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57화 (257/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57화

    57. 결여(2)

    OOTY 오케스트라 대전 2라운드 마지막 날.

    첫 번째 순서로 나선 빈 필하모닉 과 크리스틴 지메르만은 박수갈채를 받으며 연주를 준비했다.

    현존하는 오케스트라 중 언제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빈 필하모닉과 피아니스트로서는 역사상 가장 완벽 하다고 일컬어지는 크리스틴 지메르 만의 만남은 그것만으로도 큰 기대를 끌 만했다.

    “지메르만은 여전히 기품이 있네요.”

    “음. 정말 멋진 분이시지.”

    정세윤 기자는 피아노 앞에 앉은 크리스틴 지메르만의 우아한 자태에 감탄했고 이필호도 그에 공감하였다.

    ‘연주는 연주자가 무대에 오른 순간부터.’

    한편 차채은은 자신의 칼럼 독자들에게 무대 분위기를 가능한 생생하 게 전달하고자 펜을 놀리고 있었다.

    그것을 유심히 살피던 한이슬 칼럼 니스트가 차채은에게 말을 걸었다.

    “그거 아니?”

    ‘왜 친한 척하는 거야.’

    어제 이후로 ‘싫은 사람’이라고 생 각해 버렸기에 상냥하게 웃고 있는 한이슬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대놓고 말을 거는데 무시할 수도 없어 차채은은 떨떠름하게 물었다.

    “..뭘요?”

    “크리스틴 지메르만은 본인 피아노를 가지고 다녀. 봐.”

    차채은이 무심코 피아노를 보니 과연 지금까지 무대에서 사용되었던 피아노와는 달랐다.

    스타인웨이&선스.

    유명 피아노 브랜드에서 크리스틴 지메르만을 위해 만든 유일한 피아노였다.

    “대단하지?”

    차채은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이슬이 이야기를 풀었다.

    “다른 곡을 연주할 때는 가지고 다니지 않지만, 고전과 낭만 시대 때 의 곡은 저걸로 연주한다나 봐.”

    차채은은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굳 이 한이슬을 말을 끊지 않았다.

    무결점의 피아니스트라는 크리스티 안 지메르만에 대한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저렇게 가지고 다녀서 생긴 일화 도 많은데 예전에는 접착제 때문에 나는 냄새 때문에 폐기되기도 했어.”

    “너무해.”

    “그치? 911테러 직후라서 미국에 서도 어쩔 수 없었나 봐. 접착제에서 화학약품 냄새가 났다나? 그래서 그 뒤로는 분해해서 가지고 다닌 대.”

    “번거로울 텐데.”

    “응. 하지만 완벽을 기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되지 않아? 본인이 직접 조율까지 한대.”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던 차채은은 순간 자신이 왜 한이슬과 친한 듯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알 수 없어 졌다.

    고개를 돌리고 다시 펜을 쥐었는데 방금 한이슬에게 들은 이야기를 작게 메모했다.

    그 모습을 보던 한이슬은 작게 웃 고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무대 위로 시선을 옮겼다.

    칼 에케르트라는 걸출한 지휘자가 이끄는 빈 필하모닉과 크리스틴 지 메르만이 준비한 곡은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

    19살의 그가 무려 20년 가까이에 걸쳐 완성시킨 곡으로.

    그 전까지의 고전적 형태를 완전히 타파하고 피아노의 가능성을 유감없이 펼쳐낸 리스트의 역작 중 하나였다.

    연주가 시작되었다.

    칼 에케르트의 오케스트라가 무겁게 시작을 알렸고 지메르만의 피아노도 그에 지지 않고 어울렸다.

    긴장된 분위기는 섬세하게 표현되었고 특히나 지메르만의 피아노는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무엇인 지 정확히 들려주었다.

    차분한 꽃잎들이 모여 화사하게 이뤄낸 정원을 보는 듯.

    멀리서도 가까이서도 아름다웠다.

    관객들에게는 그녀의 우아한 자태 가 한 떨기 꽃으로 보일 정도였다.

    이 공연을 기대하고 있던 배도빈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낭만적 악상에 몸을 맡겨 정원을 거닐었다.

    ‘멋진 곡이지.’

    그는 이 환상적인 곡을 만들어낸 프란츠 리스트가 얼마나 혁신적인 인물이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본인과 마찬가지로 그 전까지의 형 식을 탈피하고자 노력했던 것이 곡 여러 부분에서 느껴졌다.

    ‘피아노를 가지고 다녔다고 했나.’

    배도빈은 대학에서 재미 삼아 들은 일화를 떠올렸다.

    당시 리스트는 건반의 파가니니라 불리고 귀족 중에서는 그의 연주를 듣고 실신한 사람이 있을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배도빈은 ‘그 정도쯤이야’라고 생각했지만 프란츠 리스트의 한 일화 에서는 관심을 가졌었다.

