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베토벤-250화 (250/564)

다시 태어난 베토벤 250화

56. 계절(1)

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되자 곧 사회자가 다음 순서를 알렸다.

이내 런던 필하모닉이 무대에 올랐고 아직 암스테르담과 가우왕이 남긴 여운을 음미하고 있던 관객들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또 다른 명가를 맞이했다.

단원들이 준비를 끝내자 마술사 아 르투로 토스카니니와 예브기니 키스가 무대에 발을 디뎠다.

앞서 마리 얀스와 가우왕이 받은 환호에 못지않은 열렬한 반응이었다.

이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조합도 만만치 않지.”

“네. 토스카니니와 키스는 여러 번 호흡을 맞췄으니까요.”

정세윤의 말대로 두 사람은 오랜 인연을 이어왔었다.

키스는 유럽뿐만이 아니라 북미, 동북아시아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로서 여러 거장과 함께했었다.

그가 어렸을 적 노년의 헤르베르트 카라얀과 협주곡을 맞추기도 했을 정도로 정석적인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였다.

특히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뉴욕 필하모닉에 재직하고 있을 당시 해 마다 공연을 함께했을 정도로 친밀 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그런 만큼 두 사람을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였다.

“게다가 예브기니 키스의 장기인 쇼팽이네요.”

“음. 좋은 곡이긴 한데……. 좀 이상하긴 해.”

“뭐가요?”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멋진 곡이긴 해도 피아노에 집중되었다 보니 오케스트라는 역할이 적을 수 밖에 없거든.”

차채은은 좀 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박수 소리가 잦아들어 그럴 수 없었다.

토스카니니가 두 팔을 들었다가 지휘봉을 크게 휘둘렀다.

마법을 부리는 듯한 그 모습과 함께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시작되었다.

‘쯧쯧. 시작부터 망쳐 놓았구만.’

푸르트벵글러가 토스카니니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토스카니니의 손짓은 열정적이었다.

런던 필하모닉이 낸 구슬픈 멜로디가 무게감 있게 콘서트홀에 스며들었다.

다소 긴 오케스트라의 전주가 잦아 들고 마침내 예브기니 키스의 독주가 시작되었다.

엇갈리는 박자와 섬세한 터치에서 전해지는 애수 어린 쇼팽의 마음은 강하고 약해졌다.

첼로의 부드러움 음색이 피아노 아래 자욱하게 깔리고.

그제야 차채은은 이필호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의 답을 스스로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도 할 수 있구나.’

평론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여러 공부를 하고 있긴 했지만 차채은 의 교과서는 항상 배도빈이었다.

배도빈의 음악은 언제나 혁신적이었고 차채은이 고정관념을 가지지 않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현세대 다른 거장이 어떻게 곡을 해석하는지에 대해서는 공부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런던 필하모닉의 연주를 들 을수록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생각을 유추할 수 있었다.

배도빈이나 푸르트벵글러였다면 대 회 취지에 맞게 곡을 과감히 변형시켜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조화를 꾀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토스카니니는 악보 그대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어 피아노를 더욱 부각시켰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런던 필하모닉은 조연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예브기니 키스의 애절한 피아노가 더 욱 부각되어, 결과적으로는 심금을 울리고 있었다.

차채은은 이 역시 다른 방향의과 감함이라고 판단했다.

그 생각은 비록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거장,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의도에 부합하였고.

그를 잘 알고 있는 사카모토 료이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피아노 협주곡의 주인공은 피아노란 말인가.’

사카모토는 같은 시대를 이끌었던 마술사의 지휘에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 진부한 생각이었지만 동시에 현시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만큼 악부에 철두철미한 이도 드물었다.

암스테르담의 마리 얀스나 시카고의 제르바 루빈스타인 등 대부분의 지휘자가 적절한 변형을 지향했고.

베를린 필하모닉의 푸르트벵글러와 배도빈은 모든 부분에 있어서 혁신을 거듭했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브루노 발터 같은 고전주의자들은 옛것을 유 지, 더욱 잘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고유한 성 격을 띠게 되었다.

