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63화 (263/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63화

    58. 드보르자크(2)

    그런 뒤에는 역시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하모닉 A.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와 산타 체 칠리아 음악원 오케스트라도 훌륭하 지만 어느 쪽이든 푸르트벵글러가 지리라곤 상상할 수 없다.

    ‘역시 빈 아니면 런던이겠지.’

    세미파이널에서는 빈이든 런던이든 꽤 접전일 것 같다.

    칼 에케르트와 브루노 발터라는 걸출한 인물이 이끄는 두 악단은 수십 년째 세계 최고로 인정받았던 만큼 쉽진 않을 것이다.

    ‘이쪽도 마찬가지지만.’

    드보르자크 정면 대결이 예상되는 가운데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특기를 더할 나위 없이 뽐낼 것이고 북미 최고의 악단 중 하나인 시카고 심포니 뒤에는.

    마리 얀스의 암스테르담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백작 마리 얀스.’

    사카모토 료이치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함께 내가 인정하는 이 시 대 최고의 음악가 마리 얀스.

    그리고 완벽한 악단이라 자부하는 베를린 필하모닉을 십 년 넘게 압도 했던 암스테르담 로얄 콘세르트허바우

    ‘재밌겠는데.’

    암스테르담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 푸르트벵글러도 마리 얀스에게는 꽤 오랜 세월 밀렸던 것이 사실 이니까.

    ‘평론가와 기자들의 평가 따위 중요치 않지만 시장 영향력을 따져도 베를린 필하모닉과 동등하면 했지 밀리진 않았어.’

    사회자의 클로징 멘트와 함께 회장이 정리되었다.

    “이제 막 절정으로 치닫는 오케스트라 대전! 3라운드 대진이 정해진 가운데! 팬들과 언론은 각 악단이 어떤 준비를 할지 너무나도 궁금하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배도빈! 만만 치 않은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앞으로 어떤 곡을 들려줄지! 모든 기자가 인터뷰를 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지금! 운 좋게 단독 인터 뷰를 따낸 유능한 기자가 있었으니!”

    “아사히 신문의 이시하라 린입니다!”

    조 추첨일 다음 날.

    전부터 인터뷰를 해달라고 애걸복걸하던 이시하라 린과 만났는데 정말 기쁜 모양이다.

    평소에도 활기찬 사람이지만 오늘은 조금 신기해 보일 정도로 들떠 있다.

    “단독 아니에요.”

    “으엉?”

    어깨를 으쓱이자 이시하라 린이 머리라도 맞은 듯 입을 벌렸다.

    “일본에서는 단독 맞잖아! 오랜만에 기분 좀 내자!”

    “그래요.”

    왠지 모르게 재밌다.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시하라 린이 꿍얼거렸다.

    “네 인터뷰 따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니? 카밀라 앤더슨 국장보다 지금 멀핀 과장이 더 깐깐하다니까?”

    “덕분에 귀찮은 일이 좀 줄긴 했어요.”

    “귀찮다니! 얘, 팬들은 네 모습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 하는데 그러 면 안 돼. 일본에 네 팬이 얼마나 많은데.”

    공연이라든지 일본 시장에 신경 쓰지 못한 지 꽤 오래되었는데 그렇다 고 하니 고마울 뿐이다.

    이시하라 린이 형식적으로 말할 사람도 아니니 언젠가는 그들을 위한 이벤트도 한 번쯤 기획해 봐야겠다.

    ‘사카모토랑 함께하면 더 좋겠지.’

    어제 즉석해서 한 협연이 썩 즐거 웠기에 일본 이벤트를 핑계로 사카모토와 한 번 더 어울릴 수 있겠다.

    “자, 그럼 첫 번째 질문.”

    “갑자기요?”

    “30분밖에 안 줬다고!”

    꽤 다급해 보여 또 웃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점심이나 같이 해요. 밥 먹으면서 대화하는 거야 멀핀도 어쩌지 못할 거예요.”

    “정말?”

    엄청 좋아한다.

    “그럼 우선 2라운드까지의 소감부터 들려줄래?”

    “즐거워요. 참가자로서도 그렇고 듣는 입장에서도 이만한 연주를 계 속 들을 수 있으니까요.”

    “여유로운 건 여전하네. 역시 우승 할 자신이 있어서 그런 거야?”

    “그럼요. 제가 아니면 누가 우승하겠어요.”

    “역시! 그래야 배도빈이지!”

    이시하라 린이 주먹을 뻗었다.

    기분이 좋아 그런지 다른 때보다 반응이 활동적이다.

    “하지만 3라운드로 올라서니 남은 악단들의 면면도 만만치 않아. 당장 마주하는 체코 필하모닉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훌륭해요. 엘가르 데를의 해석은 깊고 체코 필하모닉의 표현력은 풍 부하죠.”

    “응응.”

    “어떤 곡을 연주할지 모르겠지만 분명 기분 좋은 경험을 할 거라 믿 어요. 그들이 3라운드에서 멈추는 게 애석할 것 같네요.”

