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55화 (255/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55화

    56. 계절(6)

    ‘다들 알지도 못하면서.’

    어렸을 적부터 최지훈이 피아노를 잘 연주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잘 아는 차채은은 이러한 분위기 가 몹시 마음에 안 들었다.

    ‘다들 이름부터 생각한다니까.’

    물론 차채은도 시카고 심포니와 함께한 마리오 폴리니가 얼마나 대단한 피아니스트인지 알고 있었다.

    또한 그의 연주를 듣는 내내 감탄 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불발되긴 했지만 본 래 빈 필하모닉과 함께하기로 했던 만큼 마리오 폴리니는 세계 여러 악 단의 섭외 1순위 중 한 명이었다.

    배도빈과 친한 니나 케베리히도, 최성신에 대해서도 남들 못지않게 잘 알았다.

    최지훈이 비록 쇼팽 콩쿠르와 차이 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했다고 하지만 OOTY 오케스트라 대전에 합 류한 피아니스트 중에 3대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 경험이 없는 이는 찾기 힘들 정도였다.

    나이 차이도 있고 그런 점에서 일 찌감치 활동을 시작한 세 사람에 비 해 최지훈이 덜 알려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감상조차 하지 않고 벌써부 터 시카고와 로스앤젤레스의 진출을 점치는 분위기가 달가울 리 없었다.

    ‘두고 봐.’

    차채은이 팔짱을 끼고 씩씩댔다.

    그러는 한편, 차채은과 같이 잔뜩 화가 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리스텀지의 기자 사라 제인은 최지훈을 무시하는 주변 기자들의 말에 울컥했다.

    최지훈의 천재성과 스타성을 좇아 그와 관련된 일이라면 모두 기사화 했던 그녀는 최지훈이 멋들어진 연주를 들려주길 바랐다.

    ‘찍소리 못하게 하라고.’

    사라는 무대 위로 올라온 사회자를 보며 입을 쭉 내밀었다.

    “다음은 마지막 순서입니다. 베를린 필하모닉 B와 최지훈의 차이코 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입니다.”

    사회자가 안내를 마치고 내려가자 곧 베를린 필하모닉 B가 자리를 잡았다.

    베를린 필하모닉이라는 어마어마한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사실 B는 OOTY 오케스트라 대전 참가단 중 그 역사가 가장 짧았다.

    그러나 동시에 현재 상업적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기이한 악단이었다.

    팬들은 물론 전문가들마저 베를린 필하모닉 B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 인은 모두 배도빈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적어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이 사실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배도빈 홀로 오케스트라를 운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연주는 더더욱.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라고 평가 받음과 동시에 단원들에 대한 평가는 미묘한 베를린 필하모닉 B.

    오늘은 만만치 않은 적수를 상대로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해야 했다.

    과연 배도빈이 또다시 기적 같은 일을 일으켜 놀라운 점수를 올릴 수 있을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잠시 뒤.

    배도빈과 최지훈이 무대 위에 올라 섰다.

    무대 뒤에 이르자 도빈이가 서 있었다.

    “ 가자.”

    "응."

    발을 옮겼다.

    오케스트라 대전을 즐겼던 만큼 저 앞으로 나가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을지 잘 알고 있다.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로 이렇게 긴장되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손이 떨린다.

    전 세계가 이 무대를 지켜보고 있고 콘서트홀 객석에는 내로라하는 음악가와 기자, 평론가들이 자리하 고 있다.

    마지막까지 연습하느라 듣진 못했지만 아마 분명 니나 누나와 성신이 형, 마리오 폴리니 씨는 내가 상상 도 못 할 연주를 했을 거다.

    하지만 도빈이 말대로 나도 이 무대에 오른다.

    꾸욱.

    힘겹게 발을 내딛자 생전 듣지 못했던 환호가 온몸을 때리는 듯 밀려 왔다.

    도빈이는 이 압박감을 매번 느끼고 있겠지.

    오늘만큼은, 아니, 앞으로는 나도 이 무거운 역할을 도빈이와 함께 짊어져야 한다.

    물러서는 것으론 그곳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 손에 힘이 들어 갔다.

    피아노 앞에 앉았다.

    지휘단에 오른 도빈이가 나를 보았다.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 손의 떨림이 멈췄다.

