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67화 (267/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267화

58. 드보르자크(6)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규 단원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조국, 체 코 음악을 사랑했다.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체코 음악가 들을 신봉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 만큼 자부심도 강했다.

보헤미아 왕국 시절부터 체코는 뛰

어난 음악가들이 유독 많았고 어린 밀로스 발렌슈타인에게 있어 그들의 음악은 곧 젖과 꿀이었다.

연주자로서의 그가 잉태될 수 있었던 근본이었다.

‘우리 아들, 커서 뭐 되고 싶어?’

‘체코의 음악을 연주할 거야!’

플루티스트 밀로스 발렌슈타인.

그는 일곱 살 때 아버지에게 했던 말을 단 한 번도 잊지 않았고 결국 자랑스러운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입단했다.

그에게 있어 최고의 날이었음은 밀 로스를 아는 모든 사람이 아는 사실

이었다.

입버릇처럼 체코 음악에 대해 읊었고 항상 플루트를 놓지 않았고 잘 때조차 클래식 음악을 듣다가 밤을 꼬박 지새웠던 그였기에 그가 플루 티스트로 인정받아 체코 필하모닉에 입단한 날에는 으레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여졌다.

‘드디어 다가왔어.’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벅차오르는 가슴을 도저히 진정시킬 수 없었다.

얀 바츨라프 보르지세크.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와 안토닌 드 보르자크, 레오시 야나체크, 구스타

프 말러 시대에 절정에 이른 체코 음악은 라파엘 쿠벨릭과 같은 거장 에 이르러서도 그 명맥을 굵게 이어 나가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체코의 음악은 국민적 정서를 달래주는 깊은 맛이 있었고.

현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 휘자, 엘리아후 인손은 타 국가 출 신임에도 그러한 체코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보였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접했던 밀로스 발렌슈타인에게 그런 엘리아후 인손 과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무 엇보다 소중한 악단이었다.

그래서.

3라운드에 임하는 선배 단원들의 태도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3라운드 첫 번째 날 저녁.

경연을 들은 체코 필하모닉 단원들 이 연습실에 모여 한가로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야. 벌써 3라운드라니. 이 대회 도 한 달 뒷면 끝나겠는데?”

“그러게. 기왕이면 끝까지 듣고 싶은데 말이야.”

“하하하! 당장 이번 라운드에서 떨 어질 것 같지 않아?”

“실은 난 2라운드에서 떨어지는 줄 알았어.”

“하하하하! 나도.”

진지함이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있는, 밀로스의 기준으로는 경박하기 까지 한 대화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히 우 승해야죠!”

참다못한 밀로스가 소리를 질렀다.

위대한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의 단원들이 나약한 말을 아무렇지 도 않게 내뱉는 걸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었다.

단원들이 잠시 밀로스를 쳐다보다 가 웃었다.

“하하. 오늘도 힘이 넘치는구나, 밀 로스.”

“너무 긴장하고 살면 건강에 안 좋아. 릴렉스. 릴렉스.”

“그러는 여러분이야말로 조금 긴장 좀 해요! 3라운드가 시작되었는데 왜들 이렇게 풀어지신 거예요? 더 열심히 해야죠! 오늘 런던 심포니 연주 다들 들으셨잖아요!”

“아아, 그렇지. 좋던데? 역시 브루 노 발터 경이었어.”

“그러니 말이야. 이러니저러니 해

도 인터플레이 때와는 차원이 다르 더군.”

“거기 요즘 망해도 시원하게 망하 고 있더라. 그렇게 컸던 곳이 신기 하단 말이야.”

“맞아. 음악도 그런데 영화사 같은 곳에서도 손 끊더라고.”

‘갑자기 인터플레이 이야기는 왜 나오는 건데!’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단원들의 모습이 안달이 났다.

어느새 그들은 런던 심포니의 연주를 감탄하며 또 인터플레이과 왜 망

하는지 쓸데없는 토론을 하기도 했다.

연습에는 조금도 관심 없어 보였다.

“오오. 다들 모여 있구만.”

그때 수석 지휘자 엘리아후 인손이 연습실에 들어섰다.

“벨리 텔!”

