을 잡을 수는 없었다.

    2라운드부터 심사 위원단이 만점을 주는 빈도가 크게 늘어난 것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보다 위를 보고 있는 거지?’

    최지훈은 새로운 오케스트라를 만든다는 형제의 말을 떠올렸다.

    이대로 몇 년 만 있어도 배도빈은 모든 사람의 기대와 바람대로 세계 최고의 악단을 지휘할 수 있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그 이름은 언제나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이들을 설레게 했다.

    지난 수십 년간 최고였으며 20세기와 21세기를 걸쳐 최고의 지휘자로 손꼽히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건재했다.

    그런 그가 개혁을 선언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박물관이 되지 않기로 했다.’1)

    1)사이먼 데니스 래틀(Simon Deni s Rattle): 2013년 내한 인터뷰 中

    이미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푸르트벵글러는 안주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조금씩 옛 위상을 잃 어가는 베를린 필하모닉은 달라지고 있었다.

    배도빈과 함께하면서 베를린은 연주의 레퍼토리를 더욱 넓혔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배도빈의 신곡도 심심치 않게 발표했다.

    콘서트홀을 확장하였고 두 개 팀으로 나뉘어 베를린과 유럽뿐만이 아 니라 아시아, 북미, 남미에서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투란도트와 같은 초대형 공연, 협 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디지털 스트리밍 서비스를 새로 정비함은 물론.

    베를린 필하모닉의 마케팅도 보다 적극적이 되었다.

    파격적인 가격의 자선 콘서트까지.

    베를린 필하모닉은 변화를 거듭해 단 2년 만에 옛 영광을 넘어선,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자리매김했다.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이 시작할 때만 해도 유력 악단에서 모두 베를린 필하모닉을 넘는 걸 목표로 했던 만큼 현재 그보다 좋은 환경도 없었다.

    세기의 천재 배도빈이 지휘봉을 잡 는다면 앞으로도 더욱 발전해 나갈 것이었다.

    그러나 배도빈은 안주하지 않았다.

    자신의 음악 세계를 더욱 확장시키 고 스스로 변화하면서 그에 어울리는 오케스트라를 구축하려고 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다소 무모하고 미련해 보일 수 있었다.

    성공이 확실한 선택지를 두고 모험을 떠나는 일이 현명해 보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최지훈은 그리 생각지 않았다.

    ‘세상에 없던 음악을 들려줄게.’

    ‘그런 게 있을 수 있어?’

    ‘모든 음악이 그랬어.’

    배도빈이라면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배도빈이 말하는 세상에 없던 음악 이 무엇을 뜻하는지 최지훈은 잘 알았다.

    작곡보다 연주에 치중된 현 클래식 음악계는 이미 오랜 세월 고여 있었다.

    더 나은 음악. 더 아름다운 음악을 위한 시도는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클래식 음악 시장을 축소 시키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위대한 음악가들이 이미 이뤄놓은 세계.

    하지만 배도빈은 그마저도 더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 발전해 온 역사라 믿었고, 당당히 걷고 있었다.

    그가 음악가로 활동했을 때부터 말이다.

    실패에 대한 부담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배도빈에게는 단지 나아가 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자신에 대한 확고한 자부심이 있었다.

    최지훈은 그런 배도빈과 함께하고 싶었다.

    ‘어렸을 적부터 꿈꾸던 자리를 준비하는 거야.’

    최지훈이 손을 꾹 쥐었다.

    배도빈을 처음 만난 날부터 쭉이 어온 꿈을 함께할 날이 머지않았다.

    ‘그때는 저 명단에 우리 이름이 붙어 있겠지? 아니,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야.’

    최지훈은 역사에 기록될 여러 악단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힐 오케스트라를 배도빈과 함께 시작할 수 있음에 고무되었다.

    특히나 형제의 주변에 있는 뛰어난 피아니스트 중에서도 다른 누가 아 닌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배도빈은 어렸을 적부터 오케스트라를 만들겠다고 했다.