    도빈이가 수많은 피아니스트 중에 날 선택했듯, 나도 오케스트라와 함께한다면 도빈이와 함께할 거다.

    다른 생각은 해본 적 없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

    엄마가 잠드시고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약해져선 안 되었던 여 섯 살 당시.

    난 그저 엄마를 느끼고 싶어 피아노에 집착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주변에 천재라 고 알려졌고, 웃음을 잃었던 아버지는 내 칭찬을 들을 때면 그나마 미 소를 지으셨다.

    그렇게 천재라는 이름에 다가가기 위해, 그런 척하기 위해 그저 한 걸 음 내딛기에 바빴다.

    그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 채 숨이 차고 어깨가 무거워 앞을 보는 것조차 힘들었을 때.

    도빈이를 만났다.

    진짜 천재가 무엇인지 알았고 나는 절대 저렇게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울고 말았다.

    지금도 ‘압도적인 실력 차이에 좌절한 거야?’라는 도빈이의 말이 선명히 기억난다.

    그래, 좌절이었다.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아버지를 기쁘게 해줄 수 없을 거란 생각에 좌절했다.

    하지만 동시에 피아노를 다시 사랑할 수 있었다.

    도빈이가 알려주는 것을 하나씩 익히면서 어렴풋이 기억하는 엄마와의 시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도빈이가 이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렇게 다시 피아노에 재미를 붙이고 그저 도빈이와 함께하는 것이 좋다 보니 자연스레 도빈이에게 다가 가고 싶어졌다.

    아마 그 무렵이었을 거다.

    억지와 고집을 부리는 내게 도빈이가 말했다.

    ‘넌 이미 피아니스트야.’

    ‘끄윽. 나도…… 피아니스트야?’

    ‘그래. 어엿한 피아니스트야.’

    다른 누구도 아닌 누구보다도 함께 하고 싶었던 도빈이가 해준 말이었기에 기뻤다.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도빈이가 당시 내게서 어떤 점을 봤는지 알 수 없다. 그저 내가 우니까 달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중요한 무대에서 도빈이는 결국 날 선택했다.

    나보다 나를 더 믿어준 형제와 마 음을 다해 연주하고 싶다.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다.

    나와 도빈이가 이렇게나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다고.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자.

    도빈이가 지휘봉을 사선으로 내려 그은 뒤 힘차게 들었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장중한 연주를 시작했다.

    언제 들어도 멋진 주제다.

    집중하자.

    건반을 누를 때는 깊게, 뗄 때는 가볍게.

    앞서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던 주제를 이어받아 연주하면 현악부가 감 미로운 멜로디를 들려준다.

    일반적인 피아노 협주곡과는 다르게 역할을 번갈아 하는 이 곡은 언 뜻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다투는 것 같기도, 서로 자기를 뽐내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엔.

    이렇게나 아름답게 조화로운 것을.

    다시 내가 주 멜로디를 받는다.

    마디 단위로 나뉘는 대화에서 도빈이의 얼마나 치밀하게 안배했는지 알 수 있다.

    내 장점은 물론 버릇과 실수까지 기억해 따라 연주하며 악보를 수정 했던 만큼 내게 딱 맞는 옷을 입은 듯하다.

    나는 내 연주에 최선을 다하면 될 뿐.

    거기에 도빈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지 의식하며, 연습할 때를 떠올리면.

    ‘ 아아.’

    즐겁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최지훈이 연주를 시작한 순간 그것을 듣는 모든 사람은 앞선 연주를 잊고 말았다.

    강렬하게 치고 나오는 오케스트라 와 그에 못지않은 힘찬 피아노.

    모든 소리가 살아 있어 그 풍부한 감성에 마음이 이끌리고 있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눈을 감고 온 신경을 귀에 집중했다. 단 하나의 음조차 사소하게 여기지 않았고 깊게 받아들였다.

    ‘ 녀석.’

    배도빈은 최근 보여주던 스타일에 서 떨어져 좀 더 예전의 그 비장하고 치열했던 모습으로 돌아갔다.

    철저하게 감성을 자극했고 듣고 있으면 알 수 없는 고양감이 솟아나는

    듯했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에 이 이상 어울리는 연주가 따로 있을까 싶었다.

    오늘도 배도빈은 푸르트벵글러를 감탄하게 하였다.

    ‘최지훈이라고 했던가.’

