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65화 (265/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265화

58. 드보르자크(4)

할아버지가 아무래도 내게 WH해 운과 WH호텔의 경영권을 물려주고 싶으신 모양이다.

몇 번 그런 눈치를 주시곤 했는데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도 그리 관심이 없어 쓸쓸해하시는 모습을 봐왔던지라 조금은 안타까웠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두 회사가 필요한 건 사실.

사실상의 경영은 내가 하지 않겠지 만 할아버지도 내게 그 정도의 역할을 바라진 않으실 거다.

할아버지의 말대로 결정권과 발언 력이 있어야 움직이기 편할 테니 적 당히 어울려주는 걸로 권한을 얻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다.

‘뭐든 잘 아는 사람이 해야지.’

효도도 하는 겸 말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자 허기를 느 꼈는데 어느덧 저녁이었다.

‘악보를 못 봤네.’

이것저것 정리할 일이 있었지만 소 중한 하루가 금방 지나버리고 말았다.

하루가 참 짧다.

저녁은 대충 때우고 바로 조율에 들어가고자 건넛방 문을 두드리자 최지훈이 눈을 비비며 나왔다.

“ 으응?”

“잤어?”

"응."

시계를 다시 확인해도 저녁 6시.

평소 초등학교에서 배운 바른 생활이 몸에 밴 최지훈이 지금까지 자고 있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뭐 하는데 여태 잤어?”

“크리크 콩쿠르 영상 보다 보니 잠을 못 잤어. 들어와. 금방 씻을게.”

최지훈이 하품을 하며 안으로 들어 갔다. 따라 들어가 적당히 앉은 뒤 물었다.

“들을 만했어?”

“으음. 아무래도 전체적으로는 아 쉬웠는데 눈에 띄는 애가 있어서.”

혹시나 싶다.

“프란츠 페터?”

“알고 있어?”

최지훈이 관심을 가질 만한 수준이 라면 적어도 우승은 했을 거라 생각 했는데 들어맞았다.

“조 추첨식 때 나와서.”

“아, 그랬지.”

최지훈이 샤워부스로 들어가 말을 이어갔다.

“대단하더라. 15살인데 국제무대에는 처음인 모양이야. 서정적이라고 해야 하나? 한번 들어봐.”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에 최지훈의 목소리가 가려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침대 위에 녀석의 헤드폰과 태블릿이 있어 살펴보니 최근 목록에 크리크 국제 피아노 콩쿠르 결승 블루레이가 남아 있었다.

적당히 시간을 죽일 생각으로 헤드 폰을 끼고 파일을 재생하니 곧 어제 보았던 키 작고 볼이 통통한 녀석이 나왔다.

‘15살이라고?’

고작해야 10살 갓 넘긴 줄 알았는 데 동안이라는 수준을 넘어 발육이 덜 된 느낌이다.

태블릿을 한쪽에 치워놓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첫 번째 음을 듣는 순간.

눈을 떠 태블릿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 뭐야.’

연주하는 곡은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9번 C단조.

‘ 엉망이잖아.’

엉망진창이다.

그러나 이 자유분방함은 여태 내가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을 일 깨우는 둣하다.

늦은 봄의 따사로운 햇빛조차 이보 다 부드러울 순 없다.

프란츠 페터는 빈틈없이 배치된 음 계를 감싸듯 이리 쥐었다 저리 옮겼 다 곡을 가지고 놀았다.

프란츠라는 흔한 이름.

그러나 녀석의 연주는 내가 들었던 그 어떤 피아니스트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리 놀았다.

그러면서도 참으로 아름답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건가.’

때 묻지 않은 순수함.

방향성은 전혀 다르지만 마치 예전 의 니나 케베리히를 보는 듯한 기분 이다.

“어때?”

샤워를 마친 최지훈이 나와 머리를 말리며 물었다.

“찾아야겠어.”

“어? 누굴? 걔?”

“응. 나 먼저 간다.”

“나 머리만 말리면 되는데. 같이 가.”

“지금 말려.”

“말리고 있잖아.”

“걷다 보면 알아서 말라. 삘•리 가자.”

“걔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그러는 거야?”

모른다.

핸드폰을 열어 멀핀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악장. 전화 받았습니다.

“어제 조 추첨식에 나온 프란츠 페 터라는 애 알고 있어요?”

-프란츠 페터. 프란츠 페터. …… 아, 크리크 우승한 아이죠? 이름은 들어봤어요.

“지금 잘츠부르크에 있을 텐데 어 디에 있는지 확인해 줄 수 있어요?”

- 네?

멀핀 과장이 조금 당황했는지 횡설

수설하다가 이내 만족스러운 답을 주었다.