    티켓을 구하지 못한 이들이 아쉬워 하자 피아노를 가지고 다녔던 프란 츠 리스트는 기차에서 피아노를 내 려다 역 앞에서 즉석으로 공연을 했다고 한다.

    그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고 금세 역전은 리스트의 콘서트홀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어울려.’

    배도빈은 크리스틴 지메르만의 연주를 들으며 리스트가 살아 있다면 아마 저런 형태로 연주하지 않았을 까 하고 생각했다.

    완벽에 대한 병적인 집착과 무결점 의 연주.

    많은 사람이 크리스틴 지메르만 하 면 쇼팽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배도빈은 리스트의 곡이야말로 그녀에 게 가장 어울리는 옷이라 생각했다.

    ‘좋다.’

    배도빈이 점차 고조되는 오케스트라의 중후한 울림을 들으며 숨을 길 게 내쉬었다.

    2라운드 마지막 조의 결과는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임 지휘자는 아니었으나 빈 필하모닉과 오랜 세월 함께했던 칼 에케 르트는 능숙하였고 현존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인 크리스틴 지메 르만은 완벽했다.

    이후 3개 악단이 훌륭한 연주를 펼쳤으나 첫 번째 연주에 묻히는 일 은 어쩔 수 없었고 그 결과가 그대 로 반영되었다.

    빈 필하모닉

    심사 위원단: 30(300점)

    팬 투표: 49.8(2,021,017표)

    합계 79.8점(1위)

    2라운드 들어 최고 점수가 갱신되는 순간이었고 세계 최고의 24개 악단이 모인 자리에서의 득점이었던 만큼 파문은 클 수밖에 없었다.

    ㄴ 미쳤다곤 생각했지만 진짜 도라이급으로 미친 수준이네.

    ㄴ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진짜 크리스틴 지메르만 개쩔었음.

    ㄴ 솔직히 마지막 조가 널널한 것도 컸지. 암스테르담, 베를린, 런던이 함께했던 3조 같은 경우도 있었잖아. 1조랑 5조도 꽤나 빡셌고.

    ㄴ 호우! 호우!

    ㄴ 이 사람 연주 19년에 대구에 서 들었었음. 진짜 백발에 귀족 냄 새 폴폴 나면서 귀호강했었지.

    ㄴ 기억난다. 난 그때 서울에서 들었는데 진짜 흐아아 했음.

    ㄴ 흐아아가 뭐냐? 흐아아가.

    ㄴ 그럼 어떻게 표현해.

    ㄴ 잔잔한 호수 속에 잔물결조차 없이 팽팽한 수면이 마치 거울 같은데 한 발 내디디면 깨질 듯한 그곳을 걷는 엄청난 긴장감을 주었지.

    ㄴ 으엑 아리엘 냄새

    ㄴ 아리엘이 뭐가 어때서!

    ㄴ 끄으으윽. 진짜 그때 티켓 놓친 게 천추의 한이다ㅠㅠ

    ㄴ 그나저나 도빈이 분노 뿜뿜 하고 있겠다. 도빈이가 어디 나가서 최고 아니었던 적이 없잖아.

    ㄴ 그러게. 결국 시드 못 땄네.

    ㄴ 콩쿠르 같은 데 많이 나가진 않았지만 매출이라든지 팬덤이라든지 하면 세계 원탑이었던 배도빈이 이 러니까 좀 신기한 느낌이긴 하다. 확실히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이 괜히 세계 대전이 아닌가 봐.

    ㄴ 난 솔직히 도빈이가 한 번쯤은 고생했으면 좋겠는데. 왜 다들 고난 겪고 나서 더 성숙해지잖아.

    ㄴ 미친 소리 하지 마라, 미친 자야.

    ㄴ 배도빈은 지금도 완벽함

    ㄴ 도빈 음악적 성숙도를 따지면 70은 먹었을 듯?

    ㄴ 아프니까 청춘이란 말이랑 뭐가 달라? 부정 탈라. 에비. 에비.

    ㄴ 근데 진짜 아쉽다. 베를린 드랑 최지훈도 진짜 좋았는데.

    ㄴ ㅇㅇ. 진짜 뭔가 딱 개화했다는 느낌이었지.

    조별 대진으로 인한 각 악단이 가 지는 패널티는 어쩔 수 없었지만 빈 필하모닉과 크리스틴 지메르만의 연주가 최고였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하나같이 그 연주를 극찬했고 빈 필하모닉은 반드시 우승하여 마지막 날에 다시 한번 지메르만과 공연하 기를 약속했다.

    그렇게 분위기가 달아올랐을 때 크리스틴 지메르만의 발언은 작은 화제가 되었다.