이 역시 분명 음악사에 한 줄기임에 분명했다.

‘젊은 날로 돌아온 것 같군.’

사카모토 료이치는 아르투로 토스 카니니와 예브기니 키스에 이끌렸다. 마치 시간을 되돌려 근대의 공연장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카모토는 아쉬움을 달랠 수 없었다.

당시의 기억과 음악적 소양을 갖춘 자신은 이 기분을 느낄 수 있지만, 그래서 토스카니니의 이러한 연주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다른 관중이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연주가 끝나고.

관객들은 박수를 보냈다.

레몽 도네크는 아르투로 토스카니 니 옆에서 자기의 역할을 다해내고 있었다.

베를린에 있을 때와 다름없이 그가 바라는 길을 향해 나아가는 듯하다.

서운하지만 그의 행동이 본인을 위 한 것이라면 이제 나도 단원들도 그를 놓아주는 게 옳은 일이겠지.

“도빈아, 밥 먹으러 가자.”

일어나 나가는데 사람이 워낙 많아 출구가 번잡했다.

“붐비네.”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다들 줄 서 있고.”

줄은 서 있는데 여러 개다.

사람들 사이에 막혀 길이 생기길 기다리는데 옆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아, 토스카니니다.”

안 보인다.

최지훈이 레몽 도네크와 예브기니 키스도 함께 있다고 덧붙여 말해주었다.

“기자들이 몰려서 더 번잡한가 봐.”

“민폐.”

소소가 이마를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오후 공연 전까지 2시간 정도 간격이 있기에 모두 점심을 먹으려고 할 때, 뒷문이 아니라 굳이 정문으로 나선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에 대한 질타였다.

나도 심히 공감하지만 정작 팬과 기자들은 좋아하고 있다.

“멋진 연주를 들려주셨습니다. 오늘 결과에 대해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런던 필하모닉이 1위, 로얄 콘세르트허바우가 2위, 베를린은 꼴찌요.”

저 늙은이가 노망이 났나.

“벌써부터 오늘 지휘하신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에 대한 찬사가 이 어지고 있습니다. 준비함에 있어 무엇을 염두에 두셨습니까?”

“ 악보요.”

“ 네?”

“음악을 하는 데 악보 이외에 필요한 건 없소. 마음대로 악보를 고치는 불한당들이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군.”

“아아.”

다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답에 감탄했다.

“뭔가 대단한 사람이네.”

최지훈이 황당한 얼굴로 반어적 표현을 썼다.

그 말대로 음악은 들어줄 만하지만 몹시 불쾌한 인간이다.

“노망난 늙은이지.”

“맞아.”

“우, 우승은 베를린 필하모닉이 할 거예요.”

소소와 나윤희가 내 말에 동조했고.

“흐아아암. 좋은 연주였나? 난 좀 지루했는데.”

진달래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마리 얀스의 연주를 듣고 어깨와 고개를 들썩이던 반응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아는 만큼 들리는 것도 사실이고 음악을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중에게도 어느 정도의 수준이 필요 하긴 하나.

음악은 대중을 향한 일.

그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음악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그것이 내가 런던 필하모닉을 높게 사면서도 불쌍히 여기는 이유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클래식 음악 시장이 조금씩 줄어들었던 것도 그 탓일 거라 생각한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어색한 독일어 발음으로 물어 왔다.

이시하라 린이다.

“배도빈 악장! 오늘 오전 연주 어떻게 들으셨나요?”

의기양양한 표정이 저런 말을 듣고도 가만있을 거냐고 묻는 듯하다.

역시 다른 기자들과 달리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굳이 나설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 자리를 마련해 주었는데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다.

“암스테르담 로얄 콘세르트허바우의 연주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장치는 정밀했고 음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는 더 나을 수 없을 것 같네요.”

