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베토벤 253화
56. 계절(4)
“세상에.”
“베를린이랑 암스테르담을 빼면 몇 표나 남은 거야?”
“이렇게나……
“토스카니니의 런던 필하모닉이 떨어졌다고? 심사 위원단 점수가
294점이나 되는데?”
여기저기서 놀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3,800,000표 중에 베를린 필하모닉과 로얄 콘세르트허바우의 표를 제외하고 남은 표는 약 38,000표.
99퍼센트의 표가 두 곳에 쏠렸으니 다들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닐 거다.
그러나 그런 만큼, 그간 마음고생 했던 단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기도 했다.
멀리, 무대와 가까운 곳에서 A팀 이 두 팔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푸르트벵글러도 드물게, 못 이기는 척 단원들의 환호를 받아주었다.
‘그럴 만하지.’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던 런던과의 분쟁이 대회라는 규격 안에서 승리로 장식되었으니 다른 말은 굳 이 필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다른 무엇도 아닌 팬들의 선택이었으니, 나조차 어느새 주먹을 꽉 쥐고 말았다.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런던 필하모닉은 조용히 일어나 퇴장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마술사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시대가 막이 내렸음을 뜻했고.
레몽 도네크의 뒷모습은 넋이 나간 듯했다.
신념이 무너졌을 때 어떻게 행동 하는지는 온전히 그에게 달린 일이다.
“정말 대단하네.”
최지훈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악단도 최고라 평가받고 있는데 표가 99퍼센트나 쏠리다니.”
“저 정도는 해줘야지.”
그러지 않으면 경쟁이 재미없을 것이다.
"응."
최지훈은 한동안 스크린을 지켜 보았다.
* * *
[대망의 2라운드 3조! 충격의 결과!]
[99퍼센트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두 왕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심사 위원단이 정신 차린 것 같다.”]
[글렌 골드, “최고의 악단과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마리 얀스, “후회 없는 연주였다. 함께해 준 가우왕에게 경의를 표한다.”]
[가우왕, “내가 글렌 영감보다 못 한 게 뭔데!”]
[충격의 결과에 침묵한 런던과 거장]
[2라운드 4조, 대한 국립 오케스트라 14,000표 차이로 아쉽게 탈락]
[2라운드 4조 결과 다시 보기]
OOTY 오케스트라 대전은 2라운 드 3조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다음 조 연주를 마무리하였다.
3조에 비해 화제성은 많이 내려 갔으나 4조는 치열한 양상을 보이며 뭇 클래식 음악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탈리아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오케스트라가 조 1위로 진출.
최명운 지휘자의 대한국립교향악단이 프랑스 국립방송 오케스트라 와 근소한 차이로 조 3위를 기록.
다음 라운드 진출에 실패하였다.
한국인들에게는 무척 아쉬운 결 과였는데, 그러나 뛰어난 음악가들 이 많은 나라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는 충분했고, 최명운 지휘자도 지금까지의 선전에 아쉬워하기보 다는 대한민국의 클래식 음악 질을 높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는 인터뷰를 남겼다.
동시에 5일 차, 5조에 예정된 젊고 유능한 한국 음악가들의 건투를 빌기도 하였다.
그의 바람은 모든 한국 팬의 생 각과 같았다.
4일 차 기사를 정리한 이필호 편 집장과 정세윤 기자는 기지개를 켰다.
늦은 시간이지만 그들의 얼굴에 서 피로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내일이 진짜네요.”
“그러게. 오늘은 아쉽게 되었지만 내일은 분명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겠지.”
“난리도 아니에요. 커뮤니티 사이 트에 벌써부터 수십 페이지나 쌓였어요.”
“아무래도 배도빈이 나오는 날이 니까. 게다가 이승훈, 최성신에 최지훈도 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아, 나윤희도 있었네.”
막상 늘어놓고 말하니 대한민국 젊은 세대의 주역이 모두 모인 것 같았다.
이제 겨우 서른을 갓 넘긴 이승 훈이 개중 최고 연장자니 말할 것 도 없었다.
“어떻게 보세요?”
“ 뭘?”
“결과요.”
“음……. 오케스트라로 판단하면 역시 베를린과 시카고의 우세지. 제르바 루빈스타인이야 뭐, 말할 것도 없는 거장 중의 거장이고 배도빈은 단 한 번도 정상에서 내려 오지 않았으니까. 뭐, 로스앤젤레 스도 저력이 있으니 아리엘 얀스 가 얼마나 분발하는지에 따라 달 라지겠지만.”
“로스앤젤레스는 정말 아쉬워요. 구스타프 하나엘이 쓰러지지만 않았으면 베를린, 시카고랑 함께 3 조 못지않은 빅 매치였을 텐데.”
“그러게.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
“그럼…… 편집장님은 베를린과 시카고 쪽으로 생각하시는 거예요?”
“으음. 그렇지만도 않은 게 역시 피아노 협주곡이니만큼 피아니스트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지. 피아니스트라면…… 역시 최성신과 톰 앤드류려나?”
“아. 역시 그렇죠.”
“응. 아무래도. 유럽에서는 최성 신, 아메리카에서는 톰 앤드류가 압도적인데, 최지훈과 엘리자베타 툭타미셰바는 그 아래라 보는 게 일반적이니까.”
“스토리도 재밌을 것 같아요. 배도빈과 최지훈의 관계야 유명하지 만 툭타미셰바도 사카모토 료이치 의 제자잖아요.”
“하하. 배도빈이 사카모토에게 배 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사카모토 료이치 본인이 부정하는 데도 참 사람 마음 이해 못 하겠어.”