    “너 정말 대단하네. 그런 말을 아 무렇지도 않게 하고.”

    다 엘가르 데를과 체코 필하모닉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나와 베를린을 믿으니 하는 말이다.

    “멋진 선전포고였어.”

    이시하라 린이 수첩에 따로 메모했다.

    “2라운드 때 최지훈 군과의 협연이 좋은 반응을 보였어. 벌써 두 번째 맞췄는데 호흡은 어때? 역시 편한 가?”

    “네. 최지훈 피아니스트는 오케스트라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요. 표

    현은 섬세하고 감정에도 솔직하죠. 함께하면 곡을 준비하기 수월해요.”

    이시하라 린이 조금 못마땅한 듯 눈썹을 좁혔다.

    “공적인 자리라 그런 건 알지만 너 무 딱딱하지 않아? 좀 더 알콩달콩 하게 해주면 안 될까?”

    “무슨 뜻이에요?”

    “두 천재의 뽁짝대는 케미가 없잖아. 최지훈의 팬은 배도빈의 팬, 배도빈의 팬은 최지훈의 팬인 거 몰 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넘어가고. 그럼 진짜 중요한 문제! 찰스 브라움 악장이 갑작스레 입원을 한 정황이 알려졌는데 앞으로의 계획에는 무리가 없는 거야?”

    “치.”

    “치?”

    순간적으로 말실수를 할 뻔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정정했다.

    “찰스 브라움은 베를린 필하모닉 B에서 빼놓을 수 없어요. 그가 없다 면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을 수행 하는데 치명적이에요.”

    “치명적이다……. 그럼 병세는? 아 니, 무슨 병이야?”

    “아마 4라운드 때에는 복귀할 수 있을 거예요. 자세한 내용은 본인의 허락 없이 말하기 꺼려지네요.”

    “응.”

    이시하라 린이 대수롭지 않게 넘어 갔다. 아무래도 찰스 브라움이 어떻게 아픈지에 대한 것보다 복귀 여부 가 더 중요한 듯싶다.

    이후로 소소, 나윤희, 마르코 등 주요 단원들에 대한 질의응답을 가 졌고.

    식사를 하러 가는 도중에는 현재 일본에서 가장 기대하고 있다는 나 카무라 료코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베를린 필하모닉에 입단하고 나서 나카무라 료코의 소식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이야기가 없는데. 단원으로서 어 때?”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에요. 젊어서 그런지 의지가 강 하고 패기도 있고요.”

    “젊어서 그렇다니. 할아버지 같잖아.”

    “……그 부분은 그럼 빼주세요.”

    이시하라 린이 입맛을 다셨고 곧장 질문을 이었다.

    “사실 비올라가 그리 부각되는 악기는 아니라서 일본에서 거는 기대 에 비해 활약이 좀 적긴 한 것 같아. 네가 보기엔 어때? 앞으로 대성 할 수 있을까?”

    “료코의 비올라는 특별해요. 음량 과 음색부터 남다르죠. 비올라가 전 면에 나서는 악기가 아닌 건 맞지만 그게 나카무라 료코의 음악성을 가 리는 요인이 될 순 없어요.”

    나카무라 료코는 지금도 연습할 때 면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본다.

    다리를 잃고도 그 전보다 활발히 활동하는 나카무라의 딸답게 그런 강인한 의지를 지닌 연주자다.

    분명 빛을 보는 날이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나윤희와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악단에도 적응하기 시 작한 것 같으니까.

    식당에 들어서면 소란스러워질 것 이 뻔하기에 숙소로 삼은 호텔 라운 지로 향했다.

    적당히 주문을 하고 앉으니 이시하 라 린이 메모를 정리한 뒤 숨을 길 게 내쉬었다.

    “좋아. 멀리 출장 온 보람이 있었네.”

    “오케스트라 대전 일정 내내 있는 거예요?”

    “응. 그런 일이니까. 공부도 되고 좋아. 참, 너희 가족 정말 정체가 뭐니?”

    뜬금없는 질문이다.

    한쪽 눈썹을 들고 고개를 살짝 기 울이자 이시하라 린이 말을 이었다.

    “2월에 어머님께서 하신 전시회 말 이야. 대박은 아니지만 꽤 호평이던 데? 미술 쪽은 전문 분야가 아니라 잘 몰라도.”

    “ 아.”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께 깜짝 파티를 해준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그간 어머니께선 소소하게 화랑을 운영하시면서 그 안에서만 작품을 걸곤 하셨는데 욕심이 없으신지 전 시회는 잘 가지지 않으셨다.

    지인의 요청으로 한두 작품을 보내는 정도가 외부 활동의 전부였는데 어머니의 그림이 아까워 아버지와 함께 미술관을 빌려 어머니의 작품을 전시했었다.

    베를린의 전경이나 도진이나 내 그림이 꽤 많았는데 찾아온 사람들의 반응도 좋았고 어머니께서도 은근히 좋아하셨던지라 좋은 기억이다.

