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259화
57. 결여(4)
차명운과 헤어진 배도빈은 숙소까 지 걸으며 여러 생각을 정리했다.
악단을 세워 콘서트홀을 운영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고민했던 것이 조금 씩 명확해지고 있었다.
환경을 고려한다면 유럽이 적절했다.
다른 것보다 우수한 단원을 모집하 기에 유럽보다 나은 환경은 없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의 대부분이 결국 에는 유럽을 본 무대로 잡는 만큼 루트비히 오케스트라도 그에 따를 필요가 있었다.
연주자 없이 악단을 시작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배도빈은 본인의 음악적 가치라면 어디든 따라올 사람이 있을 거라 확신했지만.
모든 단원을 음악의 주 무대에서 벗어나도록 구성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지역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상대적으로 적을 뿐.
그곳에도 분명 음악을 사랑하는 이 들이 있으니 말이다.
본래 고집이 세고 음악에 한해서는 끝없이 욕심을 부렸던 배도빈은 활 동 무대를 정하는 일에도 타협하지 않았다.
물론 고민은 있었다.
디지털 스트리밍 서비스의 품질이 크게 향상되며 베를린 환상곡, 찰스 브라움, 투란도트 등을 크게 성공하는 것을 경험한 배도빈은 여러 안건을 두고 저울질을 해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연주자에게도 관객에게도 공연의 가치를 다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음악을 듣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가야지.’
배도빈은 14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고 있던 시기였고 그런 탓에 온전한 형태로 삽입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화 음악에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을 때였다.
‘내가 자네를 가르칠 순 없지만, 자네의 음악이 필요한 곳을 알려줄 순 있을 것 같네.’
‘도빈 군은 아직 잘 모를 수 있겠지만 훌륭한 곡은 비로소 그 자리를 찾아야 한다네. 그 위대한 모차르트 와 베토벤의 곡이 수백 편의 영화에 사용되었다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자네의 음악이 필요한 영화가 있네. 함께해 주게.’
***
‘능숙하단 말이야.’
배도빈은 당시 사카모토 료이치가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영화의 우수함, 수익성 등 다른 불필요한 말은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저 배도빈의 음악이 필요하다는 말을 풀어서, 반복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배도빈의 마음을 움직이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음악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 그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자신의 음악이 온전히 이해받고 그 가치가 받아들여져 필요시 된다면 그보다 큰 기쁨은 없었다.
특히나 배도빈에게 있어 음악이란 살아가는 이유이자 존재를 입증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더욱이.
연간 200억 원에 달하는 개인 수 입이 발생하고, 지금은 업계에서 가 장 활발히 활동 중인 샛별 엔터테인 먼트의 소유주로서 얻는 수입이 추 가된 현재.
더욱이 시가총액 890조 원에 달하는 EI그룹을 등에 업은 배도빈은 본 인과 가족의 삶을 유지하는 데 아무 런 지장이 없었다.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면서 적절한 수입이 보장되고, 우수한 단원들에 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수입은 크게 바라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음악이 필요한 이들에 게 자신의 음악을 들려주는 것.
그것만이 그 어떤 조건보다 앞서 있었다.
‘비행기부터 사야겠는데.’
배도빈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아니지.’
보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크루즈도 살까? 바다 위의 오케스트라. ……이쪽이 더 재밌을 것 같네.’
다시 걷기 시작한 배도빈이 하품을 하며 숙소로 들어섰다.
한편 진달래는 아리엘 핀 얀스로부 터 초대받아 잘츠부르크의 잭도날드를 찾았다.
빅덕으로 간단하게 저녁을 때우던 관광객과 현지인들은 아리엘 얀스가 매장 안에 들어선 순간 고소한 치즈 향과 육즙이 흐르는 두 개의 고기 패티 그리고 푹신한 빵을 문 채 그 대로 굳어버렸다.
그가 들어선 순간 장미향이 나는 듯한 착각을 할 정도로 아리엘 얀스의 외모에 매혹되어 버렸다.
“몹시 허하군. 이 몸의 허기를 달 랠 만한 메뉴가 있는가?”
