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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베토벤-256화 (256/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56화

    57. 결여(1)

    전에도 몇 번 생각했지만 최지훈은 참 여러 일에 신경 쓴다.

    무대에서 연주하는 지금도 자기 뒤 에 올 바이올린을 위해 음을 가지런히 정리한다.

    녀석의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연주 가 오케스트라와 함께 더없이 잘 어울린다.

    ‘좋아.’

    최지훈의 피아노를 듣고 그대로 연주해 보면서, 오케스트라 역시 녀석 에게 어울릴 수 있도록 수정했던 노 력이 헛되지 않았다.

    사려 깊다고 해야 할지 혹은 오지 랖이 넓다고 해야 할지 모를 일이나 최지훈의 이런 성격은 오케스트라와 함께할 때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녀석은 피아노에 있어서도 되도록 여러 스타일을 익히려 했다.

    ‘들어와.’

    두 팔을 힘차게 벌렸다.

    최지훈이 들어올 타이밍이다.

    ‘……정확해.’

    녀석이 잠깐의 틈도 없이 열기를 이어받아 연주한다.

    오케스트라를 온전히 이해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 무대를 준비하면서 주변 악기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하나하나 인지하 려 했던 최지훈이니 가능하다.

    걱정 많은 성격 탓에 더 잘 준비하고 싶은 생각이 강하고 그것이 이 런 식으로 드러나는 거 같은데, 지 휘자로서 이만큼 편한 피아니스트도 없다.

    이런 마음 자세는 실력을 떠나 매우 중요한 일이다.

    가우왕 같은 경우에는 뽐내고 싶은 마음이 행동이나 말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연주에도 드러나는데, 또 그 연주가 마음을 움직이니 사실상 선 택지가 늘어나 한쪽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참 난감한 일이다.

    마리 얀스는 선곡을 통해 가우왕이 최대한 실력을 뽐낼 수 있게 하면서 동시에 오케스트라를 무너뜨리지 않게 잘 조율해냈지만.

    가우왕도 알게 모르게 암스테르담에게 배려했을 것이다.

    그의 연주라고 하기에는 저번 무대는 너무 얌전했으니까.

    그런 식으로 오케스트라와 피아니스트는 항상 서로의 역할이 달랐고 역사적으로도 많은 음악가들이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조화로운 분위기를 위해 노력했지만, 완전히 오케스트라의 구성원으로 활약한 피아노는 무척 드물었다.

    뛰어난 피아니스트일수록 그 자체로 독립적 성향을 짙게 띠니 말이다.

    그래서 최지훈이 좀 더 부각되는 것 같기도 하다.

    녀석은 주변을 잘 둘러보고 그것을 깊이 이해한 뒤 되도록 어울리고자 한다.

    ‘신기하단 말이야.’

    그러나 만약 그것뿐이었다면 개성 없는, 재미없는 피아니스트였을 텐 데 그러면서도 자신을 굳게 뿌리내 리고 있다.

    그래. 나무라는 표현이 좋겠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으면서도 풍성한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준다든 가 때로는 튼튼한 몸으로 기댈 수 있게 해준다든가 하면서 상생하는

    나무 같은 피아니스트.

    내 오케스트라의 가운데에 최지훈 같은 나무가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어제보다 좋잖아.’

    녀석에게 또 어떤 심적 변화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무대 위에서 어울 리는 녀석은 당장 어제보다도 훨씬 멋진 연주를 했다.

    가능성만이 아니라.

    그러한 연주를 직접, 함께하니.

    가슴 안에서 피어나는 만족감에 벅차오른다.

    수고한 단원들을 격려하고 2라운드 5조 결과를 기다렸다.

    곧 대형 스크린으로 심사 위원단과 팬들의 투표 결과가 발표되었다.

    ‘2등이라니.’

    어이가 없어 눈을 몇 번 더 깜빡 이는데 잘못 본 것이 아니라 심기가 몹시 불편해진다.

    멋대로 씰룩이는 윗입술을 깨물어 화를 삭이는데 디스카우가 껄껄 웃었다.

    “이야. 3라운드 진출이라니! 이거 축배라도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하하!”

    “디, 디스카우 씨. 쉿.”

    “어? 왜 그래? 다들 안 기뻐?”

    다들 내 눈치를 보는 듯 슬금슬금 물러난다.

    그러고 보니 발표 전과 미묘하게 나와 단원들 사이에 거리가 벌어진 듯하다.

    악단을 두렵게 할 뿐인 지휘자는 말 그대로 폭군에 지나지 않으니 단원들 앞에서 이런 기분을 내색하는 것도 지양해야겠다.

