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264화
58. 드보르자크(3)
“그럼 3라운드도 힘내!”
“네.”
인터뷰를 마치고 악보를 검토하고 있는데 마침 사카모토와 히무라가 찾아왔다.
오케스트라 개설 이야기를 나누고자 방문해 달라 했는데 좋은 타이밍 에 맞춰 와주었다.
외부로 발설되기에는 이른지라 방 에 자리를 잡고 차를 주문했다.
“무슨 일이야? 선생님하고 같이 볼 일이라면 중요한 일일 것 같은데.”
히무라가 악보를 조심스레 치우며 의자를 뺐다.
“오케스트라 관련해서 방향성을 잡았거든요. 히무라와 사카모토의 의 견을 들어보고 싶어요.”
“ 아.”
히무라의 눈이 살짝 커졌고 사카모토는 눈매를 좁혔다.
“드디어 결심이 선 모양이군.”
“네.”
“잘 생각했네. 조금 이를 수도 있지만 나로서는 그보다 기쁜 일도 없지. 빌헬름도 고려하고 있던 것 같고.”
“세프가요?”
“응.”
사카모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전에 자네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네. 베를린 필하모닉에 두는 것 이 옳은 일일까 고민하고 있었지. 그답지 않게 무척 조심스러웠어.”
푸르트벵글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러나 막상 생각해 보면 종종 칼 에케르트에 대해 언급했던 것도 아마 나 이외의 후계자로 점찍은 것 같기도 하여, 푸르트벵글러가 내가 떠나는 걸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번 OOTY 오케스트라 대전에서 내건 조건도 그렇고 말이다.
정말 고마운 사람이다.
“그래, 그리 되었으면 어서 들려주 게.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구만.”
히무라도 고개를 끄덕여 사카모토 의 말에 힘을 주었다.
“해상 오케스트라를 구상하고 있어요.”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 한 것부터 알렸다.
사카모토와 히무라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는지 눈을 끔뻑였다.
“해상 오케스트라?”
“네. 한 지역에 머물면 제 음악을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생 기니까요. 이리저리 다니면서 연주를 하고 싶어요. 대형 크루즈가 콘서트홀이 되는 거예요.”
“허어.”
사카모토가 턱을 내밀고 생각에 빠 졌고 히무라는 예상대로 여러 문제 점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 상당할 텐데. 그러니까 오케스트라를 듣는 여행을 말하는 거지?”
“ 네.”
“오케스트라를 유지하기 위한 제반 비용이 너무 커. 관객들이 부담해야 하는 기회비용도 크고.”
히무라의 말대로 어쩌면 관객이 짊 어질 짐은 더 커질지도 모른다.
만약 루트비히 오케스트라를 서울 에 세운다면 인근에 주거하는 시민 들은 공연비만 지불하면 되지만, 크 루즈를 타야만 한다면 반강제적으로 여행이라는 시간적 비용과 공연비에 더해 초호화 크루즈를 타는 금전적 비용을 함께 지불해야 한다.
접근성에 부담이 생기는 거다.
그러나 히무라는 분명 좋은 해결책을 제시해 줄 거라 믿는다.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히무라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고요.”
“믿어주는 건 기쁘지만……
히무라가 잠시 고민하기에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더해주었다.
“하지만 완편 오케스트라를 구성하진 않을 거예요. 지금까지와 배치도 다를 거고요.”
“그건 무슨 뜻이야?”
“좀 더 유동,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오케스트라를 구성하고 싶어요. 악기가 많으면 소리는 웅장해 질 수 있지만 그만큼 운용이 둔해지 니까요.”
“소수 정예로 가겠단 뜻이로군.”
사카모토가 잘 정리해 주었다.
“도빈 군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 직 잘 모르지만 아마 하고 싶은 음악을 소화할 수 있는 구성원을 원하겠지?”
“네. 그러기 위한 오케스트라니까요.”
사카모토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히무라를 보며 말했다.