“두 사람이 워낙 오래 알고 지냈 으니까요. 아, 그래서요? 피아니스트까지 고려하시면?”
“종합적으로 봤을 때는 정말……
“네.”
“응. 알 수 없겠어.”
두 사람의 대화처럼 5조 결과에 대해 확언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언뜻 세기의 천재라 불리는 배도빈과 마리 얀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같은 평가를 받는 제르바 루빈스타인이 이끄는 베를린과 시 카고가 우세해 보였지만 피아니스트의 차이를 무시할 수도 없는 노 릇이었다.
션윈이 가장 약세라 보이나 앞선 1라운드에서 보여준 팬들의 화력과 최성신의 기력을 고려하면, 베를린, 시카고, 션윈의 삼파전으로 예상.
또 다른 거장, 구스타프 하나엘이 빠진 명문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은 최약체로 분류되었다.
5일 차 당일 아침이 밝았다.
마지막 차례였기에 베를린 필하모닉 B는 일찌감치 대기실에 모여 마지막 점검을 하였다.
다들 어련히 알아서 잘할 것을 알기에 개인실에서 카라얀이 지휘한 드보르자크를 들으며 쉬었다.
그러던 중 구두 소리가 들렸고 이내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 네.”
문을 열고 들어온 얼굴을 보자마자 기분이 나빠졌다.
아리엘 핀 얀스다.
“컨디션은 어떤가, 베를린의 마왕이여.”
“ 나가.”
“이런. 두려워도 어쩔 수 없네.
우리는 다시금 외나무다리에서 만났으니까. 이것이야말로 신의 계 시. 당신을 무찌르라는 신탁이지.”
들고 있던 펜을 던졌더니 날렵하게 피한다.
맞았으면 좋았을 것을.
쓸데없이 반응이 빠르다.
“난폭하군. 그러나 내게 그런 짓에 당할 아리엘 핀 얀스가 아니다.”
머리가 아파진다.
“썩 꺼져.”
첫 순서면서 뭐하러 온 건지 이해할 수 없다.
툭 _
두통을 느껴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는데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떠보니 내 앞에 녀석의 흰 장갑이 놓여 있었다.
“결투다. 1라운드 때는 내 패배를 인정하지. 그러나 오늘만큼은 양보치 않겠다, 마왕이여.”
누가 들으면 네가 봐준 걸로 알겠다.
“오늘 결과가 모든 것을 밝혀주겠지. 누가 새로운 시대를 열 개척자이자 선지자인지.”
“관심 없으니 나가라.”
아리엘 얀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의외군.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 해 노력하는 자라 여겼거늘 어찌 하여 그런 말을 하지?”
녀석이 두 팔을 펼치며 뜬금없이 연설을 시작했다.
“고결한 얀스 가문의 나 아리엘은 이 시대의 정체된 음악을 다음 세 대로 이끌어갈 사명을 짊어졌다. 내게 주어진 찬란한 재능이야말로 신이 내게 그 임무를 부여했다는 증거.”
꼴값 떤다.
“비록 나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내 가 인정하는 유일한 인간이 그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실 망이야.”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생각해 보니 피아노 친구였던 홍 승일이 내게 반복했던 이야기다.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을 좁히지 못했지만, 피아노로 벗 이 되었던 남자를 떠올리면 지금 도 가슴이 아프다.
이 녀석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자 기분이 좋지 않아졌다.
“다시 말하기 귀찮다.”
축객령을 내리자 아리엘 얀스가 뒤돌았다.
“마왕이여, 당신은 의지는 있으나 능력이 없는 이들을 모른다. 새 시 대는 내가 열지. ……다시 인사하 러 오는 일은 없을 거다.”
녀석이 방을 나갔다.
말 그대로 내게 실망한 듯한데 그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저 혼자 난리 치는 것뿐이라 역시 제정 신이 아니라 여기며 다시금 카라얀 의 드보르자크를 틀었다.
신세계로부터.
‘새 시대라.’
홍승일은 내게 더 많은 활동을 하기 바랐다.
하나의 분야에 국한된 것이 아니 라 작곡, 연주, 지휘 등 모든 분야 에서 재능을 발휘하길 바랐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지만, 내가 음악을 하는 이유는 그리 거 창한 일이 아니다.
시대를 만든다.
새로운 사조를 만든다.
세계를 변화시킨다.
그러한 일 따위, 가능한 것을 떠나 한 인간이 할 일이 아니라 생 각했다.
그것은 착각.
프랑스 대혁명 당시, 뚱뚱하고 욕심 많은 돼지 새끼를 새로운 시대를 열 남자라 생각했던 내 오판을 반복하고 싶진 않았다.
프랑스에서 지펴진 자유의 불은 어느 한 인간이 아니라 대중들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
현대의 클래식 음악에 새로운 시대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여러음 악가와 팬들이 함께 만들어가야 함을 잘 알고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더욱 아름다운 곡을, 지금까지 없었던 곡 을, 내 영혼이 타오를 때마다 피어 나 표출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악상을 연주하고 지휘하는 일뿐이다.
예전에는 나 루트비히를 노래했고.
지금은 나 배도빈을 연주하는, 한 인간을 표현하는 것만이 내 목표다.
바흐는 우주를 말했고.
모차르트는 자연을 표현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을 노래했고 그 생각은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이다.
신적인 존재가 되길 바라는 것이 아니다.
나를 말함으로써 듣는 사람을 말 함으로써 나와 청중이 위로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아직도 그렇게 바라는가, 벗이 여.’
생의 마지막까지 피아노를 놓지 않았던, 벗에게 물었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