    “빈과의 연주에 대해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칼 에케르트와 빈 필하모닉은 언제나 제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만족스러운 연주였습니다.”

    “빈 필하모닉과의 협연 영상이 불과 하루 만에 2천만에 이르렀습니다. 유례없는 기록을 달성할 가능성이 충분한데요.”

    “공연 영상은 내려달라고 요청 중입니다.”

    “……네?”

    “뉴튜브나 미시시피, 인터플레이, 웹플릭스 등의 매체가 클래식 음악에 미치는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공연의 가치를 저해하고 관람의 의미를 퇴색시키죠.”

    “아……. 그렇군요.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서……. 정말 대단한 연주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대 회를 어떻게 지켜보고 계십니까?”

    “그렇네요. 대전이라는 표현이 어 울려요. 그간 다른 음악가의 공연은 많이 찾지 못했는데 덕분에 좋은 시 간을 보냈습니다. 그 미숙하고 말괄량이였던 가우왕이 그렇게 멋지게 자랄 줄은 몰랐거든요. 지금도 까부는 것 같지만.”

    “아하하.”

    “그리고……. 한국의 최지훈이라고 했던가요? 마에스트로 배도빈과 함께한.”

    “아, 네.”

    “인상적인 연주였어요. 그는 오케스트라와 어울릴 줄 아는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정말 사카모토 선생이 출전하지 않은 게 아쉽네요.”

    인터뷰를 통해 지메르만의 공연 영 상이 곧 삭제될 거라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팬들은 당황했다.

    OOTY 오케스트라 대전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는 연주 중 하나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ㄴ 아니, 그걸 왜 내려;;

    ㄴ 원래 저런 쪽으로는 단호한 사람임

    ㄴ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디지털 콘서트홀이랑 웹서비스로 클래식 음악 시장이 얼마나 커졌는데.

    ㄴ 그러게. 저건 좀 아쉽다.

    ㄴ 저건 좀 말이 많음. 공연과 관람 의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말에도 공감할 수 있고 직관을 못 하는 사람 들도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ㄴ 여긴 좀 답답한 게 다들 배워서 그런지 이것저것 따지는 게 너무 많음.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그렇게 이건 되고 저건 안 되는 게 많냐?

    ㄴㅋㅋㅋㅋ 인정한다.

    ㄴ 미숙했던 가우왕이래 ㅋㅋㅋㅋ 맞아. 티켓파워는 처음부터 셌지만 거장들한테 까일 때도 있었지.

    ㄴ 저거 듣고 가우왕 또 발작할 듯.

    팬들의 예상대로 크리스틴 지메르만의 인터뷰를 접한 가우왕은 발작 하여 그의 학창 시절 스승에게 대뜸 전화를 걸었다.

    -크리스틴입니다.

    “이보세요, 누가 미숙하고 말괄량 이였단 말입니까?”

    -아아. 왕이로구나. 잘 지냈니?

    “저 곧 있으면 마흔이에요. 예? 언 제까지 스승 노릇 하실 겁니까?”

    -목소리가 좋은 걸 보니 잘 지내 고 있는 것 같구나. 하도 연락을 안 해서 걱정했단다.

    “기껏 나와서 한다는 말이 까분다는 말뿐입니까? 저랑 같은 조였으면 선생님이더라도 시드 못 받았을 겁 니다!”

    -참, 소소는 잘 있니? 마지막에 봤을 때가 막 학교 들어갈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 제 말 듣고 계십니까?”

    버럭버럭 화를 내는 가우왕을.

    배도빈은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저 성질머리는 안 고쳐지는 모양이네.’

    “신기하다. 크리스틴 지메르만과 가우왕 씨가 사제지간이었다니.”

    최지훈이 싱글싱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몰랐어.”

    “오빠가 차이코프스키에서 우승하고 시비 걸었었어.”

    배도빈과 최지훈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소소는 무덤덤하게 고기를 입에 넣었다.

    “크리스틴의 재미없는 연주보다 자기 연주가 훨씬 재밌다고.”

    “어…….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런 일이었으면 너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배도빈의 말에 최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우왕의 팬이자 클래식 음악 정보 오타쿠인 최지훈이 그만한 일을 모를 수가 없었다.

    “직접 말했으니까. 크리스틴 집에 찾아가서.”

    ‘어렸을 땐 진짜 답이 없었네.’

    배도빈이 가우왕을 더욱 한심하게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래서요? 어떻게 되었는데요?”

    그러는 한편 가우왕의 비화를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최지훈이 놓칠 리 없었다.

    소소에게 뒷이야기를 재촉했다.

    “압도적으로 져서 제자가 되었어.”

    “네?”

    “그런 내기였대.”

    소소가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젓고는 다시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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