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54화 (254/564)
  • 다시 태어난 베토벤 254화

    56. 계절(5)

    하지만 듣지 못해도 알 수 있다.

    홍승일과 결국에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나도 그도 더 멋진 음악을 하려 했고 서로가 얼마나 노력하 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잠시 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과 니나 케베리히의 연주가 시작됩니다. 방문하신 분들께서는 자리해 주 시기 바랍니다.”

    잠시 사색을 하고 있는데 대기실 스피커로부터 안내 방송이 나왔다.

    니나 케베리히가 얼마나 성장했는 지 두 귀로 직접 확인하고자 일어났다.

    복도를 지나는데 최지훈의 대기실 에서 피아노 소리가 났다.

    문을 여니 녀석이 피아노에 집중하 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니 그제야 돌아보았다.

    “곧 시작이래.”

    “아, 벌써 그렇게 됐네.”

    시간을 확인한 최지훈이 담담하게 말했다.

    “먼저 가.”

    “안 들어?”

    "응."

    최지훈은 다시 건반에 손을 올렸다.

    그 모습을 보니 다시 물어보는 것 이 방해라는 생각이 들어 홀로 콘서트홀로 향했다.

    “와, 왔어? 이거……

    좌석에 앉으니 먼저 온 나윤희가 팸플릿을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펼쳐보니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은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준비한 모양이다.

    피아노 협주곡은 평생 A단조 하나만 만들었다 하는데, 대학교수가 말하길 오케스트라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오케스트라만, 피아노를 위해서는 피아노만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 한다.

    그런 생각을 했으면서 A단조와 같은 조화로운 곡을 만들었으니, 어쩌면 슈만의 그런 생각이 이런 걸작을 탄생시킨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니나 케베리히에게 어울리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 남는다.

    니나의 강점은 예측할 수 없는 돌 출성과 그것에 빠져들 수밖에 없게 하는 표현력에 있다.

    리듬감이 무척 발달해 박자를 자유 자재로 가지고 놀아 사실 고전이나 낭만보다는 변화가 많은 현대 곡에 더 강점을 보인다.

    본인은 내 소나타를 가장 좋아하지 만 말이다.

    그러나 내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피아니스트인 만큼 분명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해줄 거라 믿는다.

    잠시 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이 무대 위에 올랐다.

    알고 있는 얼굴이 몇몇 보이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던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과는 다르다.

    토마스 필스와 함께했던 이들 대부 분이 은퇴했으니 세월이 얼마나 홀렀는지 느낄 수 있었다.

    ‘가장 큰 희망’과 ‘용감한 영혼’ 등 영화 음악을 작업했을 때는 더할 나 위 없이 훌륭했던 로스앤젤레스가 니나 케베리히라는 천재와 어떻게 어울릴지…….

    아리엘 핀 얀스와 니나 케베리히가 모습을 드러냈다.

    관객 모두 오늘의 주인공을 열렬히 맞이했다.

    나는 떨떠름하게 박수를 보냈는데 저 미친놈의 손끝에 니나와 로스앤 젤레스의 연주가 달려 있다 생각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실력 자체는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아리엘 얀스가 가면을 꺼내 들었고, 그와 동시에 오케스트라가 준비를 마쳤다.

    니나 케베리히와 눈을 마주한 뒤 놈은 두 팔을 벌리고 잠시 뜸을 들였다.

    감정을 충만히 채운 채, 왼팔은 그 대로 두고 오른손을 힘차게 들어 올 린 뒤 내려쳤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힘찬 외 침 뒤에 곧장 니나의 피아노가 어울렸다.

    이번에는 오보에가 나섰고 그에 이 어 다시금 니나가 날갯짓을 했다.

    니나의 날개는 무척 우아하여 마치 나비처럼 들릴 때가 있는데 슈만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선율과 어울려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우선 피아노의 시작은 좋다.

    오보에와 피아노의 대화가 클라리 넷과 피아노의 대화로 이어지는 과 정이 무척 매끄럽다.

    동시에 두 대화가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데 슈만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오보에, 클라리넷과 사이좋게 대화 하는 부분에서 니나 특유의 솔직함 이 더욱 부각되는 듯하다.

    ‘좋네.’

    그러나 걱정되는 부분은 2악장.

    니나의 독특한 박자 감각이 앞선 1악장에서의 오케스트라와는 잘 어 울렸지만 첼로 멜로디가 강한 2악장 에서는 어찌 될지 의문이다.

    지금까지는 니나의 피아노가 빛나 고 있지만 강한 개성은 홀로 있을 때 더욱 빛을 발휘하는 법이다.

    ‘ 과연.’

    아리엘 얀스가 제정신이라면 1악장 처럼 부드럽게 넘기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쉬는 곳을 삽입했을 터.

    그러나 놈이 온전한 정신을 가지지 못함을 알기에 걱정되었다.

    2악장이 시작되었다.

