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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268화 (268/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68화

    58. 드보르자크(7)

    잠시 뒤 저녁.

    연습을 마치고 귀가한 배도빈은 자신의 방 한쪽 구석에서 쭈그린 채 있는 프란츠 페터를 발견했다.

    ‘왜 저기 박혀 있는 거야?’

    배도빈의 기준에서 넓은 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좁지 않았다.

    베를린 필하모닉 사무국의 멀핀 과 장은 그들의 지휘자와 악장들에게 현실적인 선 안에서 최대한 대우를 해주었다.

    당연히 현재 베를린 필하모닉 B가 머물고 있는 숙소의 최고 수준의 방 이 배정되었는데.

    프란츠 페터는 넓은 곳은 두고 굳이 방 한구석에 오도카니 자리하고 있었다.

    “ 아.”

    배도빈이 방에 들어서자 프란츠 페터가 고개를 퍼뜩 돌렸다.

    배도빈에게 다가가더니 차마 가까이 붙진 못하고 주변에서 쭈뼛대며 웃었다.

    “다녀오셨어요?”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

    “악보를 보고 있었어요.”

    “……아침부터?”

    “네!”

    배도빈이 프란츠가 있던 자리를 보았다.

    악보가 두 곳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한 장의 악보가 나와 있었는데 아무래도 볼 때마다 정리를 해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배도빈의 눈에는 그 앞에 놓인 종이 한 장만이 들어왔다.

    건반이었다.

    얼마나 눌러댔는지 너덜너덜했다.

    ‘마음껏 치랬더니.’

    “저건 뭐야?”

    “아. 연습할 때 쓰는 거예요. 헤헤.” 프란츠 페터가 수줍게 그것을 쥐어 자신의 가방에 조심스레 넣었다.

    “피아노 있잖아.”

    “그…… 손때라도 묻으면.”

    “그래도 돼.”

    배도빈은 프란츠 페터와 그의 동생이 머물 곳을 찾기 전까지 그를 자 신의 방에 데려다 두었는데, 혼자 남겨두기에도 난감했다.

    그래서 적당히 놀 것을 가져다주었는데 프란츠 페터는 컴퓨터나 게임 기는커녕 오디오와 TV조차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몰랐고, 그나마 피아노를 쳐도 된다고 하자 몹시 놀라 며 고개를 저었다.

    대신 배도빈의 악보를 구경해도 되는지 물었다.

    그것이 아침의 일이었으니 하루를 꼬박 악보만 보고 있었으니 배도빈 으로서는 조금 당황스럽기도.

    기특하기도 했다.

    그와 함께하는 사람 대부분 노력파였지만 프란츠 페터와 같이 어렸을 적부터 이렇게 음악만을 파고드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배도빈은 최지훈을 떠올리며 웃었다.

    전혀 다르게 보여도 이렇게 음악에 빠져들어 집중하는 모습만큼은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충 이야기는 들었지만 어 떤 삶을 살았기에 피아노조차 조심 스러워 마음껏 치지 못하는 건지 안타까뭤다.

    “그래. 뭐 좀 재밌는 거 있었어?”

    “네! 아직 보고 있지만 여기 이 악보는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저는, 저는 이런 곡을 연주해 보고 싶어요.”

    “ 아.”

    배도빈은 최지훈에게 주기 위해 만들고 있던 피아노 소나타 곡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2라운드 피아노 협주곡을 함께하면 서 최지훈 안에서 무엇인가가 정립 되고 있음을 확인했기에, 오케스트라 대전이 진행되는 도중에도 틈틈이 형제의 장점을 극대화시킬 곡을 만들고 있었다.

    “이건 안 돼.”

    “그, 그럼요! 제가 어떻게 감히 도빈 님의 곡을.”

    “내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랬지.”

    “네에. 죄, 죄송합니다.”

    프란츠 페터는 금세 또 쪼그라들었다.

    배도빈은 프란츠 페터가 그럴 때마 다 가슴이 아팠다. 그가 왜 저럴 수 밖에 없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소한 일에 감사할 줄 알고 타인 에게 고개 숙이는 일이 당연해진 것도 모두 그의 환경 때문이라 생각했다.

    부모를 일찍 여윈 프란츠 페터는 친인척들에게마저 받아들여지지 못 했고, 어렸을 적부터 스스로 자신과 동생을 보호해야만 했다.

