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58화 (258/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58화

    57. 결여(3)

    식사를 마치고.

    대회 주최 측에서 마련해 준 연습 실에서 미팅을 가졌다.

    첫 번째 안건은 2라운드의 반성회. 두 번째 안건은 갑작스레 추가해야 하는 프로그램을 무엇으로 할지에 대한 문제였다.

    사실 최지훈과 함께한 차이코프스 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지적할 만 한 부분이 적어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코멘트를 마치고 곧장 다음 이야기를 꺼냈다.

    “멀핀, 3라운드 일정이 어떻게 되 나요?”

    “내일 하루 쉬고 모레 조 추첨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추첨 후 3일간의 준비 기간이 주어지고요.”

    “3 일••••••

    “곡은 자유 선정할 수 있어요.”

    그나마 다행이다.

    조 추첨일까지 4일이 남았다고는 하지만 새로운 곡을 준비할 수 있을 만한 시간은 아니다.

    OOTY 오케스트라 대전가 단기간에 역량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클래식 음악의 지속적인 발전이니만 큼 그렇게 진행하는 듯한데.

    아무래도 평소 실력으로 승부를 봐야 할 것 같다.

    조건은 다른 악단도 마찬가지.

    “기존 레퍼토리에서 정하는 게 좋겠네요. 자유롭게 건의해 주세요.”

    “드보르자크 9번은 어떨까요?”

    확실히 신세계로부터는 경험이 많은 곡이다.

    B의 지휘봉을 잡은 뒤로 가장 많이 연주한 곡이기도 하니 가장 먼저 고려할 만하다.

    3라운드에 악장으로 나설 소소에게 가장 먼저 물었다.

    “어때요?”

    “좋아.”

    소소는 항상 그래왔듯 덤덤하게 답했다.

    실력을 갖췄으니 가능한 일이라 찰스 브라움, 나윤희와 함께 B에서 가 장 의지가 된다.

    “찰스는 어떻게 생각해요?”

    고개를 돌리니 찰스 브라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

    “……어디 아파요?”

    그의 얼굴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창백해 보이는 게 당장에라도 누워야 할 것 같다.

    어제 저녁 식사 자리에도 참가하지 않았던 것이 떠올라 걱정되었다.

    “별거 아냐. 괜찮네. 소소랑 단원들 만 괜찮으면 좋을 것 같은데?”

    찰스 브라움이 애써 웃어보였고 그 때문에 나도 단원들도 더 걱정하게 되었다.

    “그럼 드로브자크 9번으로 가겠습니다. 섹션별 퍼스트들은 내일 오후에 잠시 숙소 로비에 모여주세요.”

    자주 연주하는 곡이라고는 하지만 그대로 할 수도 없는 법, 내게도 조금의 시간은 필요하다.

    각 악기에 자세히 전달할 시간이 부족한 만큼 수석 연주자들의 역할을 기대해 본다.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죠.”

    “수고하셨습니다.”

    해산을 알리고 찰스 브라움에게 다 가가니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보 통 일이 아니라는 건 바보인 찰스 본인도 잘 알 거다.

    “왜?”

    “언제부터 그랬어요?”

    “뭐가?”

    답하지 않자 찰스가 고개를 저었다.

    “진짜 별일 아냐. 좀 피곤한 것 같아. 오늘 쉬면 괜찮아질 거야. …… 정말이래도 그러네?”

    “멀 핀.”

    “네, 악장.”

    “찰스랑 병원에 좀 다녀와 주세요.”

    “아, 네.”

    “괜찮다니까!”

    “책임지고 확실히 진료받게 해주세요. 이상한 변명 같은 거 무시하셔 도 좋아요. 마흔이나 먹고 혼자서 병원도 안 가는 멍청이 말 들어줄 필요 없어요.”

    “뭐, 뭐? 멍청이?”

    “카일! 잠깐만 도와줘. 찰스 악장, 가시죠.”

    찰스 브라움이 쓸데없이 저항했지 만 멀핀 과장과 카일 대리가 야무지게 그를 연행했다.

    3라운드를 진행하게 되면서 어긋나 게 되었지만 본래 결승에서 주인공을 맡아줄 예정이었기에 그에게 문 제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대체 왜 다들 자기 건강을 과신하는 거야.’

    쭉 느낀 거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 일수록 자기 몸을 생각지 않는 경향이 있다.

    홍승일도 그랬고 토마스 필스, 푸르트벵글러도 모두 그러했다.

    “애도 아니고.”

    고집이라도 부려 제대로 진료받지 않으면 강제로 MRI에 처넣어버릴 생각을 하며 궁시렁댔는데 옆에서 나윤희가 웃었다.