-한번 알아볼게요. 10분만 주세요.

“네.”

전화를 끊으니 최지훈이 날 묘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왜?”

“처음으로 너랑 일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무슨 뜻이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을 도시 에서 찾아내라니. 일을 시켜도 어떻게 그런 걸 시킬 수 있어?”

“히무라랑 카밀라는 다 해줬는데.”

“그건 히무라 대표님이랑 국장님이 이상하게 유능하신 거고. 보통 가능 한 일이 아니잖아.”

“그런가?”

“그래.”

무리한 부탁을 한 건가 싶어 조금 은 반성하고 있는데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프란츠 페터가 머문다는 호텔 주소다.

최지훈에게 보여주었다.

“말도 안 돼.”

“508호에 프란츠 페터라는 사람이 있을 텐데 배도빈이 만나러 왔다고 전해주세요.”

“죄송합니다. 508호는 현재 비어 있습니다.”

멀핀이 알려준 호텔을 찾으니 데스 크에서 프란츠 페터가 이미 떠났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왜 그래? 뭐 하려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최지훈이

물었다.

“그냥. 만나야 할 것 같아서.”

나도 잘 모르지만 그 녀석의 연주 에 마음이 이끌려 무작정 움직였다.

“음악을 하는 아이라면 언젠가 꼭 보게 될 거야.”

최지훈은 내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 말대로 음악을 하는 이상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만 너 무 오래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 ……밥 먹으러 가자.”

«으W

흐-

아쉬움을 달래며 최지훈과 함께 근

처 식당에서 적당히 배를 채웠다.

그러면서도 프란츠 페터에 대한 생 각을 떨쳐낼 수 없었는데 조금씩 내 감정에 대해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욕심.

크고 순수한 원석을 본 내 욕심이다.

채은이를 만났을 때도 니나를 찾아 나섰을 때도 마르코를 발견했을 때 와 같이 난 그 녀석이 망가지지 않고 잘 가공되길 바라는 것이다.

뛰어난 후학이 꽃 피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잘 알고 있고 그러지 못하고 좌절할

때 느끼는 안타까움도 뼈저리게 느 꼈기 때문이다.

“3라운드 때는 드보르자크였지?”

“어.”

“체코에서도 드보르자크로 나올 것 같은데, 재밌겠다.”

“그러게.”

올리브를 쿡쿡 찌르고 있는데 묘하 게 불편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드 니 최지훈이 화를 내고 있었다.

“왜?”

“됐어.”

화가 난 건 확실한데 이유를 모르겠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식사를 마쳤다.

숙소로 돌아왔는데 그때까지 묘하 게 말수가 적어진 최지훈이 아 하고 감탄사를 냈다.

녀석을 보았다가 시선을 좇으니 그 끝에 나보다도 작은 버섯 같은 녀석 이 있었다.

“도빈아, 쟤.”

“응.”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되었다.

“으아아아. 도, 돌아갈까?”

“오늘 말고는 기회가 없을 텐데.”

“하, 하지만 만나 줄 리가 없잖아.”

“역시 그냥 돌아가는 게……

뭐라 중얼대는 거야?

다가가는데 혼잣말을 끊임없이 중 얼거리기에 잠깐 기다렸더니 갈팡질 팡하고 있다.

“프란츠 페터.”

“끄악!”

불렀더니 크게 소리를 쳐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로비에 있던 사람들도 한 번씩 시 선을 준 뒤 제 갈 길을 갔다.

“배, 배, 배도빈!”

“안녕.”

“시, 신이시여!”

프란츠 페터가 납죽 엎드리려 하기 에 당황해 녀석을 붙잡고 말았다. 간신히 일으켜 세운 뒤 몇 번을 달 래고 나서야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날 이렇게까지 당황시킨 사람은 이 녀석이 처음인 듯하다.

“아무래도 날 보러 온 거 같은데

올라가서 이야기하자.”

“네!”

최지훈이 자리를 피해주었고 내 방 에서 프란츠 페터라는 녀석과 함께 있을 수 있었다.

녀석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이고는 몸을 꼼지락댔다.

“크리크 결승에서 슈베르트 소나타 들었어.”

고개를 퍼뜩 든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살짝 벌리고 있는 모습이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다.

“인상적이야. 피아노는 얼마나 친 거야?”

“5, 5년 정도요.”

솔직히 말해 설명이 안 되는 수준으로 발전 속도가 빠르다. 마치 처 음부터 그러한 재능을 지녔는데 그 개화가 무척 빠르기까지 한 듯하다.

“저기……

내심 놀라고 있는데 프란츠 페터가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혹시 이, 이거 봐주실 수 있나요!”

녀석이 낡은 가방에서 종이 다발을 꺼내 내게 향했다.