    단순히 가난하다는 것을 넘어서 희 망조차 없는 삶을 연명하면서 프란 츠 페터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 고 다니게 되었다.

    저 어린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나 큰 짐이었고 철이 들 무렵부터 베토벤 가문의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했던 루트비히는 프란츠 페터의 입장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프란츠.”

    “끄윽. 네.”

    “지금까지 네가 어떻게 살았든 그 건 중요하지 않아. 앞으로는 너도 네 동생도 아프고 굶는 일은 없을 거야.”

    배도빈은 자세를 숙여 프란츠 페터 와 눈높이를 맞춘 채 말했다.

    프란츠 페터가 시선을 피해 바닥을 보았다. 배도빈은 그런 그의 얼굴을 잡아다 다시금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모두 네 손에 달렸다, 프란츠 페터.”

    “저,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돼야 해.”

    고개를 돌리지 못하자 눈만 옮겨 배도빈의 강렬한 시선을 피한 프란 츠 페터가 이내 움찔했다.

    “날 봐.”

    아주 천천히 소년의 눈이 움직였다.

    “너와 같은 상황에서 고개를 숙이는 건 쉬워. 자신을 속이면 되니까. 하지만 그건 너와 네 동생의 환경을 조금도 바꾸지 못할 거야.”

    배도빈은 이를 악물었던 기억을 입에 담았다.

    “누가 너희 형제를 업신여긴다면 맞서 싸울 줄 알아야 하고 배가 고 프면 빵을 살 수 있어야 해. 아무도 널 도와주지 않아.”

    프란츠 페터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린 채 울었다.

    “고개 숙일 필요 없어. 넌 지금까지 네 동생을 잘 지켜왔고 네 동생 에게 너보다 소중한 사람도 없을 거 야. 비굴해지지 마. 자부심을 가져. 주머니에 동전 하나가 없더라도 네 가슴속엔 언젠가 세상을 놀라게 할 힘이 있으니까.”

    강해져야만 했다.

    어머니와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라 면 돈을 벌어야 했다.

    루트비히에게 있어서 음악은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다른 일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음악으로 돈을 벌어야만 했다.

    자신마저 무너진다면 소중한 어머니와 동생들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루트비히는 나약해질 수 없었다.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였던 루트비히는 괴로운 날을 버티면 언젠가는 분명 웃을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믿음은 곧 그의 음악에도 흔적이 남을 정도로 진실되었다.

    그 투쟁의 삶이 그를 괴팍한 사람으로, 기인으로 인식되게 하기도 했으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러한 경험이 있었기에.

    배도빈은 착하고 여린 소년을 가만 둘 수 없었다.

    그의 눈에 형제에게 주기 위해 만들고 있던 악보가 들어왔다.

    “저 곡은 내 형제를 위해 만든 곡이야. 너라서 연주할 수 없는 게 아 니라 다른 누구라도 그럴 순 없어.”

    “ 아.”

    “네가 필요하다면 언젠간 만들어주 지. 하지만 난 네가 너만의 곡을 만 드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배도빈이 프란츠 페터를 놓아주었다.

    “가슴 펴.”

    프란츠 페터가 굽은 어깨를 펼치며 가슴을 내밀었다.

    “눈물 닦고.”

    코를 들이마시며 눈물을 닦았고 배도빈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의 동정심도 없었다.

    언젠가는 위대한 곳에서 함께할 것을 확신했기에 그럴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곧 있으면 동생이 올 거야. 네 동생이 눈치 보지 않고 먹고 놀 수 있게 해줘야지.”

    프란츠 페터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좋아.”

    배도빈이 프란츠 페터를 돌려 엉덩 이를 치며 말했다.

    “그런 얼굴로 동생 볼 거야? 빨리 들어가서 세수하고 나와.”

    그 말에 후다닥 화장실로 들어간 프란츠 페터는 세면대에 물을 받아 얼굴을 씻어내면서도 그것을 멈출 수 없었다.

    자꾸만 나오는 눈물을 닦아낼 수 없었다.

    잠시 뒤.

    히무라 쇼우가 프란츠 페터의 동 생, 알베르트 페터를 데리고 배도빈을 찾았다.

    “형아!”

    배도빈은 어린 형제가 서로를 얼싸 안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다가 히무라에게 인사했다.

    “바쁠 텐데 정말 고마워요.”