밀로스 발렌슈타인이 엘리아후 인 손에게 달려갔다.

“허허. 오늘도 기운이 넘치는구나, 밀로스.”

“벨리텔이 뭐라고 좀 해주세요! 다

들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다고요.”

“음? 그게 무슨 말이냐?”

“어제는 3라운드 진출도 겨우 했다 느니, 오늘은 2라운드에서 떨어질 줄 알았다느니 약한 소리를 하잖아요. 체코 필하모닉이 세계 최고라고 증명해야죠!”

“하하하. 그거 좋지. 다들 밀로스의 말을 들었을 테지? 시작하자.”

“네, 벨리텔.”

허허 하고 웃은 체코 필하모닉은 곧 연습을 시작했다.

그들이 선택한 곡은 체코 필하모닉 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위대한 음

악가 구스타프 말러의 5번 교향곡이었다.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성이 독자적 인 노선을 보이기 시작한 작품으로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이것을 종종 중요한 무대에서 연주하곤 했다.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내심 또 다른 주요 레파토리인 드보르자크의 9번 교향곡, 신세계로부터를 하길 바랐지만 이 역시 좋은 곡이었기에 수긍 했다.

드보르자크의 그 힘차고 활기찬 곡 은 좀 더 높은 무대에서 해도 좋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 이거라면 분명 이길 수 있어.’

밀로스는 플루트 꼭 쥐고 생각했다.

엘리아후 인손의 말러는 곡의 성향을 극대화하여 낭만적이고 부드러우 면서도 명쾌했다.

밀로스는 생동감이 넘쳐 이보다 멋 진 해석은 없을 거라 여겼고 그것은 체코 필하모닉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연주하는 체코 필하모닉이 야 말할 것도 없이 최고였다.

‘맞아. 할 수 있어.’

3라운드에 맞설 배도빈과 베를린 필하모닉이 얼마나 대단하든, 그것 은 중요치 않았다.

체코의 음악이라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밀로스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다 중요한 현악부에서 실수가 연달아 났다.

“아하하. 죄송합니다.”

“음음. 다음엔 좀 더 잘 따라와 보 게. 껄껄.”

“하하하. 옙

밀로스는 실연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기본적인 실수를 하는 것도 그 것을 웃음으로 넘기는 상황도 믿을 수 없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4악장은 현악부밖에 없잖아. 어떻게 틀릴 수가 있어.’

그렇게 부들부들하던 밀로스 발렌 슈타인은 정신이 팔려 곡을 반복할 때, 자신의 차례가 왔음에도 박자를 놓치고 말았다.

“하하하. 밀로스, 틀렸잖아.”

“이야. 그 꼼꼼한 밀로스가 틀리다 니. 정말 긴장이 많이 되긴 하나

봐.”

“……죄송합니다.”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자신의 실수 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차마 고 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분명 어제도 그제도 10년 전에도 연습해 왔던 곡인데 박자를 놓치다 니.

기본적인 실수를 해 연습을 방해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너무 그렇게 침울해하지 마. 아까 얀도 틀렸잖아.”

“맞아. 내가 틀린 거에 비하면 넌 아무것도 아니라고.”

“크하하! 네 입으로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그런가? 하하하하!”

단원들의 말에 밀로스 발렌슈타인 은 참을 수 없었다.

따끔하게 혼을 내고 진심으로 반성 한 뒤 완벽한 연주를 할 때까지 반 복해 연습해도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을까 말까 한데.

이러한 실수에 대해 쉽게 생각하는 선배 단원들이 미웠고 그런 상황을 허허 웃으며 지켜볼 뿐인 수석 지휘 자가 미웠고.

동시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박자를

놓친 자기 자신이 믿을 수 없을 정 도로 싫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 올게요.”

그러한 마음을 다스릴 줄 모르는 어린 플루티스트는 도망치듯 연습실 문을 열었다.

남은 단원들이 걱정스레 보았다.

“평소보다 좀 더 심한 거 같은데? 달래줘야 하는 거 아냐?”

“지금까지 너무 치열하게 살아서 그래. 우리도 저랬잖아.”

“그렇긴 해도.”