“2관 편성이나, 아니, 어쩌면 1관 편성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오케스트라라기보다는 실내관현 악단처럼.”
“……인원이 적다면 유지비용에서는 생각보다 적게 들어갈지도 모르겠네요. 최소 100명을 잡아도 연봉 으로만 100억은 나갈 테니까. 크루
즈를 운용하려면 직원도 엄청날 텐 데. ……빅토리아호의 승무원이 대충 7〜800명 정도였나.”
히무라와 사카모토의 대화가 흥미 롭게 이어졌다.
빅토리아호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히무라의 말로 보아 호화 크루즈인 듯싶다.
“구상하고 있는 건 1관 편성에 근 접해요. 취주악부와 피아노 그리고 가수가 추가될 예정이지만.”
“옳거니.”
사카모토가 무릎을 쳤다.
“클래식 음악으로 들려줄 수 있는 건 모두 하겠단 뜻이로군. 규모는 작더라도 분명 다양한, 자네가 하고 싶은 음악은 모두 할 수 있도록 말 이야.”
“네.”
“단원들이 고생깨나 하겠네. 실력도 출중해야 할 테고.”
“……도빈이를 따라갈 수 있는 연주자들이라면 평균 연봉을 1억으로 잡아도 힘들 수 있겠는데.”
히무라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내가 히무라에게 바라는 점이기도 하다. 이런 쪽에 대해서는 현실 감각이 없는 내게 히무라는 분명 좋은 조언자가 되어줄 것이다.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아니야, 도빈아. 사업은 하나하나 잘 따져보고 시작해야 해. 수익성이 확보되어도 실패하는 사례가 훨씬 많아.”
“괜찮아요. 저랑 제가 선택한 연주 자들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을 리 없으니까요.”
“하하하. 이거 히무라 군이 한 방 먹었구만.”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니까 납득할 수 있지만 그래도 쉽게 생각할 건 아니야. 해상 연주회를 가진 다 해도 배 위에서만 있을 것도 아 니잖아. 단원들에게도, 승무원들에게 도 휴식이 필요해. 지역을 정해놓고 있으면 발생하지 않을 부대비용이 단지 악단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나갈 거라고.”
“그러게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뗐다.
“그럼 이런 방법은 어때요?”
“ 무슨?”
“어차피 큰 항구를 가진 도시는 몇 없으니 그 도시에 전용 호텔을 마련하는 거예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껄껄껄껄.”
“평소에는 일반적으로 운영하다가 크루즈가 도착하면 사용하는 거죠. 관광객들도 숙소가 필요할 테니 연동해서 할인해 주면 고객 확보도 빠를 테고.”
“그건…… 어쩌면 가능성 있는 이 야기일지도 모르지만 대체 그 큰 도 시들에 어떻게 호텔을 마련한다는 거야? 작은 규모도 아니고 수천 명을 수용할 만큼 큰 곳을.”
“사면 돼죠.”
“도빈아!”
답답한지 히무라의 목소리가 커졌다.
“네가 얼마나 부자인지 알지만 지 나쳐. 만약 실패했다간 모든 걸 잃을 거야. 세계 각 주요 도시에 호텔을 매입한다니. 대체 얼마나 들지 상상이나 해봤어?”
“아뇨. 잃는 건 돈뿐이에요.”
돈은 수단에 지나지 않다.
나도 돈을 사랑하지만 그것은 돈이 음악을 하는 데 있어 매우 쾌적한 환경을 부여해 주기 때문이다.
내 말을 들은 히무라가 잔뜩 인상을 쓰고는 고개를 숙였고 잠시 상황을 지켜보던 사카모토가 껄껄 하고 웃었다.
“히무라 군,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도빈 군에게 음악 외의 일은 없다고.”
“알고 있긴 하지만……
히무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빈아, 이 일은 시간을 들여 여 러 면에서 검토해 봐야겠어. 어차피 너 올해는 베를린에 있을 거잖아. 천천히 보자.”
