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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261화 (261/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261화

57. 결여(6)

오렌지 주스 두 잔을 주문하고 앉았다.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한데 시간이 촉박한 것도 아니라 기다리니 점원 이 주스를 가져다주었다.

그것을 한 모금 마신 뒤에야 나윤희가 입을 뗐다.

“승희 언니한테 레몽 도네크 씨 이야기 들었어.”

“네.”

“지휘자가 되고 싶은데 그러지 못 해서 런던으로 가셨다고……. 혹시 이유 알고 있나 싶어서.”

푸르트벵글러의 부탁대로 레몽 도 네크가 자격과 실력 문제로 박탈되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은 모양이다.

이승희의 입장도 공감되는게 레몽 도네크의 이적은 그만큼 단원들에게 충격이었고.

그런 만큼 모두 그 일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단지 레몽 도네크가 연락을 받지 않았기에 알 수 없었을 뿐이다.

이승희도 그러했으니 사정을 알게 된 이상 어느 정도는 그들의 걱정을 달래주고 싶었을 터다.

그리고.

레몽 도네크에 대해선 그리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푸르트벵글러의 부탁을 받은 이상 그 이유 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이승희도 그 부분을 언급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윤희가 내게 묻는 것이 리라.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어요.”

"음."

잔을 쥐고 있는 나윤희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아마 입장 차이나. 그렇지 않으면 세프의 눈에 레몽 도네크 씨가 총 감독이 되는 게 적절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정확하다.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남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 않은 건지 눈치를 봐왔기 때문인지 나윤희는 주변 관찰을 잘하는 편이다.

상대의 기분을 이해하는 것도 말이다.

“그런가 보네.”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나윤희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숨기는 것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그걸 떠나서 푸르트벵글러의 제자를 향한 마지막 사랑을 지켜주 고 싶을 뿐이다.

“저번에 로비에서의 일 때문에 눈치챘어.”

“ 아.”

2라운드 세 번째 날, 로비에서 토스카니니, 레몽 도네크와 언쟁을 했을 때 알아챈 모양이다.

“사실 그 뒤로 단원들이 더 슬퍼해 서……. 대체 왜 레몽 도네크랑 그렇게 사이가 틀어졌는지 모르겠다 고.”

이승희가 굳이 ‘입장 차이’라고 말 한 이유가 그 때문이었나.

단원들이 기억하는 레몽 도네크와 그때의 모습은 확실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차이가 있었다.

“으으.”

나윤희가 다시금 머뭇거렸다.

“ 괜찮아요.”

“난 명확한 이유도 모르고,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게다가. 게 다가.”

“괜찮아요.”

또 조금 시간이 필요한 듯해 여유를 가지고 잔을 들었다.

이곳 오렌지 주스는 단맛이 무척 강 한 게 향만 첨가하고 설탕을 있는 대 로 넣은, 훌륭한 주스인 것 같다.

“……레몽 도네크 씨, 재, 재수 없어.”

“커 헉.”

사레가 들려 버렸다.

간신히 진정하고 고개를 들자 나윤희가 허둥지둥 물을 받아와 건네주었다.

어떻게든 잘해보고 싶다든지.

언제나처럼 기발한 발상으로 해결책을 내준다든지 할 줄 알았건만 설 마 그녀의 입에서 재수 없다는 말이 나올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편견이 생겼던 모양이다.

“괘, 괜찮아?”

“네. 괜찮아요.”

물을 마신 뒤 물었다.

“갑작스러워서 잠깐 놀랐는데 시원하네요. 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다른 것보다 함께했던 사람들에게 한마디 말도 없었다는 것이 그러했다.

그것이 그의 자존심인지는 모르겠으나 말이다.

“그, 그래서 단원들이 그런 사람 때문에 신경 쓰고 한숨 쉬고 악단 분위기는 자꾸만 우울해지고. 여, 연주에도 알게 모르게 지장이 생기는 게 조금.”

“네.”

“부당하다고 생각해.”

맞는 말이다.