    피아노가 내는 음이 콘서트홀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오케스트라가 그에 호응하듯 나오 더니 이내 내가 걱정했던 부분에 이르렀다.

    ‘무슨 짓이야.’

    어떻게 표현할지 걱정했더니 아리 엘 얀스는 슈만이 완벽하게 조율해 둔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조화를 깨버렸다.

    첼로를 보다 앞세웠고.

    니나의 피아노는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스스로 몸을 낮추어 빈 부분을 더욱 세밀히 채워나갔다.

    이런 건 니나의 연주가 아니다.

    화가 났지만.

    분명 이것도 하나의 방법.

    더욱 아름다운 연주를 위해 모든 악기는 수단일 뿐이며 그것은 독주 악기도 예외는 아니다.

    그저 더욱 발전한 니나의 연주를 기대했던 만큼 실망했을 뿐, 연주 자체는 신선한 접근이었고 완성도도 제법이다.

    잘 보이진 않지만 니나를 보았다.

    그녀의 타건은 여전히 재기발랄하다. 약점이었던 페달 활용도 능숙해 졌고 무엇보다 개성을 드러내는 것 만이 아니라 오케스트라에 어울릴 줄 알게 되었다.

    경험과 연륜이 쌓였다는 말.

    본인의 개성을 지키고 있다면 다행 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북아 메리카에서의 일이 독이 된 건 아닐까 걱정된다.

    그리고.

    3악장 알레그로 비바체(Allegro Vi vace: 매우 빠르고 생기 있게)에 들어서면서 나는 지금까지 아리엘 얀 스와 니나에게 속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2악장에 대조되듯이 3악장에 들어 피아노는 자유롭게 더욱 풍부하게 자신의 향을 뿌려댔다.

    본래 악보보다 더욱 많은 음계를 활용하면서도 연주는 빠르고 생동감 넘친다.

    니나 케베리히의 손이 때때로 연어 처럼 튀어 오른다.

    이제야 그녀의 표정이 확실히 보인다.

    웃고 있는 그 얼굴을 보니 절로 마음이 상쾌해져, 연주가 끝났을 때는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과 션윈 심 포니 그리고 시카고 심포니까지의 연주가 마무리되었다.

    사람들은 감탄할 뿐이었다.

    “역시 제르바 루빈스타인인가? 정 말 엄청났지?”

    “그러지 않아도 힘찬 브람스 1번이 시카고가 연주하니 어마어마하더군. 폭발력이 대단했어.”

    “아무래도 제르바 루빈스타인의 노 련한 완급조절 때문에 더 그랬겠지. 이거, 진짜 시카고가 시드권 얻겠는데?”

    “모를 일이지. 션윈과 최의 연주도 제법이었으니까.”

    “그 전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을 언급해야지. 최의 연주가 훌륭하긴 했지만 션윈은 아직 3라운드에 진출 할 정도는 아니야. 난 정말 신선한 슈만을 들려준 아리엘 얀스와 니나 케베리히에게 손을 들어주고 싶군.”

    “음. 나도 LA 필하모닉이 다크호 스였다는 데 공감하네.”

    사카모토 료이치는 옆자리에서 들리는 대화 내용에 빙그레 웃었다.

    ‘신기한 일이야.’

    20년 전만 하더라도 사카모토 료이치는 클래식 음악이 이렇게까지 다시 생명력을 가질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시장은 날로 축소되었고 음악은 점점 고착화되었다.

    아주 소수의 음악가들만이 새로운 시도를 했고 그중에서도 적은 수만 이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했었다.

    그렇기에 14년 전, 그가 ‘부활’을 들었을 때 그토록 기뻐했던 것이다.

    말 그대로 클래식 음악의 부활을 알리는 듯했다.

    사카모토 료이치는 21세기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면 배도빈의 첫 싱글 앨범이 출시된 바로 그날일 거 라 생각했다.

    ‘어느새 참 많이 변했군.’

    언젠가부터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게 그리 생소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덕분에 기성세대의 걱정을 줄어들었고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변화가 없다면 다시금 잊히 리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

    그 걱정을 해소할 사람이 배도빈뿐 이라면 그저 희망으로 남을 거라 생각했다.

    ‘마리 얀스의 손자라 했던가.’

    사카모토 료이치는 오늘의 첫 번째 연주를 선명히 기억했다.

    다채로운 음계와 과감한 해석으로 인해 슈만 피아노 협주곡 A단조는 다시 태어난 듯했다.

    작곡가이자 지휘자이기도 했던 사카모토 료이치는 그것이 얼마나 어 려운 일인지 알았다.

    ‘곡 전체를 주무를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 대단해. 대단해. 도빈 군 과 좋은 친구가 되겠어.’

    찾아보기 힘든 성향과 뛰어난 기량에 사카모토 료이치는 아리엘 핀 얀 스가 배도빈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 어줄 거라 생각했다.