“아…… 그게.”
넋을 놓고 아리엘을 보던 종업원이 ‘빅덕 같은 걸 어떻게 바치라는 거야’라는 생각에 망설이고 있을 때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항상 먹던 것이 좋겠군. 빅 덕 세트를 주문하지. 이 레이디에게 도 같은 걸 주도록. 셰프에게 각별 히 신경 써줄 것을 전해주게. 아, 포크와 나이프도.”
“셰, 셰프요?”
아리엘이 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 여 보이자 종업원이 망설이다 조리 실에 대고 말했다.
“셰, 셰프님! 홀에 빅덕 세트 두 개요! 각별히 신경 써주세요!”
“뭔 미친 소리야?”
만족스럽게 값을 지불한 아리엘은 빅덕 세트 두 개를 수령해, 진달래를 정중히 에스코트하여 자리를 잡았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벽의 여신이여.”
“아, 아니. 불러줘서 고마워.”
진달래가 손을 저었다.
평소와 다르게 아리엘 앞에만 서면 조심스러워졌다.
아리엘 얀스는 진달래를 마치 공주 처럼 대했는데, 진달래에게 있어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상상에서도 그런 사람은 없었고 손을 잃은 뒤로는 더더욱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면역이 없는 상황에서 아리엘 얀스의 저돌적이면서도 정신 나간 대우는 진달래의 취향을 직격했다.
“슈만 정말 머, 멋있었어.”
진달래가 햄버거를 물기 전에 말했다.
그 말에 아리엘이 왼손을 얼굴 앞으로 들어 손등은 진달래에게 향했다.
자연스럽게 위치한 다섯 손가락이 아리엘의 얼굴을 감쌌고 그는 씩 하고 웃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역시 여신께선 알아봐 주시는군요. 이 아리엘, 슈만의 시를 표현하 기 위해 여러 밤을 보냈습니다. 1악 장의 경우에는……
음악을 배우고는 있지만 기악에 관한 것이 아니었기에 진달래는 아리 엘의 말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항상 자신감에 차 있고 자신의 음악을 당당히 말하는 모습은 무척 매력적으로 보였다.
진달래 본인도 그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
‘조금 닮은 거 같아.’
진달래는 아리엘 핀 얀스와 만나면 서 배도빈과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사람 다 자신의 음악에 확고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말 하는 데 있어 망설임이지 않았다.
2라운드에서 탈락했지만 그런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다음에는 슈 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어떻게 연주 하겠다고 말하는 아리엘 핀 얀스의 음악을 향한 열정은 분명 진달래에 게 큰 자극이 되었다.
‘조금 별나긴 해도 뭐 어때.’
정말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혹시 입에 안 맞으십니까?”
“아, 아니. 나 햄버거 좋아해.”
진달래가 빅덕을 양껏 입에 물었다.
그러면서도 의문이 들었는데 마치 베르사유의 가장 화려한 방에 누워 포도를 먹을 것처럼 생긴 아리엘이 잭도날드를 좋아할 거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포크와 나이프로 빅덕을 썰어 먹는 아리엘을 보며 진달래가 물었다.
“햄버거 좋아해?”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이 냅킨으로 입 주변을 꾹꾹 눌러 닦은 뒤 입을 열었다.
“좋아합니다. 빵과 야채 그리고 고 기 사이에 스며든 농밀한 소스. 씹 을수록 고소하게 올라오는 풍미는 가히 신이 내린 은총이죠.”
“의외다. 난 저녁 먹으러 가자고 해서 엄청 부담스러운 곳일 거라 걱 정했거든.”
아리엘이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요리든 물건이든 결국 어떤 사람 이 쓰는지에 따라 다르지요. 추악한 사람이 1만 달러의 시계를 찬다 해 서 품격이 높아지는 게 아닌 것처럼요. 그런 의미에서 저와 여신께서
드시고 있는 이 빅덕의 가치는 금보다 중합니다.”
진달래가 웃었다.