어떠한 사유든 자기가 좋아서 떠났 고 짧게는 몇 년, 길게는 20년 가까이 함께했던 이들에게 일언반구도 없었던 사람이다.

그 전까지의 그가 좋은 모습을 보 여주었고 단원들도 그에게 의지했지만 그 행동이 결코 납득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푸르트벵글러나 단원들이나 지나치 게 감정적으로 반응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네요.”

“그래서 세프가 설득해 보고 싶어. 잊어야 할 과거는 잊고. 나, 나아가야 한다고.”

“베를린 필하모닉을 위해서라도?”

“으, 응.”

나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잠깐의 틈을 두고 또 말을 더듬었다.

“주, 주제넘었지?”

“아뇨.”

그럴 리가 없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베를린 필하모닉의 단원들은 모두 악단 운영 에 관해 주장할 수 있고, 누난 누구 보다도 멋진 제2바이올린 수석이니까요.”

푸르트벵글러를 만나야겠다.

“저도 도울게요.”

찰스 브라움이 입원한 병실에 들어 섰고 멀핀 과장에게서 사정을 전해 들은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이 일은 내 명예를 위해서라도 비 밀로 해줬으면 좋겠어.”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있는데 멀핀 과장이 심각하게 입을 뗐다.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 거 다 병원의 상술이야. 연주에는 지장 없으니 걱정 마. 단원 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브라움 씨……

나윤희가 찰스 브라움을 안타깝게 불렀다.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이 네게 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 우리의 문제고 최선을 다해야 해.”

찰스 브라움은 단호히 말했다.

“이런 일로 단원들이 흔들리게 할 순 없어. 그런 일 용납할 수 없다. 반드시 이 일은 비밀로 해주길 바란다.”

고개를 돌려 멀핀 과장을 보았다.

“앉아 있는 것도 힘든 거예요?”

“네. 그간 많이 참으셨나 봐요. 의 사 말로는 그러지 않아도 심각한데 여러 스트레스를 받아 악화되었다고 하네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진다.

“수술하면 회복은 얼마나 걸린대요?”

“개인차가 있어서 단언할 순 없지 만 일주일이나 그 이상까지도……

“그런 뒤에는 괜찮은 거예요?”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워 낙 심각한지라.”

찰스 브라움이 소리쳤다.

“수술 따위 안 받는다니까! 서서라 도 연주할 수 있어! 4라운드에 내가 아니면 누가 나선단 거야?”

“조용히 좀 해요!”

아픈 사람에게 화를 낼 수도 없어 가만히 있었는데 본인이 자꾸 의지를 태우니 나도 언성이 높아졌다.

4라운드 곡으로 준비한 스트라빈스 키의 발레곡 ‘The Firebird’는 찰스 브라움의 바이올린을 부각시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편곡한.

이번 대회 최고의 준비곡이었다.

찰스 브라움 말고 그것을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 상황에서 치질이라니.

더 이상 앉아 있을 수도 없다니.

“당장 수술 받아요. 3라운드 끝날 때까지 반드시 나아요.”

“안 받는다니까!”

“애처럼 굴지 마요! 비밀로 해줄 테니까!”

버럭 성을 내자 찰스 브라움이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비밀로 해준다는 말이 통한 건지 화를 내서 얌전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가 없으면 불새는 연주할 수 없다.

“멀핀, 제 말 기억하죠?”

“네.”

“오늘 당장에라도 수술 받게 해주 세요.”

문을 닫고 나오는데 나윤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찰스 브라움을 응원했다.

“히, 힘내세요.”

찰스 브라움은 대답하지 않았다.

OOTY 오케스트라 대전, 3라운드 조 추첨이 시작되었다.

콘서트홀에서 떨어진 대형 세미나 실에 모인 대회 운영진과 각 악단의 주요 인사 그리고 기자들이 저마다 감탄을 늘어놓았다.

“이쯤 되니 어딜 가도 안심할 수 없겠네.”

“그래? 난 그래도 3조랑 4조는 피 하고 싶을 거 같은데. 어떻게 해도 결국에는 암스테르담이나 시카고를 상대하게 되잖아.”