    의아해서 돌아보니 그녀가 아 하고 소리 냈다.

    “미, 미안.”

    “사과할 일 아니에요. 그냥 왜 웃는지 궁금했을 뿐이에요.”

    “그게…… 보기 좋아서. 찰스 브라움 악장님도 귀여운 면이 있으신 것 같아.”

    나윤희가 보기에도 찰스가 한심해 보인 모양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래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 한 분야의 천재는 자기 관 리 못 하는 것 같아. 세프도 그러셔 서 많이 걱정했었고.”

    “ 맞아요.”

    정말 격하게 공감한다.

    조금이라도 건강히 오래 살 생각을 해야지 허구한 날 술과 담배를 하니 매일 14시간 이상 연습하면서 무리한 몸이 버틸 리가 있나.

    금연과 금주 그리고 브로콜리를 먹 기 시작한 푸르트벵글러가 그나마 다행이다.

    “베토벤도 그랬고.”

    한 대 얻어맞은 것 같다.

    의외의 공격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짐을 쌌는데 소소가 다가와 같이 돌 아가자고 권유했다.

    “도빈, 윤희. 돌아가자.”

    “저는 들릴 곳이 있어요. 먼저 가세요;’

    “들릴 곳?”

    “네. 오랜만인데 대회 때문에 인사도 못 했거든요.”

    2라운드 종료 후 각 악단에게 하 루간의 휴식이 주어졌다.

    진출에 실패한 악단들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각 지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아쉽게 탈락한 대한국립교향악단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산이 빠듯했기에 조금이라도 서 둘러 귀국해야만 했다.

    숙소는 발자국 소리와 짐을 담는 소리만이 날 뿐, 대화 소리는 들리 지 않았다.

    간혹 누군가를 부르더라도 잠긴 목 소리였고 그마저도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대한국립교향악단이 1 라운드를 돌파할 거라 생각지 않았으나 본인들만은 반드시 4강에 이르 자고 굳게 다짐했고.

    그것을 위해 피와 땀을 흘렸던 만큼 분하고 또 분했다.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 대한국립교 향악단의 2라운드 진출은 기적이 아 니었다.

    지휘자 차명운은 말없이 움직이는 단원들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다들 속이 상했겠지.’

    차명운 본인도 의연한 척하고는 있지만 속이 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한민국의 클래식 음악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했던 그 들은 조금씩 성과를 내고 있었다.

    유럽에서도 조금씩 인지도를 쌓았고 UN본부에서 공연도 하며 영국 BBC 프롬스 등 여러 축제에 초청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직 세계 정상의 무대에 서기에는 부족했음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 멀구나.’

    차명운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지휘자로서 전 유럽에서 존경 받았지만 대한국립교향악단이 그런 대우를 받기에는 너무나 멀게만 느껴 졌다.

    ‘좀 더 잘 준비할 수 있었을 것을.’

    차명운은 그것을 자신의 미숙함으로 돌리며 여태 잘 따라와 준 단원 들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 마음이 그를 괴롭히는 것은 차명운 본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똑똑“

    그때 대한국립교향악단의 직원이 차명운을 찾았다.

    “네. 들어와요.”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배도빈 군인데 어떻게 할까요?”

    “도빈 군이? 안내해 주세요. 아니. 제가 내려가죠. 수고했어요.”

    의외의 방문이었지만 차명운은 반 가운 마음에 직접 나섰다.

    벌써 꽤 오래된 일이었지만 추석 명절에 살리에리를 함께 연주했던 기억이 선명했다.

    또 다소 난감할 수 있었던 차명운 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여 주기도 했었다.

    그것이 너무 고마워, 배도빈이 음악 유망주들에게 무료로 특강을 해 주었던 일은 잊을 수 없었다.

    더욱이 대한민국의 클래식 음악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자 하는 그의 소 망을 실현시킨 인물이기도 하니 차명운에게 배도빈은 더없이 반가운 존재였다.

    서둘러 로비로 내려온 차명운이 크게 웃으며 배도빈에게 다가갔다.

    “오오. 잘 왔어요, 도빈 군.”

    “건강하신 거 같네요.”

    “하하. 나이는 못 속이지요. 자, 올라갑시다.”

    차명운의 개인 방에 이른 두 사람 은 간단히 안부를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가요?”

    “아직 공개할 만한 일은 아니에요.”

    비밀을 지켜달라는 말이라는 걸 못 알아들을 차명운이 아니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배도빈이 본 론을 꺼냈다.

    “한국에 오케스트라를 만들 생각이 에요. 대한국립교향을 이끌어 오신 분에게 조언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서요. 전 한국의 상황을 잘 모르니 까요.”

    “음?”