    본인과 푸르트벵글러, 마리 얀스, 제르바 루빈스타인 같은 황혼기를 맞이한 음악가들이 없는 시대에 외 롭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또한 그보다 앞서.

    배도빈이라는 희망이 단지 한시적 이지 않을 거라는 것이 너무나도 기뻤다.

    그 누구보다 뛰어난 음악가.

    세기의 천재, 인류의 보물, 베를린의 마왕, 루시표1, 마에스트로 배도빈 은 말할 것도 없이 현세대, 차세대를 아울러 독보적 존재다.

    과연 새 시대의 길을 비추는 빛이다.

    그러나 사카모토는 그 길을 걷는 사람이 없다면 그저 희망으로 남을 뿐이라 생각했다.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겠지.’

    아리엘 얀스와 같은 재기발랄한 인재가 배도빈이 비추는 길을 걷는다면, 그런 사람이 늘어난다면 앞으로 의 클래식 음악계는 분명 기대해 볼 만했다.

    사카모토가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니나 케베리히 양도 이제는 완전히 안정되었고.’

    게다가 배도빈이나 아리엘과 같은 지휘자들만 있어서는 또 안 될 일.

    연주자들 역시 변화하고 발전해야 멋진 연주회가 가능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OOTY 오케스트라 대전에서 꽃을 피운 니나 케 베리히의 기량은 반가운 일이었다.

    물론 현재는 여러 기성 피아니스트에 미치지 못하나 오케스타라 속에 서 춤추는 그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 웠다.

    사카모토 료이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새 시대를 열어갈 인재들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도록 내심 오랜 친구 제르바 루빈스타인과 시카고 심포니가 떨어지길 바랐다.

    한편, 기자석에 모인 이들도 제르 바 루빈스타인, 아리엘 얀스와 니나 케베리히, 최성신에 대한 칭찬을 늘 어놓기 바빴다.

    “이거 정말 의외인데.”

    “그러게나 말이야. 이렇게 로스앤 젤레스가 이렇게나 잘 나가면 션윈 이 좀 위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1라운드 벌써 잊었어? 션윈 팬들이 어마어마하잖아.”

    “그렇긴 해도 수준 차이가 나니까. 최성신에게는 안 된 일이긴 해도.”

    “그러게. 그렇게나 멋진 연주를 했는데 오케스트라의 차이는 어쩔 수 없더라고.”

    “그에 비해 로스앤젤레스는 대단했지.”

    “음. 솔직히 시카고가 아니었으면

    1위도 노릴 만한 것 같아.”

    “아니. 지금도 가능한 일이지.”

    “다들 배도빈이 남아 있는데 무슨 소리야?”

    “배도빈이야 말할 것도 없지. 하지 만 협연자가 아직 너무 어리니까..

    “최지훈 말이지? 이제 막 프로로 활동했으니 뭐. 어렸을 적부터 두각을 드러내긴 했어도 아무래도 오늘 상대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 같은 나라 선배인 최성신에게도 못 미치잖아.”

    시카고와 로스앤젤레스의 칭찬과 간혹 들리는 최성신에 대한 감탄이 이곳저곳에서 들렸다.

    배도빈이라면 또 모른다는 이야기 도 심심치 않게 나왔지만 여전히 피아노 협주곡에서 피아니스트의 기량 은 무시할 수 없었다.

    션윈처럼 오케스트라의 수준이 크 게 차이 나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베를린 필하모닉에 기대하기에는 시 카고 심포니도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도 너무나 홀륭한 음악을 들려주었다.

    한국인인 이필호와 정세윤, 한이슬 도 같은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베를린 필하모닉 B 에 첫 위기가 온 것 같은데.”

    “그러게요. 시카고야 예상된 일이 지만 로스앤젤레스가 너무 잘해버려서 좀 걱정이에요.”

    이필호와 정세윤의 대화에 차채은이 발끈했다.

    “무슨 걱정이에요! 도빈 오빠랑 지훈 오빠가 떨어지기라도 한단 말씀이에요?”

    이필호와 정세윤이 당황해 뭐라 제대로 답을 못할 때, 한이슬 평론가가 입을 뗐다.

    “사실 그런 편이지. 어쩌면 최지훈을 선택한 게 배도빈에게 악수로 작 용할 수도 있어. 가우왕이나 니나 케베리히였다면 분명 조 1위는 물론 시드권 확보도 확실했을 테니까.”

    차채은은 한이슬의 말에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잠시나마 그녀를 멋진 사람이라 생 각했던 것에 화가 났고 더욱이 어렸을 적, 그녀가 쓴 배도빈에 대한 기 사를 감명 깊게 본 일에도 짜증이 났다.

    “한이슬 평론가님은 듣지도 않고 평가부터 하시나 보네요?”

    “응?”

    차채은이 콧방귀를 뀌곤 의자에 등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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