    우선은 안심시키자.

    “아하하. 기쁘네요. 다들 쉬고 내일 부터 다시 3라운드 준비하도록 해요.”

    기껏 상냥하게 말해주었더니 다들 반응이 없다.

    “고, 고생했어. 푸, 푸, 푹 쉬어.”

    “도빈, 멋졌어.”

    나윤희와 오늘 하루 쉬었던 소소만 입을 열었다.

    찰스 브라움이 돌아서서 가려니 뒤 늦게 다가왔다.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군. 우리가 들려준 읍읍.”

    “조용히 해요!”

    찰스 브라움이라도 나와 같은 생각인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하며 손뼉을 쳤다.

    “해산하죠. 오늘 반성은 내일로 미루겠습니다.”

    힘없이 돌아가는 단원들을 보고 기뻐하는 일은 우승한 뒤에도 늦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런 내 생각을 강요할 수도 없는 법이다.

    오늘 저녁은 괜찮은 식당을 잡아 단원들에게 멋진 요리라도 먹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멀핀 과장에게 일을 부탁하고자 전 화를 걸며 동시에 주변을 둘러보는 데 최지훈이 안 보인다.

    찰스 브라움과 같이 대기실에 두고 온 걸 가지러 갔는데 아직 안 돌아 온 모양이다.

    찰스 브라움에게 물었다.

    “지훈이는요?”

    “나올 때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더 라.”

    “ 찰스는요?”

    최지훈이 주인공인 만큼 그렇겠지 만 찰스 브라움은 자기 말대로 대스 타다.

    기자들이 가만뒀을 리가 없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인터뷰라니. 내 고운 얼굴을 볼 팬들을 위해서라도 예의가 아니지.”

    아리엘 얀스 때문인지 찰스 브라움 의 자아도취적 발언에도 면역력이 약해지는 듯하다.

    “왜 그래?”

    “아니에요.”

    “그건 그렇고 이렇게 되면 시드는 못 받는 걸로 확정인데 일정회의 다 시 해야지 않겠어?”

    “그래야죠. 내일 미팅 때 하도록 해요.”

    “그래.”

    때마침 멀핀과 전화 연결이 되어 찰스 브라움과 서둘러 인사를 나눴다.

    -네, 악장님. 전화를 너무 늦게 받았네요. 죄송해요.

    “신경 쓰지 말아요. 다른 게 아니 라 오늘 단원들이랑 식사할 곳을 찾으려는데 도와줄 수 있어요?”

    -그럼요!

    “좋은 곳으로 잡아주세요. 다들 고 생했으니까. 예산 생각하지 마시고요.”

    -어…….

    “사비로 한다는 뜻이에요. 멀핀이 랑 사무국 직원들 자리도 잡아요. 지훈이도 포함해서.”

    -그,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저희는 저희끼리.

    멀핀 과장이 걱정스레 말했다.

    “직원 분들도 베를린 필하모닉이잖아요. 반드시 좋은 곳으로 잡아야 해요.”

    돈 걱정할까 봐 그게 걱정이다.

    -네! 알겠습니다. 곧 연락드릴게요!

    “네. 저 말고도 각 파트별 퍼스트 에게도 전달해 주세요.”

    -걱정 마세요.

    다시 목소리가 밝아진 걸 보니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통화를 마치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계획대로라면 시드권을 얻어 바로 4라운드(8강)로 진출하는데 그러지 못해 한 곡을 더 준비해야 하는 상황.

    당연히 올라갈 거라 생각했던 내가 조금 안일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만족스러운 대회 결과를 떠나 최지훈과 멋진 연주를 했다는 점에서는 무척 고무적이다.

    ‘지금쯤이면 기자들도 돌아갔겠지.’

    인터뷰를 한다 해도 다른 악단에도 신경 써야 할 테고 오늘 결과 발표 도 났으니 슬슬 여유가 생겼을 터.

    최지훈의 대기실로 향했다.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와 같이 밀려 드는 인터뷰를 거절하며 최지훈의 대기실에 이르렀다.

    복도는 꽤 한산했고 때때로 멀리서 몇몇 소리가 들릴 뿐이다.

    문을 두드리려 할 때, 안에서 대화 소리가 들렸다.

    “아이구! 우리 아들이 최고야! 최고!”

    “이히히.”

    “어쩜 그렇게 멋지니. 또 밤새워서 연습하고 그런 건 아니지? 어디 보 자. 얼굴이 반쪽이 됐네.”

