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51화 (251/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251화

56. 계절(2)

배도빈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남은 듯 로비에 있는 모든 사람의 귀에서 반복되었다.

고요했다.

‘무엇을 위하냐고?’

레몽 도네크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무대에 오르는 행위는 연주를 들려 주기 위함이었다. 듣는 사람에게 즐 거움, 슬픔, 절망, 환희와 같은 여러 형태의 감동을 주기 위해서였다.

“소란스럽군.”

그때 굵고 낮은 목소리가 로비에 묵직이 울렸다.

폭군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와 베를린 필하모닉이 한쪽에 서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푸르트벵글러는 레몽 도네크를 보 다가 고개를 돌려 배도빈을 보았다.

천천히 걸어 나와서는.

“수고했다.”

배도빈을 이끌었고 레몽 도네크를 지나치다 이내 걸음을 멈추었다. 돌 아보지 않았고 앞을 볼 뿐이었다.

“늘었더구나.”

그의 말이 누구에게 향하는지는 로 비 안의 모든 사람이 알 수 있었다.

푸르트벵글러가 다시 걸어나가자 레몽 도네크가 주먹을 꽉 쥔 채 옛 스승을 멈춰 세웠다.

“……당신도 제 연주가 틀리다고 생각하십니까?”

푸르트벵글러는 답하지 않았다.

“악보에 충실하고 전통을 지키려는 것이 그렇게 잘못된 겁니까? 지금의 베를린이 정녕 베를린 필이라 믿으시는 겁니까?”

“레몽!”

케르바 슈타인이 나섰으나 푸르트벵글러가 그를 저지했다.

“세프••••••

푸르트벵글러는 레몽 도네크를 안 타갑게 바라보았다. 그 감정이 그의 목소리에 묻어나왔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정신은 팬들에게 있다. 팬이 이해하지 못하고 감 동할 수 없다면 악단으로서의 의미는 조금도 없다. 아무리 훌륭한 연주를 하더라도 말이다.”

푸르트벵글러가 다시금 걷기 시작 했고 기자들은 흥분하여 런던과 베를린에 나뉘어 붙기 시작했다.

“마에스트로! 레몽 도네크와 베를린 필하모닉의 불화가 사실이었습니까?”

“배도빈 악장! 런던 필하모닉의 연주가 자장가라고 발언하신 것에 대 한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마에스트로! 베를린 필하모닉을 견제하는 건 주구하는 방향이 다르 기 때문입니까?”

“먼저 공격하셨는데 아무 말씀도 없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레몽 도네크는 그야말로 난리가 난 로비의 한가운데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오래된 기억에 잠식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선생님의 베토벤은 언제 들어도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이번 연주 회는 정말 완벽했습니다.”

“나야 언제나 대단하지. 당연한 말 말고 정리나 해.”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이 악보는 잘 보관해 두겠습니다.”

“그걸 왜?”

“다음에도 써야 할 테니까요. 두고 두고 익혀 단원들이 더욱 잘 연주하 도록 연습시키겠습니다.”

“사무국 기록실에나 처박아 둬. 다 음엔 다르게 갈 거니까. 으음…… 빠빠빠빰이 좋겠군.”

“예? 이렇게나 완벽한데요?”

“쯧쯧. 이미 일주일씩이나 연주했고 음반으로도 나올 텐데 뭐 하러 다시 연주하나? 다음에는 다르게 가 야 사람들도 즐거워하지.”

“하지만 이렇게나 좋은 악보를

“뭐, 언젠가 다시 쓸 때가 있겠지. 하지만 레몽, 내일은 아니야. 그 악보를 꺼낸다 해도 똑같이 연주하는 일도 없을 테고.”

“아깝지 않습니까? 분명 이 악보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전혀. 아무리 좋은 곡도 반복하면 식상할 뿐이지.”

“그러고 보니 이 부분은 여전히 아 쉽군. 의도만큼 풀리지 않았어.”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완벽한 구 조입니다.”

“완벽한 음악은 없어. 베토벤이 이 부분을 만들었을 때 사람들이 놀라 길 바랐지 구조적인 완벽함을 알기 바랐을까?”