    배도빈의 말을 들은 차명운은 굳게 신뢰해 온 자신의 귀를 의심해 버리 고 말았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배도빈이 합류한 첫 기자회견에서부터 그를 후계자로 낙점한 듯 행동했었다.

    더욱이 베를린 필하모닉은 세계 최 고의 오케스트라 중 하나로, 배도빈 이 추구하는 음악을 가장 잘 소화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음악 시장이 큰 유럽의 중심에 있기도 했고 뛰어난 연주자를 다수 보 유했으며 팬 층도 두터웠다.

    배도빈이라는 세기의 천재가 활동 하기에 그보다 좋은 환경은 찾기 힘 들었다.

    “굳이 한국으로 오려는 이유가 있나요?”

    차명운은 만약 배도빈이 자신과 같이 역사적, 사회적 의무감으로 행동 하려 한다면 말릴 생각이었다.

    그런 일은 하고 싶은 일을 충분히 한 뒤라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배도빈이 합류한다면 분명 대한민 국의 음악이 더욱 발전하고 시장이 증대될 것은 분명하지만 벌써부터 그런 무거운 짐을 지길 바라진 않았다.

    본인이 걸어 온 길이기에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았다.

    "음..."

    배도빈이 대답을 망설이자 차명운이 말을 이었다.

    “도빈 군이 한국에 온다면 분명 기 업이든 국가적으로든 여러 면에서 지원도 생기겠지요. 아마 학생들에 게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지금도 제 제자들이 예전 도빈 군의 특강에 대해 종종 말하곤 해요.”

    배도빈은 잠자코 차명운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저는 그렇다고 도빈 군이 본인을 희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 합니다. 사정이 나아지긴 했어도 지 금도 많은 악단이 재정 독립을 못 하고 있어요. 한국에서 베를린 필하모닉과 같은 악단을 꾸리기엔 제약

    사항이 많습니다. 연주자들도 유럽 과 아메리카를 두고 한국에 올 필요 성을 못 느낄 테죠.”

    차명운이 고개를 저었다.

    “홍 선배가 죽기 전에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홍 선배는 그 지경에 있으면서도 도빈 군이 대한민국의, 아니, 클래식 음악계의 희망이라 말 했었죠. 하지만 그분도 도빈 군이 이렇게 본인을 희생하길 바라진 않았습니다.”

    홍승일이 죽기 직전을 떠올린 차명 운이 그리운 듯 말했다.

    “도빈 군이 하고 싶은 음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계속 음악을 할 수 있게 하는 일이야말로 많은 사람 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고 말했죠. 마치 유언처럼 같은 말을 반복 하셨습니다. 도빈 군, 혹시 국내 언 론이나 주변 사람들에게서 그런 이 야기를 들어 생각한 거라면 그럴 필 요 없어요.”

    배도빈이 작게 웃었다.

    온갖 찬란한 수식어를 붙이고 상황을 강요하는 사람은 많았어도 차명운과 같이 말하는 가까운 지인 외에는 없었다.

    “그런 거 아니니 걱정 마세요.”

    그러나 그의 오해는 풀어줘야 대화가 진행될 듯하여 배도빈은 입을 열었다.

    “단원, 환경, 구조까지 모두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최고의 음악을 하는 건 오랜 꿈 이었어요.”

    “아.”

    차명운이 작게 소리 냈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른 규모라 선뜻 어떤 느낌인지 그려지지 않았다.

    “굳이 한국에 국한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되도록 한국에서도 활동 하고 싶어요.”

    “흐음. 달리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배도빈은 잠시 뜸을 들였다.

    “……예전에 편지를 받았어요.”

    "응?"

    “은평구에 사는 사람인데 두 딸이 제 팬이래요. 언젠가는 제 공연을 들으러 베를린에 오고 싶다는데, 노 동하는 분이 그럴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

    “과대망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언젠가 제 공연을 들으러 올것을 생각하며 하루를 또 살겠죠. 제 음악이 필요한 곳이라면 가고 싶다는 마음이에요.”

    차명운은 배도빈의 고결한 정신에 감탄하면서도 현실적인 문제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음악이 필요한 곳에 간다.

    그 생각은 너무도 깨끗했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악단을 운영해 나가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부정해도 수입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좋은 연주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빈 군……

    “그래서 이것저것 생각해 봤는데, 오늘도 그걸 확신하기 위해 찾은 거였어요.”

    “음?”

    “한국에서만 있는 건 역시 힘들다는 뜻이죠?”

    “……안타깝게도 지원이 없으면 힘 들죠. 하지만 도빈 군이라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베를린 필하모닉과 같이 운영은 불가능해도.”

    차명운의 조심스럽고 상냥한, 그러 나 현실적인 대답을 들은 배도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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