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260화
57. 결여(5)
다시금 로비로 내려온 아리엘은 두 남자를 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은 거만해 보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를 시중들고 있었다.
다소 어두운 금발을 뒤로 넘긴 중 년이 나서 아리엘에게 다가갔다. 그 의 얼굴에 여유가 가득했다.
“반갑네. 제임스 버만이라 하지.”
제임스 버만이 내민 손을 보고 아리엘은 그가 영국 재벌가와 같은 성을 쓰고 있음을 기억해냈다.
아리엘 얀스의 눈이 날카롭게 제임 스 버만에게로 향했다.
“버만 가문은 늦은 시간에 약속도 없이 방문하는가?”
아리엘이 악수를 받지 않은 채 제임스 버만을 경멸스럽게 보았다.
“입 조심해라. 이분은.”
“아아, 괜찮네.”
제임스 버만이 그의 사용인을 말린 뒤 웃어보였다.
“실례했군. 잠시 시간 좀 내주겠나?”
제임스 버만과 잠시 눈을 마주한 아리엘이 고개를 팩 하고 돌렸다.
“거절하지. 당신은 그리 유쾌한 사람이 아니야.”
“허.”
아리엘의 태도에 제임스 버만이 안타까워했다.
“임시라고는 하지만 한 단체를 대표하는 사람이 이럴 줄은 몰랐군.”
그러거나 말거나 아리엘 얀스는 돌아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의 등 뒤에서 제임스 버만이 중 얼 거렸다.
“사업 이야기를 듣지도 않다니. 이 래서야 구스타프 하나엘도 불쌍하 군. 믿고 일을 맡긴 녀석이 이렇게 어려서야……
모욕이었다.
아리엘 얀스가 다시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 화가 가득했고 품위를 위해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이야기는 들어주지, 버만 가문의 차남.”
성이 난 아리엘과 달리 제임스 버 만은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한적한 곳에 자리한 두 사람은 극 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리엘 얀스는 거만하게 턱을 살짝 들고 있는 제임스 버만을 몹시 불쾌 해했다.
“이렇게 시간을 내줘서 고맙네. 22 살이라 했던가? 화도 참을 줄 알고 내가 잠시 오해한 듯하군.”
“감히 날 평하려 들지 마라.”
제임스 버만은 날이 바짝 선 아리 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입을 열었다.
“오케스트라 대전에서 들려준 자네 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연주는 무척 인상 깊었네. 천재라더니 과연 젊은 나이에 구스타프 하나엘이 후 계자로 낙점할 만하더군.”
“날 평하려 들지 말라 했다.”
제임스 버만은 씩 하고 웃은 뒤 손짓했다. 그의 사용인이 그를 대신 해한 부의 서류를 아리엘 앞에 두었다.
아리엘 얀스는 그것에 시선조차 두 지 않았다.
“곧 인터플레이가 북미에 진출하 네. 읽어보면 알겠지만 여러 단체와 독점 계약을 맺었지. 다만 오케스트라는 자리를 비워뒀는데 마침 로스 앤젤레스 필하모닉이 좋겠더군. 어 떤가?”
“무슨 말을 하나 싶었더니 결국 그 런 이야기인가? 유럽에서의 참패와 그 이유를 이 내가 모를 거라 생각 했나?”
인터플레이의 무능함은 일부 사람 들에게만 알려진 일이 아니었다.
거대 자본으로 인수합병을 진행, 기업 규모를 단기간에 비정상적으로 부풀린 인터플레이는 하청을 주어 단가를 대폭 하락시켰다.
한때는 유럽 클래식 음악 시장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거대했지만 연이은 사건사고로 인해 지금은 여 러 악단과 유저가 등을 돌린 상황이었다.
가장 큰 장점이었던 고화질, 고음 질의 디지털 스트리밍 시스템에 접 속 오류, 음원 품질 문제 등이 연이 어 터졌고.