    겨울의 가운데, 계곡 별장 다락방 에 누운 채 피아노가 있는 오케스트라를 만들겠다는 배도빈을 잊을 수 없었다.

    최지훈에게 두 번째 좌절을 안겨주었던, 배도빈마저 그 놀라운 재능에 집착했던 차채은.

    독특한 리듬감을 뽐내며 지금은 북미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니 나 케베리히.

    배도빈과의 경연 이후 부단히 자신을 닦아 마침내 피아노의 황제로 등 극한 가우왕.

    살아 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사카모토 료이치.

    배도빈이 만들겠다던 오케스트라의 피아노는 후보가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배도빈은 결국 최지훈을 선택했다.

    배도빈, 베를린 B와 두 차례 협연을 하면서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세를 갖춘 최지훈은 그 무게를 담담히 받 아들였다.

    그리고 다짐했다.

    ‘세상에 없던 음악.’

    지금까지 뛰어난 선배들을 보고 따랐다면 이제는 달라져야 했다.

    그리고 더 아름다운 연주를 하기 위해, 배도빈이 만들 새로운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자신도 더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연주법이 있을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은 생각나지 않았다.

    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답이 존재하는지 그 여부조 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우직하게 나아가는 음악가를 알고 있었다.

    최지훈은 그런 그와 함께하려면 그 러한 삶이 당연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뭐든 좋아. 다 해보자.’

    그가 자신하는 영역은 노력뿐.

    다른 사람보다 배움이 느려도 쉬지 않고 달리는 것만은 자신 있었기에 최지훈은 조급해하지 않고 발을 옮겼다.

    객실에 돌아온 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건반을 눌렀다.

    음 하나에 작곡가의 의도를 생각하 며 탐미하듯 진득한 연주가 시작되었다.

    벌써 3라운드 2차전이 끝났다.

    이제 모레면 체코 필하모닉과 마주 한다.

    그런 만큼 오늘만큼은 관람하러 가 지 않고 단원들과 함께 마지막 점검을 하였는데, 결과는 썩 만족스럽다.

    단원들은 문제없이 잘 따라와 주었다.

    다만 아무래도 관악기를 추가하고 싶은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가장 드라마틱한 효과를 줄 수 있는 건 악기 수를 대폭 늘려 음량을 강화하는 건데, OOTY 오케스트라 대전에서는 명단 이외에 연주자는 참가할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해서 다른 방법을 구상 중인데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똑똑-

    올 사람이 없는데.

    노크 소리가 나 문 가까이 다가갔다.

    “누구세요?”

    “ 나야.”

    히무라다.

    문을 열어주니 히무라가 꽤 지친 얼굴로 웃었다.

    “들어와요.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요?”

    “말도 마.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 홍보일 때문에 정신없다.”

    저번에 이야기가 나왔던 일이 진행 되고 있는 모양이다.

    협회에서 샛별 엔터테인먼트 소속 음악가들을 협회 홍보대사로 활용하 고 싶다던 말인데, 프란츠 페터에 관한 내 부탁도 있었고 여러모로 바 쁠 수밖에 없겠다.

    히무라를 위로하기 위해 찻잔을 꺼 낸 뒤 커피포트에 물을 받았다.

    “직원들은요?”

    “중요한 일이니까 직접 해야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미국에서 다른 일 하고 있고.”

    나도 남에게 일을 맡기지 못하는 만큼 히무라의 말에 공감했다.

    “선영 누나는 계속 미국에 있는 거예요?”

    “응. 아주 물 만났어. 일을 어찌나 잘하는지 이번에 니나랑 툭타미셰바 한테 큰 건 하나 만들어줬거든.”

    내가 기억하는 박선영과 조금 다른 이미지다.

    “아무튼. 프란츠랑 알베르트 이야 기는 정리가 되었어. 신사적으로 처 리하고 싶었는데 결국에는 강제가 되었지.”

    끓는 물을 따라내자 차향이 금세 물씬 피어올랐다. 물이 넘치도록 좀 더 부은 뒤 잔과 함께 테이블로 가 져갔다.

    “해결할 수 있어 다행이네요.”