“밀로스도 마음이 조급해 봤자 변 하는 게 없다는 걸 알아야 해. 그건 연주를 방해할 뿐이라는 것도. 또 그걸 스스로 인지해야만 한다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 안 그래요, 벨리텔?”

단원들의 말에 엘리아후 인손이 부 드럽게 미소 지었다.

한편.

연습실에서 나온 밀로스는 마음을 달래며 화장실로 향했다.

찬물로 세수라도 해야 정신이 돌아 올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물을 끼얹어도 자신

의 미숙함에 대한 화는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연습 도중에 무단으로 나와버렸으니.

그나마 돌아온 정신이 또 한 번의 잘못을 지적했고 그것이 밀로스를 더욱 괴롭혔다.

‘돌아가자. 돌아가서 다시 한번 사 죄드리자.’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수 없었기에 밀로스는 서둘러 발을 옮겼다.

그 순간이었다.

복도 끝에서 관악기가 힘차게 소리를 내었다. 그 폭발적인 소리는 잠

시 멈추었다가 이내 두꺼운 문이 닫 히면서 다시 들을 수 없었는데.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그 잠깐이라 도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드보르자크의 9번 교향곡.

그가 가장 사랑하는 신세계로부터였다.

저도 모르게 몸이 이끌려 문 앞에 선 밀로스는 미약하게나마 들리는 그 연주에, 그 완벽함에 매료되어 넋을 놓고 한동안 소리에만 집중했다.

‘대체 어디지?’

2라운드에서 살아남은 악단은 총

12개 악단.

그중 오늘 경연을 마친 런던 심포 니와 프랑스 국립 오케스트라는 아 닐 테니, 체코를 제외하면 남는 곳 은 아홉 군데였다.

‘암스테르담인가? 베를린 A? 클리 블랜드?’

밀로스는 본인이 생각하기에 가장 뛰어난 악단을 먼저 떠올렸다.

그만큼 듣고 있는 ‘신세계로부터’는 너무도 완벽하게 조율되어 있었다.

그때 연습실 옆 조금 높은 위치에 표시되어 있는 이용 시간표가 눈에

들어왔다.

‘……베를린 B라고?’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믿을 수 없었다.

설마하니 체코 음악의 진수를 자랑 하는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상대로 드보르자크를 준비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것이 치기 어린 밀로스 발렌슈타 인의 한계였고.

지나친 민족주의가 낳은 편견이었으나 평생을 그렇게 자란 밀로스는 자각할 수 없었다.

그저 잘못된 방향으로 생각할 뿐이

었다.

‘말도 안 돼. 동양의 지휘자가 드 보르자크를 이렇게 잘 지휘할 수 있을 리 없어.’

그렇게 주먹을 쥐고 손을 파르르 떠는데.

어느새 연주가 멈추었고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구?”

배도빈은 연습실 앞에 부들대고 있는 붉은 갈색 머리의 남자에게 물었다.

“배도빈……

밀로스 발렌슈타인은 주먹을 꽉 쥐었다.

“우릴 상대로 드보르자크의 곡을 준비하다니, 그것은 오만인가?”

“뭐라는 거야. 이건.”

밀로스 발렌슈타인이 이를 갈며 말 했지만.

아리엘 핀 얀스라는 걸출한 정신병 자에게서 면역이 된 배도빈은 헛소 리를 하는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하 는지 잘 알고 있었다.

서로의 말을 이해하진 못한 것이 도리어 상황이 악화되지 않은 요인 이 되었다.

“무슨 일이야?”

그때 피셔 디스카우가 우람한 몸집을 드러내며 문 쪽으로 향했고 밀로 스 발렌슈타인은 그를 보고 움찔했다.

그러나 용기를 내 다시 한번 외쳤다.

“드보르자크를 준비한 걸 후회하게 해주마! 네가 모든 곡을 완벽하게 할 거라는 생각 따위 버리는 게 좋을 거야!”

배도빈은 문 앞을 막아서서 알 수 없는 말로 소리를 질러대는 밀로스를 보다가 그를 걷어차 버렸다.

그러고는 넘어진 밀로스 발렌슈타 인을 뒤로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마, 마왕이라더니. 과연 이런 괴팍 함 때문이었나!’

그렇게 그는 홀로 배도빈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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