“ 그건••••••

“자넨 귀도 좋고 심상도 풍부하고 또 잘 표현하지만 그게 문제야. 잘 기억해 둬.”

“ 네.”

“지휘를 잘하는 비밀은 청중이 이 런 이론을 몰라도 느낄 수 있게 하는 거야. 가슴에 딱 새겨주는 거지. 듣는 사람도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네. 그저 느낀 대로 즐기면 되는 거야.”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말하지. 어려운 걸 그대로 푸는 건 쉬워. 위대한 음악가는 악보에서 작곡가의 의도를 찾아내 그 걸 청중들에게 쉽게 들려주지. 영혼 이 이끄는 대로 자연스럽게. 그저 악보를 연주할 뿐이라면 위대한 음

악가는 있을 수 없다는 말이야.”1)

1)빌헬름 푸르트벵글러(1886시954):

예술은 비민주적이나 인간을 향한 것이다. 큰 뜻을 표현하는 일은 가 장 단순한 방법만이 가능하다는 점 이다. 복잡한 것은 노변에 놓일 뿐. 위대한 음악은 마음속에 있다.

Die Kunst ist eine undemokratisch e Sache. Und doch wendet sie sich ans Volk. Das Geheimnis ist, dass das Einfachste nur der Grö ß te auss prechen kann-und das Komplizierte auf der Straße liegt. Die Größe lie gt in der Seele.

배도빈, 푸르트벵글러와 토스카니니, 레몽 도네크의 논쟁은 실시간으로 중계되어 세계 각지에 퍼졌다.

작년 한 해 라이벌로 부상하면서 이슈가 되었던 두 악단이었던 만큼 파장은 클 수밖에 없었다.

여론은 또다시 베를린과 런던으로 나뉘어 논쟁을 이어나갔으며 언론은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바삐 움직였다.

그에 따라 클래식 음악 팬들은 인 터넷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주장 또는 강요했다.

ㄴ 배도빈 말 한번 시원하게 하네. 심심한 연주 할 거면 대체 공연은 왜 하는데?

ㄴ 기사 여러 개 찾아봤는데 결국 런던 쪽은 악보를 깊이 있게 파고들 어 그 안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거고 베를린은 시대랑 작곡가의 의도에 중점을 두고 음악을 쉽게 한다는 뜻 이네.

ㄴ 확실히 베를린 음악이 뭔가 가슴을 움직이게 하지.

ㄴ 악보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게 나쁜 건 아닌 거 같은데.

ㄴ 나도 같은 생각임.

ㄴ 근데 난 런던 필하모닉 음악 들 으면 공부하는 거 같아서 별로임. 베를린 필하모닉이 그냥 느끼기 쉬움.

ㄴ 악보에 국한되어서 그럼. 솔직히 작곡가가 의도한 게 지금에 와서는 잘 드러나지 않을 수밖에 없어. 워낙 자극적인 걸 많이 들었으니까.

ㄴ 시대연주를 한다고 해서 못 알아 듣는 건 아니지. 교양이 없어서 그런 거임. 모르면 배워.

ㄴ 난 그냥 편하게 듣고 싶은데.

ㄴ 결국엔 베를린 필이 추구하는 것 도 그거임. 그냥 편하게 들을 수 있게 직관적이고 효과적으로 편곡하는 건데 난 이게 옳다고 봄.

ㄴ 악보에 집중했다고는 하는데 잘 모르겠다. 그냥 베를린 음악이 더 감동적인데, 나만 이해 못 하나?

ㄴ ㅇㅇ. 너만 이해 못 함.

ㄴ 솔직히 음악 아는 사람일수록 런 던 필하모닉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거다. 악보 내에 있는 정보를 최대한 살려서 연주하는 게 쉬운 줄 아냐?

ㄴ 그러니까 매번 똑같지. 그럴 거 면 비싼 돈 내고 시간 할애하면서 왜 직관하는데? 집에서 음반 듣고 말지.

ㄴ 그건 네가 막귀라서 그래. 현장 에서 듣는 거랑 음반으로 듣는 거랑 같냐?