“네. 저도 급하게 생각하고 있진 않아요. 3〜4년 정도 뒤로 보고 있어요.”
“3 〜4년?”
“네.”
히무라의 생각보다 기한이 더 길었는지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려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크루즈도, 호텔 사업 도 하셨네. 할아버지에게도 물어봐야겠어요.”
“•…"아!”
히무라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일인가?”
사카모토가 나와 히무라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렇지! 초기 비용이 거의 안 들 수도 있겠어. WH그룹의 이미지에 도 좋을 수밖에 없고!”
할아버지한테 크루즈랑 호텔 좀 달라 해야겠다.
-그래서 크루즈랑 호텔이 필요해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의 말에 유장혁 회장은 눈을 깜빡였다.
WH해운은 규모는 그룹 내에서 크 지 않았지만 배도빈의 생각은 제법 그럴 듯해 보였다.
배도빈이 이끄는 오케스트라를 감 상할 수 있는 독점적 성격을 띠기에 고객 유입이 크게 뛸 것은 당연한 일.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벌써 10 년 넘게 세계 최고의 음악가로 사랑 받는 손주는 여러 차례 자신의 상업적 가치를 증명해냈다.
‘이것 봐라.’
유장혁이 입맛을 다셨다.
딸 유진희와 사위 배영준이 그룹 운영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고 손자 배도빈은 어렸을 적부터 꿈이 확고 해 유장혁은 내심 회사를 물려주는 걸 포기하고 있었다.
그의 재력을 물려줄 순 있어도 되 도록 경영을 맡아주었으면 했는데 둘째 손자 배도진은 너무 어렸고.
그것이 유일한 걱정거리였는데 배도빈이 사업 이야기를 꺼내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기뻐하기엔 이른 법.
영악한 손자가 바라는 게 WH해운과 WH호텔의 경영이 아니라는 것 쯤은 잘 알고 있었다.
“껄껄. 재밌는 이야기로구나.”
-그렇죠? 할아버지도 놀러 오시면 좋을 거예요.
“음음. 그렇겠지.”
유장혁은 적당히 반응하며 시간을 끌었다.
‘요녀석을 어떻게 구슬린담……. 옳지.’
생각을 정리한 유장혁 회장이 목을 가다듬었다.
“도빈아.”
_네.
“크루즈는 얼마든지 줄 수 있지만 오케스트라를 더하려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래. 네가 급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으니 시간 날 때마다 할아버지랑 같이 둘러보는 게 어떠냐.”
배도빈이 곧장 대답하지 않아 유장 혁은 한 번 더 밀어붙였다.
“네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 악하면 좀 더 유연한 방도가 생길지도 모르지.”
-그런 거 같아요.
“암. 그렇고말고. 그리고 도빈아, 네가 바라는 대로 운영하려면 발언 권도 쥐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_네.
“그러려면 WH해운에 대해서 몰라 서야 말이 안 되지.”
-그러네요.
유장혁 회장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러니 할아버지가 잘 알려줄 테 니 시간 날 때마다 서울로 오너라. 아니, 내년이면 아예 여기 머물면서 진득하게 있어도 좋고.”
-그럴게요.
“뭐!”
-왜 그러세요?
“아, 아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구나.”
통화를 마친 유장혁 회장은 손자가 평소와 달리 자신의 말을 너무나 순순히 받아들인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럴 녀석이 아닌데.’
하지만 그런 의심도 잠시.
너무나 바랐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 난데없이 진행된 덕에 입이 씰룩거렸다.
‘재밌는 일이야. 괜찮아 보이고. ……암. 누구 핏줄인데. 녀석에게도 사업가의 피가 흐르는 게야. 해운과 호텔을 시작으로 조금씩 물려주면 되지.’
“흐흐흐흐.”
조금씩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던 유장혁 회장이 결국에는 크게 웃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회장실에서 큰 웃음이 들려 깜짝 놀란 두 비서는 어안이 벙 벙해 서로를 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