    “응. ……정말 당황스럽더라.”

    히무라가 프란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본인에게 대략적인 이야 기는 들었지만 히무라도 충격을 받 은 듯하다.

    “프란츠는 시설이라고 했는데 정식 기관도 아니더라고. 게다가 10살이 되면 강제로 물건을 팔도록 시키고. 그렇게 못 하면 알베르트에게 밥도 안 줬나 봐.”

    예전에도 있었던 쓰레기 같은 놈들 이다.

    “그러니 프란츠는 다른 애들보다 훨씬 더 힘들었겠지. 알베르트가 몸이 안 좋아서 동생 몫까지 했던 모 양이야. 나중엔 실적을 못 올리니 두 아이를 아예 떨어뜨려서 못 보게 했나 봐.”

    죽일 놈들.

    나도 모르게 이를 꽉 물게 된다.

    “마무리는 잘 된 거죠?”

    “응. 돈 좀 쥐여주고 해결하려 했는데 귀찮게 굴더라고. 그 지역 경 찰들도 쉬쉬하기에 도움을 청했지. 권력과 돈이 좋긴 좋아. 김 비서님 에게 연락하니 12시간 안에 쓸어버 리던데?”

    “WH 가요?”

    “그럴 리가. 오스트리아 특경이 와 서 줄줄이 연행해 가더라. 알베르트 랑 다른 아이들도 데려와서 난 그냥 인사만 하고 데려왔지.”

    “다른 아이들은요?”

    “정식 기관에 이관되었어.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닐지 몰라도 원래 있던 곳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다행이네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알면 알수록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지.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음악을 할 수 있었는지 말이 야.”

    “자기가 일하는 곳 옆에 술집이 있었는데 거기서 클래식 음악을 틀었나 봐요.”

    “일하는 곳?”

    “지금 들어보니 껌 같은 걸 팔았던 장소 중 한 곳 같네요.”

    “ 으음.”

    “거기서 음악을 듣고 하다 보니 주 인이 기특했는지 공책이랑 악보를 몇 줬대요. 청소를 하면 매장 안에 있는 피아노를 칠 수 있게 해주고.”

    히무라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찻물이 적당히 우러나고 온도도 적 당해져 나와 히무라의 잔에 각각 나눠 따랐다.

    그것을 말없이 마신 뒤에야 히무라 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어린아이를 뭐로 생각하는 건지……

    예전 유럽에서 어린이는 짐이나 미 성숙한 노동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나마도 농사를 짓는 집에서는 노 동력이 중요해 기본 대우라도 받았지만 그렇지 않은 가정에서는 정말 처참했다.

    현대는 당시 내가 바랐던 유토피아 라 생각했거늘.

    이곳에 익숙해지고 나이를 먹을수 록 어두운 면이 드러나는 듯해 마음 이 좋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피아노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히무라도 들었는지 음에 맞춰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감탄했다.

    “누구지? 보통 실력이 아닌데?”

    “지훈이일 거예요.”

    “아아. 건넛방에 머물고 있다고 했지? 대단하네. 이 시간에도 연습을 하니.”

    “항상 그랬어요.”

    공연이 있든 없든 내가 녀석을 알 기 시작했을 때도 이미 연습벌레였다.

    잠시 최지훈의 피아노를 감상하고는 히무라가 외투를 챙겨 입었다.

    “그럼 가볼게. 프란츠랑 알베르트 에 관련된 일은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네. 다른 것보다 건강에 문제가 없는지 걱정돼요. 괜찮으면 직원 한 명 불러 전담으로 맡아주면 좋겠어요.”

    “그래.”

    히무라를 배웅해 주고 다시 객실로 올라오는데 피아노 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다.

    잠자코 듣고 있자니 어느 순간부터 한 부분을 반복해 연주한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러나 최지훈이 무슨 생각으로 이 쉬운 부분을 반복하는지 알 것 같다.

    ‘다 컸어.’

    내 피아노를 듣고 울던 녀석이 벌써 이렇게 큰 음악가가 되다니.

    시간이 정말 많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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