ㄴ 직접 듣는 거랑 음향기기로 듣는 거랑 다를 수밖에 없지. 근데 본질은 어떤 음악을 하느냐가 중요한 거 야. 변화도 없이 고여 있기만 하면 그 수많은 악단이 왜 필요한데?

ㄴ 다 필요 없이 성적으로 증명된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리빌딩한 뒤로 디지털 콘서트홀 방문객 수가 급 증했음. 런던 필하모닉과는 비교도 할 수 없고.

ㄴ 그렇게 자극적인 것만 찾는 것도 문제야.

ㄴ 왜, 마약이라고도 하지?

ㄴ 음악사를 뒤져 보면 위대한 음악 가는 모두 변화를 추구했음.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 모두. 그 사람들로 인해 새로운 시대가 왔고. 지금은 고전(클래식)이라 묶여 있지만 우리가 지금 듣는 곡들 당시 에 혁신적이었음.

ㄴ 그걸 왜 변형시키냐는 말이잖아.

ㄴ 그대로도 훌륭한걸.

ㄴ 시대에 맞춰서, 매 연주회마다 달리 연주하는 게 어떻게 변형이냐? 그런다고 원곡이 달라지니?

ㄴ 같아. 모든 악단이 모든 연주회를 똑같이 연주하면 그게 뭔 재미야?

ㄴ 시대를 초월한 가치는 분명 있음. 하지만 과거 음악가들이 남긴 곡도 보존해야 하고. 하지만 깊게 공부할수록 생각이 달라지지. 악보로 남은 것을 넘어서 과거 거장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이해하면 자연 스레 그거에 집중하게 되고 기록보 다는 그 정신을 좇게 됨.

ㄴ 말은 번듯해도 그거 전부 주관적 인 거잖아.

ㄴ 네가 말했네. 그럼 예술에 정답 이 있냐? 음악 하는 사람이 그 주관으로 색을 드러내지, 그런 거 없으면 음악은 대체 왜 하는데?

ㄴ 그건 맞는 말이네.

논쟁 속에서 상대방의 입장에 수긍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베를린 필하모닉과 런던 필하모닉은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버릴 수 없었다.

그것을 신념으로 삼아 매일 10시 간 이상 수십 년을 달려온 이들이었기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대에 오르는 것뿐이었다.

역사에 남을 거장이라는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마리 얀스, 사카모토 료이치, 제르바 루빈스타인, 브루노 발 터,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그리고 배도빈이 말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는 일은.

시대와 사람만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기나긴 논쟁을 일단락할 때가 도래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의 마 지막 차례, 피아니스트 글렌 골드와 베를린 필하모닉 A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연주곡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입니다.”

사회자의 소개 뒤에 베를린 필하모닉의 단원들이 무대에 올라섰다.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모든 단원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엄숙히 눈을 감았다.

“살벌한데?”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관객들이 베를린 필하모닉의 존재 감에 압도되어 있을 때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피아니스트 글렌 골드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두 거장을 환영하는 소리가 콘서트홀을 가득 채웠고 푸르트벵글러는 관객들에게 인사를 한 뒤 돌아섰다.

박수 소리가 멈췄고.

폭군은 오른쪽에서부터 자신의 기 사들과 하나하나 시선을 교환했다.

현세대 최고의 거장이 주는 신뢰의 눈빛에 단원들은 잡념을 잊고 자부 심을 채워 오직 연주만을 생각할 수 있었다.

푸르트벵글러의 시선이 케르바 슈 타인에 이어 오랜 친구 글렌 골드에게 닿았다.

글렌 골드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푸르트벵글러는 두 주먹을 힘차게 뻗어.

베토벤이 남긴 마지막 피아노 협주곡.

카이저(Kaiser: 황제)의 시작을 알렸다.

베를린 필하모닉이 폭죽을 쏘아 올렸고, 글렌 골드의 피아노가 날갯짓을 하였다.

이번에는 좀 더 크게.

베를린 필이 더욱 큰 포탄을 쏘아 올리자 피아노의 날갯짓은 더욱 화려 해졌고.

다시 한번 더욱 크게.

아름다운 불꽃을 수놓은 하늘로 여러 산새가 비상해 올랐다.

축제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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