    사실, 작년 겨울 푸르트벵글러는 최지훈을 그리 눈여겨보지 않았다. 나이에 비해 그럭저럭 잘했지만 결 코 배도빈에 어울리는 실력은 아니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으와의 라흐마니 노프 피아노 협주곡 협연도 그의 기준에는 부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섬세하고 정확한 연주를 했지만 다소 유약해 보였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타건에는 확신이 있었고 박자를 가지고 노는 것으로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알 수 있었다.

    놀라운 유기적 반응으로.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처음부터 오케스트라와 함께했던 것처럼 어울렸다.

    푸르트벵글러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이름 있는 음악가들이 팸플릿을 펼쳐 베를린 필하모닉 B와 함께하는 피아니스트가 누군지 다시금 확인했다.

    ‘ 멋있다.’

    ‘저 녀석이 언제 저렇게……

    니나 케베리히는 만면에 웃음을 띠었고 최성신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가우왕은.

    최지훈을 노려보았다.

    그에게 최지훈은 까마득한 후배일 뿐이었다.

    노력하는 모습이 기특하고 자신을 존경하기에, 무엇보다 배도빈의 친 구라 몇 번 어울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무대로 가우왕의 생 각은 달라졌다.

    새내기라든지 팬이라든가, 가우왕 이 둘러친 울타리 밖의 존재가 아니 라 피아니스트의 범주 안으로 들어 온 것이었다.

    마침내 모든 연주가 끝나고.

    가우왕이 누구보다도 먼저 자리에 서 일어났다.

    잠시 후.

    대형 스크린에 2라운드 5조 결과 가 발표되었고 차채은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시카고 심포니

    심사 위원단: 29.8(298점)

    팬 투표: 22.4(1,006,118표)

    합계 52.2점(1위)

    베를린 필하모닉 B

    심사 위원단: 30(300점)

    팬 투표: 21(943,236표)

    합계 51점(2위)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심사 위원단: 29(290점)

    팬 투표: 14(628,824표)

    합계 43점(3위)

    합계 3,144,120표.

    2라운드에서 세 번째로 많은 사람 이 투표한 가운데 3라운드로 진출할 악단이 정해진 순간이었다.

    시카고 심포니가 조 1위로 진출하였으나 매우 근소한 차이로 2위를 기록한 베를린 필하모닉.

    그중에서도 다소 열세라 여겨졌던 최지훈에게 기자들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세계 각국의 언론사에서 퇴장하는 최지훈을 잡아다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오늘 연주 준비는 어떻게 하셨습 니까?”

    “특기인 쇼팽이 아니라 차이코프스 키를 준비한 이유가 따로 있으셨습 니까?”

    “배도빈 악장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십니까?”

    “피아노는 누구에게 배우셨습니까?”

    “베를린 필하모닉과 유기적으로 어 울릴 수 있었던 비결이 뭡니까?”

    최지훈이 답을 할 사이도 없이 질 문이 쏟아졌다.

    그런 와중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 이며 겨우 앞쪽으로 자리를 잡은 리 스텀지의 사라 제인 기자가 최지훈 앞에 마이크를 가져다 댔다.

    “뛰어난 선배들을 꺾고 진출한 소 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신없는 와중에 아는 얼굴을 보니 최지훈도 그쪽에 마음이 갔다.

    “오늘 연주는 만족스럽습니다. 베를린 필하모닉과 준비했던 걸 잘 들 려드린 것 같아요.”

    사라 제인이 혹시 다른 기자가 기 회를 채갈까 봐 걱정되어 곧장 질문을 이었다.

    그와 동시에 오늘 대회 일정 내내 최지훈을 무시했던 다른 기자들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연주였습니다. 준비는 어떻게 하셨나요?”

    “글쎄요. 그냥 연습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스타일을 바꾸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단기간에 가능했던 건 역시 당신이 천재기 때문이겠죠?”

    사라 제인이 질문인 척 단호히 외 쳤다.

    수많은 언론인이 모인 이 자리에서 자신이 몇 년간 쫓아다닌 최지훈의 천재성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또한 최지훈은 항상 인터뷰를 천재 라는 말로 끝내기도 했다.

    질문을 받은 최지훈은 사라를 보고 웃었다.

    그리고 담백하게 답했다.

    “아뇨. 공연을 준비하는 피아니스트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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