새롭게 등장한 플랫폼 이日의 공격 적인 마케팅에 인터플레이는 순식간 에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인터플레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알 수 없는 세력에게 공격받고 있다고 추측할 뿐,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인터플레이 그룹은 여기 저기서 터지는 문제를 수습할 수 없었고.
결국 제임스 버만이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 무능한 인력과 계열사를 쳐내고 재기를 준비 중이었다.
그렇게 선택한 시장이 영화, 공연 과 함께 발전한 북미였다.
순수 클래식 음악 소비량도 만만치 않았기에 인터플레이에게 있어 북미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좋은 시장이었다.
“과거에 연연해서야 발전이 없는 법이지. 여기, 이걸 보게.”
제임스 버만이 페이지를 넘겨 한 지점을 보였다.
그곳에는 맥스 스튜디오와의 계약 서 사본이 일부 내용이 삭제된 채 복사되어 있었다.
세이머즈 시리즈를 비롯하여 만화를 원작으로 한 각종 영화를 크게 성공시킨,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 제작사 중 한 곳이었다.
“보다시피 맥스 스튜디오와의 계약 이 체결되었네. 알고 있겠지만 매년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곳이지. 어떤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함께 한다면 그림이 멋지지 않겠는가?”
제임스 버만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라면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토마스 필스 사후.
구스타프 하나엘이 분투했지만 예전만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순수 음악으로도 유명했지만 영화와 오페라 등의 각종 공연과의 협업 이 잦았던 로스앤젤레스의 재정은 토마스 필수 이후 급속도로 안 좋아 졌다.
주축 멤버가 사망, 은퇴 등의 사유로 떠나면서 더 이상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과 함께할 만한 메리트가 사라진 것이었다.
그마저도 구스타프 하나엘이 쓰러 지면서 더욱 악화될 것은 분명.
젊은 후계자라면 거부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재정이 어려운 건 잘 알고 있네. 악단을 부 흥시키고 싶지 않은가?”
제임스 버만이 쐐기를 박았다.
그는 여전히 여유가 넘쳤다. 로스 앤젤레스 필하모닉을 시작으로 인터 플레이가 재기하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비록 과거에 비할 바는 아니나 LA는 여전히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으며 특히나 미국에서의 입지는 확고했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인터플레 이와 계약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클 리블랜드, 시카고, 보스턴과 같은 거 대 오케스트라와의 계약도 한결 수 월해질 터.
‘할 수밖에 없지.’
재정적 문제를 겪는 단체의 어린 지휘자를 구워삶는 일쯤이야 별것 아니었다.
공식 루트는 악단과 해야겠지만 이렇게 어설퍼 보여도 지휘자는 지휘자.
아리엘 얀스의 부담감을 자극해 아군으로 만들면 악단을 구슬리기에도 유리했다.
맥스 스튜디오와의 계약은 덤.
인터플레이와 맥스 스튜디오의 계약은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스트리밍 쪽 계약이었다.
음악 제작에 관여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단지 콘텐츠를 가진 업체 와 플랫폼의 계약일 뿐.
그러나 영화 음악 제작을 기반으로 했던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을 구슬 리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거짓말이었고.
로스앤젤레스와 클리블랜드, 시카 고, 보스턴을 계약한다면 이 계약을 통해 안면을 튼 맥스 스튜디오도 유 력 악단과 계약한 인터플레이에게 의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분명한 사기였지만.
동시에 제임스 버만은 그럴 수 있다고 확신했고 자신했다.
‘자, 어서.’
제임스 버만이 여유로운 태도를 고 수하며 아리엘을 보았다.
“싫다.”
아리엘 얀스가 퉁명스레 말했다.
“……뭐라고?”
“나와 단원들은 신의 계시를 받은 몸. 네 더러운 제안 따위를 받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니 썩 꺼져라.”
아리엘이 일어났다.
“네놈 덕분에 환상적이었던 오늘의 기분이 무색해지는군.”
까득.