“1조와 2조는 어떻고. 빈 필하모닉 이랑 베를린 필하모닉 A가 어땠는지 벌써 잊었어?”

2라운드에서 최고 점수를 획득한 상위 4개 악단이 차례로 대형 스크 린에 표시되었다.

최고 점수를 획득한 빈 필하모닉이 1위로 첫 번째 자리를 장식했고 베를린 필하모닉 A, 암스테르담 로얄 콘세르트허바우 그리고 시카고 심포 니가 순서대로 시드 자리를 차지했다.

3라운드 맞대결에서 승리한 악단이 각 시드와 4강전을 펼치니 조 추첨 결과에 따라 양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 사회자가 무대에 올라섰다.

“OOTY 오케스트라 대전 3라운드 조 추첨 행상에 참가하신 내빈 여러 분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사회를 맡은 자르제입니다.”

각 테이블에 놓인 음식을 들며 담 소를 나누던 사람들이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식순을 간략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장님의 축사 뒤, 거장 사카모토 료이치의 축하 무대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오오.”

호화로운 OOTY 오케스트라 대전 참가진 중에 유일한 흠이라면 리빙 레전드 사카모토 료이치의 불참이었다.

지휘자로서든 피아니스트로서든 그 의 참가를 바라는 이가 많았고 모든 음악인에게 존경받는 그가 축하 무 대를 가진다는 소식에 모두 기뻐하였다.

“그런 뒤에는 각 악단의 지휘자께 서 알파벳순으로 무대에 올라 번호 가 적힌 공을 뽑도록 하겠습니다.”

이후 일정에 대해서도 설명한 뒤

사회자 자르제가 물러났고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장이 축사가 있었다.

모든 사람이 그의 말을 경청했고 동시에 속으로는 사카모토 료이치가 빨리 무대 위에 오르길 바랐다.

협회장도 그 분위기를 읽고는 웃으며 짧게 연설을 마쳤고 이내 음악인 들의 음악가, 사카모토 료이치가 무 대에 올랐다.

“조금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급 히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화장실에 다녀올 여유가 없었네요.”

사카모토 료이치의 농담에 분위기 가 풀어졌다.

“부탁을 받아 올라오긴 했는데 이렇게 대단한 분들 앞에서 연주를 하 려니 늙은 손이 조금 떨립니다. 해 서 도움을 좀 받고 싶은데.”

사카모토 료이치가 망설이지도 않고 무대 아래서 머핀을 먹으며 잔뜩 기대하고 있는 배도빈을 보았다.

사카모토의 시선을 따라 모든 이가 고개를 돌렸고 이내 더욱 반가워했다.

“도빈 군, 오랜만에 함께해 주게.”

장내는 순식간에 흥분되었다.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배도빈의 연주는 들을 기회가 없었는데, 베를린 필하모닉에 들어가서도 얼마 안 되 어 지휘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 전에 공백도 길었던 만큼 사람 들은 사카모토 료이치의 선물에 크게 기뻐했다.

배도빈 본인을 제외하고 말이다.

‘오랜만에 사카모토의 연주를 듣나 싶었는데.’

배도빈이 궁시렁대면서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무척 밝았다.

사카모토 료이치와의 협주가 기쁘 지 않을 리 없었다.

“뭐 할 거예요?”

“글쎄. 아, 부활은 어떤가.”

다시 태어나고 가장 처음 발표한 곡이다.

무대에서 연주한 지 꽤 오래되어 잘될까 싶기도 한데 피아노 3중주라 사카모토가 피아노, 내가 바이올린을 맡아도 첼로가 빈다.

고개를 돌리다가 소소, 나윤희와 함께 웃고 있는 이승희와 눈이 마주 쳤다.

부활을 녹음한 당사자가 있는데 고 민을 하다니.

웃으며 손짓하자 이승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올라왔다.

직원이 숨을 헐떡이며 바이올린과 첼로를 나와 이승희에게 각각 전해 주고는 내려갔다.

“엄청 부담스러운데.”

“껄껄.”

이게 얼마만인지.

두 사람과 시선을 교환하고 현을 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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