    “네가 이런 적이 한두 번이었니. 숙소도 잡아놨어.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빈 곳 찾기도 힘들었다고.”

    “고생하셨어요. 이 일은 꼭 갚을게요.”

    히무라가 다른 말은 없이 배도빈의 등을 쓸어내렸다.

    “바로 가죠. 프란츠, 준비는 됐어?”

    “네!”

    프란츠가 낡은 가방을 메고 동생 알베르트 페터의 손을 꼭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형아, 우리 어디 가?”

    “우리가 살 집에 가는 거야.”

    “집? 우리 부자 된 거야?”

    “아니. 저기 저 분이 배도빈 님이 신데 우리가 잘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주셨어.”

    “정말? 이제 같이 잘 수 있는 거이?"

    프란츠 페터는 목이 멨다.

    그렇게 울었음에도 동생과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믿을 수 없었고 자꾸만 감정이 북받쳤다.

    그러나 배도빈이 한 말을 떠올렸다.

    ‘알한테는 내가 전부야.’

    그러니 울 수 없었다.

    “그럼! 이따가 꼭 감사하다고 인사 드리자.”

    “응!”

    이동하는 도중, 페터 형제는 창 밖으로 보이는 잘츠부르크의 모습에 대해 조잘댔다.

    “형! 저게 뭐야?”

    “모르겠어. 엄청 멋지다.”

    “응. 엄청 멋있어.”

    “알, 저거 봐.”

    “어디, 어디?”

    “저 어기.”

    “우와아. 난 저런 거 처음 봐!”

    숙소에 도착하고.

    두 개의 침대와 욕조가 있는 평범 한 객실에 들어섰을 때, 페터 형제는 너무나 기뻐 진정할 수 없었다.

    “형! 침대야! 푹신해!”

    “알, 씻고 올라가야지!”

    “형도 빨리 이렇게 해봐!”

    “……그렇게 푹신해?”

    아직 저녁을 먹지 못한 두 형제가 씻고 나왔을 때 룸서비스가 도착했고 그것을 본 페터 형제는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알베르트는 이제 조금 걱정스럽게 눈치를 보았다.

    “형아…… 무슨 일 있어?”

    “왜?”

    “막, 막 나 버리는 거 아니지?”

    “무슨 말이야! 내가 널 어떻게 버려!”

    “그치만…… 다들 헤어질 때 이렇게 잘해줬다고 했단 말이야. 형아, 나 침대도 빵도 괜찮으니까 나 버리지 마. 버리지 마아.”

    프란츠 페터는.

    그제야 배도빈이 자신에게 왜 그렇게 엄하게 대했는지 알 것 같았다.

    동생의 모습이 자신과 겹쳐지면서, 가슴이 너무도 아파졌다.

    프란츠 페터가 알베르트의 손을 꼭 잡았다.

    “아니야. 형도 침대도 빵도 계속 같이 있을 거야.”

    “끄으억. 크흡. 정말?”

    코를 들이마시며 되묻는 동생을. 프란츠 페터는 제법 다부진 얼굴로 대했다.

    “응. 약속.”

    3라운드 두 번째 경연 당일.

    “우와! 여기 뭐 하는 데야?”

    “오케스트라 대전이 열리는 곳이 야. 알, 연주 들을 때는 꼭 조용히 해야 해?”

    “조용히?”

    “응. 음악을 듣는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니까.”

    “응. 나 착해. 피해 주는 거 나빠.”

    페터 형제가 웃으며 자리했다.

    곧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오케스트라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경연 이 진행되었다.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오케스트라는 슈만의 1번 교향곡 B플랫 장조를 연주했다.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는 도입 부터 영혼을 빼앗기듯 강렬한 선율을 뽑아내 장내를 휘어잡았다.

    어린 프란츠 페터에게 있어 그것은 너무도 귀중한 경험이었다.

    객석에 앉은 소년은 별빛처럼 눈을 반짝이며 가슴 설레고 있었다.

    ‘이게 슈만이구나.’

    꼭 쥔 두 주먹은 펴질 줄 몰랐고 프란츠 페터는 단 하나의 음이라도 놓칠까, 귀를 쫑긋 세웠다.

    때로는 웅장하게.

    때로는 장난스럽게 뛰어다니는 선율은 너무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프란츠 페터는 마치 어제의 꿈이 오늘도 이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앞으로도 그럴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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