제임스 버만이 이를 갈았다.
“잘 생각해라, 아리엘 얀스. 네 선택으로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부 흥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갈리게 된다. 어설픈 자존심을 내세울 때인 가?”
“더 이상 내 귀를 더럽히지 마라. 그 더러운 입에 내 고결한 이름을 담지도 마라. 하찮은 네 입이 움직 일 때마다 역겨워 참을 수가 없다.”
그러고는 어안이 벙벙한 제임스 버만을 두고 걸어가 웨이터에게 세면 대가 어디 있는지를 묻고는 그대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귀를 박박 씻어냈다.
오랜만에 푹 잔 덕분에 몸이 개운 했다.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하니 나윤희와 소소가 진달래를 닦달하고 있었다.
“어, 어제 어땠어?”
“바른 대로 말해.”
나윤희는 드물게 들뜬 모습이었고 소소는 용의자를 취조하는 것처럼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냥. 밥 먹고 걸었어.”
“진짜? 진짜 그게 다야?”
“……손도 잡았어.”
진달래의 말에 나윤희가 주먹을 쥐 고 두 손을 붕붕 휘둘렀다.
“사형이야.”
누구랑 손을 잡았는지는 모르겠지 만 소소는 무척 마음에 안 드는 듯 하다.
“아, 여기.”
진달래가 손을 흔들었고 자리하니 소소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 해주었다.
“정신병자가 달래 잡아가려 해.”
“정신병자요?”
“아리엘 얀스.”
고개를 돌리니 진달래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빵에 크림치즈를 얹고 있었다.
둘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불안하더 라니 결국에는 만나는 모양이다.
남의 연애사에 관여해서 좋은 일 하나 없기에 별다른 말은 않지만 불 안한 것도 사실.
다른 게 걱정되는 게 아니라 그놈 이 제정신인지가 가장 불안한 요소다.
“잘해줘?”
“응. 엄청 다정해.”
믿을 수 없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하는데 어쩔 수 없다.
화제를 돌렸다.
“악보는 수정 사항이 많지 않아요. 금방 끝날 거 같은데, 오늘 조 추첨 전에 찰스에게 가볼 거예요.”
“아, 나, 나도 같이 가도 될까?”
“그럼요.”
나윤희가 크림치즈를 챙겨주며 물었다. 덜어내 빵에 듬뿍 바르는데 진달래가 중얼거렸다.
“아…… 보고 싶다.”
빠져도 단단히 빠진 모양이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친 뒤 수석 연주자들과 함께 간단히 미팅을 가졌다.
신세계로부터는 처음 지휘했을 때 부터 지금까지 스무 번 가까이 공연 했던 만큼 레퍼토리도 다양했고 어 느 정도 확고해진 부분도 있었다.
덕분에 수정할 내용도 적었고 수석 연주자들의 이해도 빠른 편이라 크게 힘쓰지 않아도 되었다.
문제는 3라운드에서 맞상대할 곳이 어딘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점.
상대가 누구든 최선을 다해 연주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시간이 부족한 만큼 효율적으로 움직일 필요 가 있었다.
“그럼 저녁 때 봐요.”
“수고하셨습니다.”
단원들과 헤어지고 나윤희와 함께 찰스 브라움이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잘츠부르크의 거리는 여전히 관광 객으로 북적인다.
“저, 저기.”
“네.”
“……그게.”
“네.”
“네.”
나윤희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자꾸만 망설였다.
재촉할수록 말을 못 하는 그녀의 성 격을 아는지라 걷는 속도를 줄였다.
아마 단둘이 있을 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찰스 브라움에게 같이 가 자고 말했을 거다.
쉼호흡을 몇 번 한 나윤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레몽 도네크 씨 이야기인데. 주제 넘는 말인 거 같아서.”
“그런 사람 아니라는 거 알고 있어요. 오해하지 않아요.”
“ 아.”
나윤희가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 덕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이 반쯤 찬 카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앉아서 이야기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