남들이 들었을 때는 정신 나간 소리로 치부하겠지만 적어도 진달래는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고 당당하게 말하는 아리엘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여러모로 의외인 구석이 많았다.
특히 귀공자처럼 보이면서도 상당히 검소해 보였다.
세 번을 만났지만 항상 깔끔하게 다림질한 같은 옷을 입고 있었고 시 계라든가 사치품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잘츠부르크 교외로 나갈 때는 대중 교통을 이용했고 함부로 돈을 쓰는 법이 없었다.
처음에는 외모에 이끌렸던 아리엘을 더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원래 검소한 편이야?”
질문을 받은 아리엘 얀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얀스 가문의 오랜 전통인지라.”
“ 전통?”
아리엘 얀스가 항상 그랬던 것보다 더욱 자부심 있게 말했다.
“재화를 쌓아두지 마라. 가능한 베 풀어라. 8대조 제르민 얀스 백작께 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리엘이 빅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가 100달러의 저녁 대신 4달라 의 빅덕을 먹음으로써 조국의 가난 한 이들은 따뜻한 하루를 보내겠죠. 저는 고결한 얀스 가문의 일원으로 서 품위를 유지하되 주변을 도울 명 예를 지키고 있습니다.”
대대로 라트비아의 귀족이었던 얀 스가는 물려받은 재산이 없기로 유명했다.
그들의 성도 이미 오래 전 국가에 넘어갔으며 수많은 천재를 배출했음에도 가문이 지닌 재력은 형편없었다.
마리 얀스와 같이 크게 성공한 이 들이 제법 있었음에도 모두 라트비아의 어려운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리엘 얀스가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에서 받는 연봉은 25만 달러.
부족함이 없었으나 그는 가훈을 자랑스레 여겨 수입의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하였다.
그러면서도 품격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 직접 옷을 다리고 구두를 닦았으며 사치품을 쓰지 않는 내에서 외 모를 가꾸었다.
“ 멋있다……
진달래가 무심코 감탄했다.
“크흠.”
아리엘이 드물게 얼굴을 붉혔기에 진달래는 조금 재밌다고 생각했다.
“진짜 멋있어. 난 항상 같은 옷 입 어서 그게 여러 벌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매일 아침, 자신을 돌아보는 의식 이지요.”
아리엘을 보는 진달래의 눈이 더욱 따뜻해졌다.
“아, 도빈이도 기부 많이 하던데. 둘이 닮은 거 같아.”
“그 마왕과 닮았다니. 짓궂은 면도 있으시군요.”
아리엘이 어깨를 으쓱인 뒤 나이프를 쥐었다. 그리고 문득 진달래를 보며 말했다.
“그러는 여신께서도 매번 같은 티를 입고 다니시네요.”
“어? 내가?”
진달래가 자기가 입은 옷을 살폈다.
좋은 옷은 아니지만 같은 옷을 매 번 입고 다니지는 않았기에 의아해 하고 있을 때 아리엘이 웃으며 말했다.
“프리티.”
아재 개그라니.
‘진짜 닮았네.’
“그게 뭐야.”
진달래가 웃으며 아리엘을 타박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잘츠부르크 의 저녁을 음미하며 걸었다.
진달래의 발은 가벼웠다.
아리엘은 끊임없이 떠들었다.
그러다가 잘츠부르크의 멋진 야경을 맞이했을 때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 지 않았다.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이 적막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온전히 느끼고 있었다.
항상 흰 장갑을 끼고 있던 아리엘은 맨손이었고 그것은 의수를 뺀 진달래 의 손목을 조심스레 쥐고 있었다.
“다시 만나는 날까지 부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응. 꼭 또 만나.”
두 사람은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 뒤 헤어졌다.
잠시 뒤.
진달래와의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아리엘 얀스는 내일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채비했다.
진달래가 미성년자라는 것을 알게 된 뒤로 일찍 귀가했기에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때 인터폰이 울렸다.
“네.”
-편안한 시간 보내고 계십니까? 라인 호텔 로비입니다. 아리엘 핀 얀스 고객님을 찾으시는 분이 로비에 계셔 서 안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