악보다.

“곡도 써?”

“네, 네! 하지만 다른 분께 보이는 건 처음이라……. 가, 가능하다면 배도빈 님께 보여드리고 싶어서.”

“그래서 찾아왔던 거야?”

녀석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악보를 받으니 무척 깔끔했다.

고친 부분이 없었고 마치 컴퓨터로 쓴 것처럼 기호와 글자가 정자로 제 대로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것보다 나를 더 놀 라게 한 것은 단순한 멜로디가 곧장

내 가슴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 아.’

이제야 떠올리다니.

‘프란츠 페터.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

짧고 아쉬운 만남이 이 악보를 보는 순간 몸과 영혼을 가득 채웠다.

“연주해 봐.”

방 안에 놓인 피아노를 가리키자 프란츠 페터가 후다닥 뛰어가 서둘 러 건반을 눌렀다.

상상했던 그대로.

훌륭한 곡이다.

맑은 계곡 물이 흐르듯 청량감을 주는 멜로디와 그러한 심상을 정확 히 전달할 줄 아는 연주력.

‘물건이야.’

프란츠 페터가 연주를 마쳤다.

“프란츠 페터는 본명이야?”

“네?”

이상한 질문이긴 하다.

“슈베르트와 이름이 비슷하니까.”

“아, 마, 맞아요. 가능하다면 루트 비히라는 이름이 더 좋을 텐데.”

이상한 녀석.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계약한 곳은 있어? 음악은 어떻게 하고 있고.”

“계약에 대해선…… 크리크에서 우 승한 뒤에 몇 번 연락을 받았는데.”

“받았는데?”

“라이징스타에 들어가고 싶어서……

“환영하지.”

프란츠 페터가 벌떡 일어났다.

“정말요? 정말 그렇게 해주시나요?”

“물론. 인재가 스스로 들어와 준다 는데 거절할 리가. 일단 오늘은 늦

었으니 내일 미팅을 잡도록 하자. 저녁에 괜찮지?”

어찌나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는지 부러질 것만 같다.

“자, 번호 찍어.”

핸드폰을 넘겨주자 방금까지 잔뜩 들떠 있던 프란츠 페터가 우물쭈물 그것을 보기만 했다.

“왜?”

“핸드폰이…… 없어요.”

요즘 세상에 핸드폰이 없는 사람이 있다니.

신기한 노릇이다.

“그럼 연락은 어떻게?”

“시설 쪽으로……

시설이라.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쓰는 물건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낡은 가방과 옷차림.

핸드폰이 없는 걸로 보아 사정이 어려운 듯하다.

혹시나 싶어 물었다.

“오늘 지낼 곳은 있어?”

“괘, 괜찮아요. 하루쯤이라면 역에 서 보내면 돼요.”

말도 안 되는 소릴.

꼬르륵-

마침 녀석의 배가 항의를 했다. 인터폰을 들었다.

-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부드러운 빵과 가지 샐러드, 연어

를 구워 가져다주세요.”

“괘, 괜찮아요! 조금만 걸어가면

근처에 깨끗한 솔잎이 있어요.”

뭔 말이야.

주문을 마치고 돌아보자 녀석이 큰

일이라는 듯 펄쩍펄쩍 뛰었다.

“연주 들려줬잖아. 공연값이라 생 각해.”

“하지만 저따위의 연주가 배도빈 님께……

“그 신이라느니 님이라느니 좀 어떻게 좀 해.”

“그럼 어떻게……

“형.”

“네에? 어, 어떻게 제가 감히 배도빈 님을 형이라고 불러요. 말도 안 돼요.”

“너 좀 귀찮다.”

“죄, 죄송합니다.”

말 한마디에 곧 울 것 같다.

정말 이상하고 황당하면서 재밌는 녀석이다.

“농담이야.”

녀석에 대해 조금 더 물었다.

“협회에서 마련해 준 호텔이 어제 까지였다고?”

“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야 해 서……

“집은 어딘데?”

“할라인이요.”

“가깝네.”

“네. 열심히 걸으면 금방 가요.”

“……뭐라고?”

어이가 없어 뭐라 말하지도 못했는 데 음식이 도착했다.

프란츠 페터는 입을 벌리고 군침을 다셨고 그런 주제에 차마 못 달려들 고 있었다.

“먹어.”

“하지만.”

“버린다.”

“이, 이 맛있어 보이는 걸요?”

“그러니까 먹어.”

프란츠 페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구운 연어를 집어 들었다. 어린애는 어린애인지 얼마나 먹고 싶어 하는 지 얼굴과 행동에 그대로 드러난다.

“마, 맛있어!”

히무라에게 부탁할 일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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