슬쩍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있는 방향을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런던 필하모닉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자장가를 이렇게 잘 연주할 줄은 몰랐네요.”

내가 말을 뱉은 순간 이시하라 린의 동공이 커졌고 입에는 웃음이 걸렸다.

주변을 감싸고 있던 팬들과 기자들도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쇠가 긁히는 듯 갈라진 목소리로 성을 냈다.

“푸르트벵글러와 붙어 있더니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푸르트벵글러에게 배웠다니 .

그간 어울리고 싶지 않아 무시했더니 다들 날 얌전한 고양이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네 녀석 얼굴 좀 보자!”

토스카니니가 기자들을 밀치며 다가왔다. 그 뒤에 레몽 도네크도 함께 서 있다.

“내 연주가 자장가였다고?”

재정 독립을 하여 인터플레이와의 일을 적당히 모른 척 넘어가 주었건만 주제도 모르고 자꾸만 시비를 걸 어오는 통에 더는 참아줄 수 없었다.

더욱이 그것이 나의 베를린 필하모닉에 대한 모욕이라면 더더욱.

“하품이 다 나오더라고요.”

토스카니니의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다.

“사과해라.”

레몽 도네크가 말했다.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꽤 화난 듯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일도 했었나?”

“이런 일?”

“……런던 필하모닉은 최고의 연주를 했다. 그걸 네가 모를 리 없을 텐데.”

“최고라니. 부끄러운 줄 아세요. 레몽 도네크 씨.”

그가 왜 떠났는지 안다.

지휘봉을 잡기 위해 그가 진실된 마음으로 노력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렇게 자리가 마련되었을 때 한마디 해줘야겠다.

“뭐라고?”

“대체 푸르트벵글러에게 뭘 배운 거예요? 당신이야말로 이런 연주나 하려고 말도 없이 런던으로 간 겁니까?”

“뭐라고!”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발을 구르며 역정을 냈다.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2악절로 구성된 제1주제의 전반부, 바이올린에 포르테를 넣었죠? 악보대로 후반부에는 레가토 에스프 레시보로 대조를 이뤘네요.”

“그래!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이냐!”

“그래서 그 연주가 사람들 마음을 움직였다고 생각합니까?”

말을 하면서도 기가 찬다.

“방금 이 대화가 무슨 의미인지 아는 분 계십니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답이 없다.

문장 자체의 의미야 아는 이도 모르는 이도 있을 테지만 왜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사람 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토스카니니와 레몽 도네크는 악보대로 연주했고 여기 있는 청중들은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한 채 감동도 없이 들었을 뿐이다.

이들만큼 지식도 없고.

이미 익숙한 대조이기 때문에 응당 느껴야 할 감정을 못 느꼈으리라.

“대조를 넣을 거라면 좀 더 격차를 주었어야죠. 예전처럼 연주하니 뻔 해지는 거 아니에요.”

“악보대로 연주한 걸 모르고 하는 말이냐! 네가 작은 성공으로 쇼팽을 기만하는구나!”

목소리 한번 크네.

토스카니니의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거슬린다.

“쇼팽을 기만하고 무시하는 건 당신이죠. 그 멋진 피아노를 남이 만든 관현악 악보대로 연주하다니. 악보에 충실하면 작곡가를 존중하는 겁니까?”

나는 나 외에 그 누구도 내가 적 어놓은 악보대로 연주하기 바라지 않는다.

나와 같을 수도 없으며 그걸 내 연주라고 하는 것이 나에 대한 모욕이다.

동시에 그걸 연주하는 본인의 음악 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거다.

“전통을 지킨다는 말에 매몰돼 듣는 사람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없으면서, 그것을 어떻게 최고의 음악이 라 할 수 있습니까.”

토스카니니를 보며 외쳤고.

레몽 도네크를 꾸짖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레몽 도네크 씨. 당신은 마에스트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게 뭘 배운 겁니까?”

그간 하고 싶었던 말을 쏘아붙였다.

“당신은 누구를 위해 무대에 오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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