    “원래 촉망받는 인재셨대요. 너무 주목받는 게 부담스러워서 외부활동 은 거의 안 하시지만 지금도 그림은 자주 그리세요.”

    “아무래도 WH그룹의 장녀가 재능 도 있으니 그랬겠지. 나도 어렴풋이 기억은 나.”

    아직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다.

    “그런 부담 안 느끼는 네가 이상한 거고.”

    일반적으로는 그렇겠지.

    “주문하신 가지 샐러드와 오리 고 기가 들어간 리조또입니다.”

    식사가 나와 포크를 들었다.

    샐러드에 사용하는 드레싱은 평범 한 호텔이면서도 꽤 풍미가 있어 종 종 주문하곤 했다.

    이시하라 린도 입에 맞는 모양인지 감탄했다.

    “와, 여기 음식 괜찮다.”

    “아침으로 먹기에 좋더라고요.”

    “응. 정말.”

    적당히 배를 채우자 그녀가 문득 잊었던 것을 떠올린 모양인지 손뼉을 쳤다.

    “아, 어머님 이야기 말고도 있어. 배영빈 감독, 네 사촌이지?”

    “네.”

    이시하라 린이 배영빈에 대해 어떻게 아는지 신기하다.

    “어떻게 알아요?”

    “얼마 전에 일본에 매국노가 개봉 했거든.”

    “••••••네?”

    일본 국민 모두가 그럴 거라 생각 하지는 않지만 배영빈의 극장용 애 니메이션 ‘매국노’는 항일을 배경으로 했다.

    한국과 중국을 타깃으로 한 것인 만큼 일본에 개봉했다는 사실에 조

    금 놀랐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의식 있는 작품이지만 극우, 반한이 라는 정신 나간 일본인들에게 배영 빈이 고생해서 만들었고 푸르트벵글러와 진달래가 제작에 참가한 매국 노가 해코지라도 당할까 걱정되었다.

    “응. 엄청 인기 있더라니까. 정말 신기한 집안이야.”

    이건 또 무슨 말이지.

    의심하고 있자니 이시하라 린이 핸 드폰으로 무엇인가를 검색한 뒤 내게 보여주었다.

    “자, 봐.”

    일본의 커뮤니티 사이트다.

    ㄴ 봉달이 약간 루루슈 같다.

    ㄴ 일본 애니메가 쇠퇴하는 중에 한 국에선 이렇게 발전하고 있었네. 경각심을 가져야 함.

    ㄴ 그래봤자 지브리에 안 됨.

    ㄴ 뛰어난 작화와 감동적인 장면을 강조하는 음원이 수작.

    ㄴ 성우진 모두 신인급인데 의외로 좋다. 중국에서는 1,300만 명이 봤다지?

    ㄴ 야, 이 멍청이들아. 이거 일본 까는 거라고!

    ㄴ 그게 무슨 상관인데? 봉달이 멋있어!

    ‘봉다루 칵코이이’라는 댓글을 마 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이시하라 린을 보았다.

    “설명 좀 해주세요.”

    “ 뭘?”

    “좀 걱정되었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네요. 악플이 있긴 하지만서도.”

    “일본도 변하고 있으니까. 사실, 역 사 인식에 대해서는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선 그리 중요하지 않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던 만큼.”

    이시하라 린은 일본의 우민화 정책 에 대해 비판하면서, 범국가적 사기극을 일삼았던 전 수상의 퇴임 이후 변하기 시작한 일본에 대해 말했다.

    “이대로라면 일본은 고립될 거야. 결국에는 한국, 중국과 공존해야 하는데 말이지. 사실 예전의 망령 때 문에 손해 보는 것도 만만치 않아. 내막을 알고 보면 기가 차는 일도 많고. 그러니 우리도 조금씩 변화해 나가야겠지.”

    사카모토와 나카무라, 히무라 그리 고 이시하라 린과 같은 사람이 더 많이 생기길 바랄 뿐이다.

    “모두 네 덕분이야.”

    “뭐가요?”

    “희망을 안겨주었으니까.”

    또 희망이란다.

    “인식 자체가 바뀌었어. 전에도 말 한 적 있지만 일본 사람들은 네게 정말 고마워하고 있어. 너에 대한 관심과 감사가 대한민국으로 전해지 면서 조금씩 인식이 바뀐 거니, 이 러한 상황에 네 역할이 없다고 할 순 없겠지.”

    “본인 앞에서 그런 말을 잘도 하시 네요.”

    “어라? 지금 쑥스러워하는 거야? 정말? 그 도빈이가?”

    “시끄러워요.”

    음악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거창한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기쁜 일이다.

    “어렸을 땐 그렇게 귀여웠는데 요 즘 들어 엄청 시크해진 거 알아? 요요, 귀염둥이.”

    다음부턴 이시하라 린의 인터뷰는 30분 안으로 끝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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