    “아버지도 참. 전 괜찮아요. 이히힛."

    최우철의 목소리다.

    문을 두드리니 안에서 커흠 하는 기침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나야.”

    “아, 들어와.”

    문을 열자 뭔가 쑥스러워 하는 최지훈과 고개를 살짝 들고 근엄하게 서 있는 최우철을 볼 수 있었다.

    첫 인상과 예전 기억과는 달리 아 들 바보가 된 지금 모습이 더 보기 좋다.

    최지훈도 좋아하는 것 같고 말이다.

    “음. 반갑구나.”

    “안녕하세요.”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물었다.

    “오늘 단원들이랑 저녁 먹으려 하 는데 어쩔래?”

    최지훈이 최우철과 날 번갈아 보았다. 조금 난감한 듯하다.

    “함께 일했으면 뒤풀이도 같이해야 지. 재밌게 놀다 오렴. 아빠는 내일 까지 있을 테니까.”

    최우철의 말에 최지훈이 크게 웃었고 그와 인사를 나누고 나오자 멀핀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일처리가 빠르다.

    다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다행이다.

    멀핀 과장이 예약한 곳은 썩 좋은 곳은 아니었지만 조용하고 기품이 있는 곳이었다.

    카밀라가 총애하는 만큼 사무적인 능력 이외에 이런 센스도 갖춘 모양 이다.

    그녀가 아직 과장이라는 게 도리어 진급이 느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기억해 두었다가 악단주에게 언질이나 줘야겠다.

    ‘……아니지. 데리고 오면 되잖아.’

    악단주에게 말하는 건 미루도록 하자.

    유능한 부하 직원을 데려가면 카밀라가 울지도 모르지만 선택은 멀핀 과장이 하는 거다.

    얼마를 주면 좋을까 고민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찰스 브라움이 안 보인다.

    “찰스는요?”

    “조금 지쳤나 봐. 방에서 쉰다던데.”

    옆에 앉은 디스카우가 닭 다리를 호쾌하기 뜯으며 말했다.

    아까 대화할 때만 해도 그런 기색 은 없었는데 쉬고 싶은 모양이다.

    확실히 2라운드 준비할 때 악보를 여러 번 수정하느라 찰스 브라움에 게도 부담이 많이 갔으니까.

    “……그런데 가우왕은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소소한테 물어보니 밥 먹는다 해 서 왔지.”

    “이제 연주 없잖아요. 안 돌아가요?”

    “너 같으면 이 좋은 기회를 놓치겠냐? 합법적으로 쉴 수 있는데.”

    “가우왕은 따로 계산해요.”

    “뭐? 치사하게 이렇게 나오기냐?”

    “돈도 잘 버는 사람이 왜 그래요?”

    “동생이 악장으로 있고 네가 있는 악단 회식에 낄 수도 있지. 너 설마 나랑 암스테르담이 점수 더 높아서 심술부리는 거냐?”

    “ 아하하하.”

    가우왕을 걷어차주려 할 때 최지훈이 크게 웃었다.

    “도빈이 그렇게 속 안 좁아요.”

    “난 또 평소랑 달라서 그런 줄 알았지.”

    오늘따라 가우왕이 밉상이다.

    “그나저나 너 말이야, 꼬맹이.”

    “뭐가요.”

    “너 말고.”

    가우왕이 최지훈을 보며 말했다.

    “최고는 나야. 제법 괜찮은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그걸 잊으면 곤란해.”

    “네.”

    최지훈이 방실방실 웃으며 대답하 니 가우왕이 재미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빡!

    “억!”

    그 순간 둔탁한 소리가 났고 가우왕이 고통을 호소하며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오빠 재수 없는 말 금지.”

    소소가 정강이를 걷어차 준 모양.

    속이 다 시원하다.

    주변에 있던 단원들이 웃었다.

    “아하하하. 가우왕 씨 역시 재밌는 분 같아.”

    최지훈도 즐거운 듯 웃었다.

    “……인정하는 거야.”

    “어?”

    “저 사람, 자존심이 세서 자기가 인정하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낮춰 부르더라고.”

    내게 괴팍한 꼬맹이라 한다든지 글 렌 골드와 사카모토 같은 역사적 거 장들에게 영감이라 한다든지, 푸르트벵글러를 기 센 영감탱이라 한다 든지 말이다.

    "응."

    최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 위에서의 마음 자세와 연주,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 그리고 우상 이었던 이에게 인정받았다는 일을 의연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니 불 만이었던 결과도 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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